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54)
연회 중인 광장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넷 모두 지저인들 특유의 마수 가죽 갑옷을 걸쳤는데, 그 생김새가 쌍둥이나 형제자매처럼 닮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수려한 얼굴에 어두운 흑청색 머리카락, 그리고 보랏빛 눈까지 모두.
말 그대로 보석처럼 빛나는 눈은 생물이 아닌 무언가처럼 보여 퍽 이질적이었다.
아르센 역시 눈의 색은 비슷할지언정 그들처럼 기묘한 광채가 흐르지는 않았다.
‘저래서 보석 눈이라고 하는 건가.’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다가간 티막이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샤티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마지막으로 만난 지 오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그쯤 됐겠군요.”
가장 앞에 선,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딱딱한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뒷머리를 땋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르센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기에.
놀랍게도 그녀는 물론, 그 뒤에 선 세 명도 모두 기사였다.
다른 거주지에서 대개 한두 명의 기사를 보냈음을 고려했을 때, 굉장히 강력한 지원군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 지상에서 온 사람들의 지도자인 아르센 경을 소개하지. 아, 이름은 아르센일세. 지상 사람들은 수호자의 이름에 ‘경’을 붙인다더군.”
“반갑습니다, 아르센이라고 합니다.”
“샤티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르센 경.”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아르센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뭐지?’
그때, 마침 배낭 밖에 매달려 있던 바크란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나서야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저 사람들. 너랑 되게 닮았는데?]그녀와 다른 기사들의 생김새가 흡사하듯, 아르센의 얼굴 역시 그들과 흡사했다.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한 이유는 아르센이 평상시에 자신의 얼굴을 자주 보지 않은 탓이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 덕에 그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르센과 보석 눈의 혈족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저 역시.”
미묘한 여운을 남긴 뒤, 그녀는 제 가족들을 데리고 광장 구석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 정도는 나누었으나 그 이상으로 교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구석에 자리 잡는 것을 확인한 뒤, 티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몇 년 만에 보는 거라서 확신하지 못했는데, 직접 보고 나니까 확실히 엄청나게 닮았구려. 가족이라고 해도 믿겠어. 실례지만 혹시 부모 중 이곳 출신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제 고향은 여기서 가는 데만 일 년은 걸릴 테니까요.”
아르센의 아버지인 레녹은 벨루안에서 나고 자란 기사였으니, 의심해 보자면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 쪽 가계일 터.
실제로 그의 보라색 눈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었다.
하지만 이 지하 통로에서 활동하는 혈족의 일원이, 말마따나 걸어서 일 년도 넘게 걸릴 벨루안까지 갈 수 있을까.
심지어 기사도 아닌 일반인이?
‘지하 통로를 타고 벨루안까지······아니, 그건 지상으로 가는 것보다도 현실성이 없는데.’
단호한 부정에 민망해졌는지, 티막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하며 말했다.
“어쨌든, 저들은 이 지하 세계에서 존경받는 혈족이라오. 워낙 폐쇄적이라서 다들 어려워하긴 하지만, 그 수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수호자를 배출하고 있지.”
기사를 네 명이나 데리고 온 것만 봐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본거지를 지키는 이도 두 명 정도는 있을 테니, 한 혈족이 기사를 대여섯 명씩 배출했다는 것 아닌가.
보통 기사 한 명이 자식 열 명을 보아도 기사가 되는 것은 한두 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실로 굉장한 일이었다.
그때, 티막이 아르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연회나 즐기는 게 어떻겠소? 어찌 됐든 이 연회는 그대들을 위한 것이니!”
* * *
즐거운 시간이 끝난 뒤, 다른 거주지에서 온 전사들은 각자 공동 여기저기로 흩어져 휴식을 취했다.
이 공동이 워낙에 크고 넓은 덕에,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추가로 머무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저인들이 저녁이라고 정한 시간, 아르센은 그에게 배정된 작은 집에서 손님 한 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석 눈의 