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5)
14화 – 해방
잘 부탁드립니다
“명예롭게 자결하겠나, 남의 손을 빌려 죽는 편이 낫겠나?”
“…네?”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나?”
팔라토의 말에 라프람은 필사적으로 두 손을 내밀며 항변했다.
무언가를 쥐고 싶은 것처럼 내민 두 손은, 공포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 다 말했잖아요! 그게 내가 아는 전부라고요!”
“다 말해줬으니까 이렇게 정중하게 제의하는 걸세. 만약 자네가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기회도 없었을 게야.”
팔라토의 말에 아르센은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엔티르나 종자들은 물론, 심지어 평상시 다정다감한 인상이던 제노비아까지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로 라프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죽어야 한다는 데 의문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아르센은 팔라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약탈자에서 보통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없습니까, 팔라토 경?”
“내가 아는 한은 없네. 마수의 피를 몇 번 마신 정도라면 모를까, 자네 형제는 완전히 오염됐어.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네.”
아르센의 질문에 팔라토는 자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내용과 상황에 너무도 맞지 않는 온화한 태도여서 되려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다시 라프람에게 고개를 돌린 팔라토가 질문을 던졌다.
그 말투는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단호했다.
“다시 한번 묻겠네, 라프람. 스스로 죽겠나, 아니면 남의 손을 빌려서 죽겠나?”
질문을 받은 라프람의 몸이 간질이라도 걸린 듯 덜덜 떨렸다.
“아, 아…싫어요, 저는…아르센! 날 살려줘! 제발! 우린 형제잖아!”
엉금엉금 기어 아르센의 앞에 다가온 라프람이 아르센의 바짓단을 붙들며 울부짖었다.
그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그것을 외면으로 해석했는지, 라프람이 한층 더 처절하게 울며 아예 두 팔을 다리에 감고 매달렸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울음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어떻게, 그냥 성채에서 쫓아내기만 한다면…”
“의미 없는 일이네. 이렇게 어린 약탈자는 혼자 밖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만약 살아남는다면 다른 약탈자 집단에 합류했기 때문일 터. 거기서 성장한 라프람이 사람을 죽이고 범한다면 그 죄는 모두 자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는 걸세. 감당할 수 있겠나?”
담담한 어조로 되묻는 팔라토의 말이 너무나 옳아, 아르센은 몇 번 대답을 곱씹다 조용히 그것을 마음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구의 윤리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세계의 윤리로 봤을 때 라프람은 이미 사람이 아닌 마수였다.
그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을 뿐인 짐승.
과거의 인연으로, 동정심이 생긴다고 살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가볍고 무의미한 행위였다.
“자네의 형제는 이미 자네가 기억하던 사람이 아닐세. 지금은 두려워하며 울고 애원하니까 보통 사람처럼 보이지만, 기회만 된다면 충동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범하려 들겠지. 약탈자는 살려둬서는 안 되는 존재라네.”
팔라토의 단호한 말에 아르센은 한숨을 내쉬며 라프람을 내려다 보았다.
어린 시절, 지옥 같은 성채의 삶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형제.
보통 사람 기준으로 절친한 사이였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죽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라프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비록 그 강을 자신의 의지로 건넌 것이 아니라고 해도.
“미안하다, 라프람.”
아르센은 허리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감은 라프람의 두 팔을 억지로 풀어 밀어냈다.
냉정하게 걷어차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르센 역시 죽는다는 공포 앞에서 덜덜 떨었던 순간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라프람을 모욕하고 싶지 않았다.
“아, 아아…배신자! 더러운 새끼! 추잡한…”
외부인 창녀에게서 나온 놈이라느니, 개랑 접붙어 먹을 놈이라느니, 라프람은 두 눈을 시뻘겋게 뜬 채 침을 튀겨가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르센은 그렇게 덤벼드는 라프람을 두 팔을 붙드는 것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이대로 목을 조르건, 부러트리건, 아니면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죽이건, 어떤 수단을 쓰든 간단히 라프람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센은 그 중 어느 하나도 선택하지 못하고 라프람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바짝 얼었구나, 애송아. 꼴에 네 형제라고 못 죽이겠냐? 내가 대신 처리해 주랴?”
엔티르가 약을 올리듯 이죽거리자 아르센은 눈을 치켜뜨며 엔티르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에 엔티르 역시 두 눈을 포악하게 뜨며 마주 내려다보았다.
엔티르가 강하게 발을 구르자 힘이 어찌나 강한지 사방으로 진동이 퍼져나갔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어린 새끼가 건방지게…”
“엔티르 경, 부디 조금만, 조용히.”
팔라토가 엔티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잠시 팔라토를 째려보던 엔티르는 이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댔다.
더 이상 끼어들 마음이 없다는 듯이.
“…너 같은 새끼는…악!”
그때, 제노비아가 끊임없이 욕설을 쏟아붓던 라프람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두 다리가 땅에서 뜬 라프람이 괴로워하며 제노비아의 손을 마구 때리고 긁었지만, 하얗고 고운 여기사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고 라프람의 목을 바짝 죄었다.
제노비아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더 들을 말도 없는 거 같으니 처리할게. 괜찮지?”
아르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비아는 라프람을 들어 올린 채 말없이 성주관 밖으로 나갔다.
라프람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몇 초 뒤, 우드득 하고 닭 뼈 부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더 이상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 *
그날 밤, 아르센은 성주관 2층 테라스에 걸터앉아 저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마지막에 끌려나가며 라프람이 지르던 처절한 절규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라프람의 두 팔을 붙들고 있었을 뿐,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던 나약한 자신 또한.
라프람을 살려둘 수 없다는 확신이 섰다면, 차라리 그의 손으로 직접 죽였어야 했음에도 망설여서 죽이지 못했다.
이미 이 세상에서 산 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지구인의 나약한 감성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한탄하고 있을 무렵, 방문이 열렸다.
제노비아가 한 손에는 병을, 다른 한 손에는 놋쇠 잔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한잔할래?”
“설마 그거 술입니까?”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는 약이라고 하자.”
이제 열 살짜리인 어린애한테 술을 주려고 하다니.
물론 이 세계는 만 나이를 사용하기에 한국 기준으로 따지면 그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그래도 술을 먹을 나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지구 기준이 아니라 이 세계 기준으로도 그랬다.
“농담이고, 진짜 술은 아냐. 일종의 음료지. 아무렴 내일이 전투인데 술을 마실 정도로 정신이 나갔을까.”
문을 탕 닫은 제노비아가 마음대로 아르센의 맞은편에 앉아 테라스 위에 잔을 놓았다.
두 잔 모두 꽉 채워 따른 액체는 짙은 자줏빛이었다.
색깔만 보아서는 영락없는 포도주였다.
“원정대 보급품에 음료 반입이 허가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안 될 이유는 뭐겠어? 술도 아닌데.”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제노비아가 놋쇠 잔을 내밀었다.
“자, 이 누님이 주는 술을 어서 받으렴. 팔 떨어지기 전에. 이거 북쪽 영지에서 온 물건이라고. 엄청 비싼 거야.”
제노비아의 엄살을 귓가로 흘리며, 아르센은 잔을 쥐고 있는 그녀의 흰 손을 바라보았다.
크고 길다는 점만 빼면 여염집 아가씨 같은 저 손에, 오늘 낮에 그의 이복형제가 목이 꺾여 죽었다.
아르센은 어두운 생각을 떨쳐내고자 의도적으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 마시면 저도 공범이 되는 거 아닙니까? 일단 팔라토 경에게 보고부터 해야겠는데요.”
“그럼 진짜 죽을 줄 알아.”
귀엽게 윽박지르는 제노비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아르센은 잔에 든 액체를 입 안으로 흘려넣었다.
확실히 달짝지근하긴 하지만 알코올의 느낌은 전혀 없는 포도 주스에 가까운 맛이었다.
“맛있어?”
“맛있네요.”
“쪼끄만 꼬맹이가 벌써 술맛이나 알고, 그럼 못쓰는데.”
아르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제노비아는 제 기분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깔깔 웃으며 다 마신 잔에 다시 음료를 채웠다.
다시 한번, 홀로 한 잔 기울인 제노비아가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시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프람은 잘 묻어줬어.”
아르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창밖 너머 펼쳐진 어둠만을 응시했다.
테라스에 걸터앉은 둘이 서로를 보지 않고 바깥을 보고 있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낮에 들었던 말은 신경 쓰지 마. 그건 라프람이 아니라 라프람의 몸과 기억을 뺏은 더러운 약탈자가 한 말일 뿐이니까.”
그제야 아르센은 제노비아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내용물이야 어떻건, 남들이 보기에 아르센은 바로 오늘 낮 형제의 죽음이라는 가혹한 일을 목격한 어린 소년이었다.
사실, 아르센의 내면에 있는 지구인의 인격 역시 이런 일에 내성이 있지는 않았으니 그렇게 기분이 우울했던 것이 아닌가.
열 살 아르센보다는 어른이지만, 그의 내면 인격 역시 이 세계 기준으로는 그다지 성숙하다고 볼 수 없었다.
“기억도, 몸도 같은데 다른 사람일 수가 있을까요?”
“그건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그런 사악한 본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끔찍하잖아. 마수의 피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마음 편해.”
제노비아는 웃음기 섞인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하며 음료가 담긴 잔을 찰랑찰랑 흔들었다.
이후 말없이, 둘은 다시 한번 잔을 나눴다.
술도 아니건만, 술잔을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기지만, 라프람을 죽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자책하지는 마.”
“네?”
“아는 사람이 약탈자가 됐을 때 그걸 죽이기 힘든 건 정상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놈이 비정상이지. 오늘 라프람을 죽이지 못한 건 네가 나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서야.”
제노비아의 말에 아르센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몇 분쯤 지났을까, 다시 대답하는 아르센의 목소리에는 억누르고 누른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귀가 좋은 제노비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고맙습니다.”
“뭘.”
씩 웃는 제노비아의 미소를 보며, 아르센은 정말 이런 큰누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무겁고 찜찜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연애 얘기나 좀 해 보자고. 엘로이즈 아가씨랑은 어때? 지난번에 보니까 아주 죽고 못 살던데.”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요.”
“빼기는. 나도 연애 얘기해 줄까? 나랑 카민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연애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카민 경이랑요?”
상상도 못 한 소리에 아르센은 잠시 어두운 감정을 접어놓고 순수하게 놀랐다.
항상 세상 혼자 사는 것 같이 심드렁하고 금욕적인 얼굴을 한 그는 연애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린 같은 지역에서 살던 소꿉친구였는데, 원래 카민은 애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하는 처지였거든. 애가 숫기가 없어서 말도 잘 못 하고 덩치도 작으니까. 그래서 내가 카민을 지켜주겠다고 큰소리 빵빵 치면서 맨날 나무 막대기 휘두르고 다니다 눈에 띄어서 종자로 들어갔지.”
제노비아의 말을 들으며, 아르센은 따돌림당하는 어린 카민을 상상했다.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애들한테 얻어맞거나 하는 찌질한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유쾌해졌다.
마지막에 제노비아가 남긴 말만 아니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돌아가면 카민한테 결혼하자고 해볼까 생각 중이야. 나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까.”
“싸우기 전날에 그런 소리 들으니까 정말 기분이 묘해지네요.”
전형적인 사망 플래그를 세우는 제노비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아르센은 녹색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아까 전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일 있을 전투에서는 망설임 없이 적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거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원정대는 약탈자의 소굴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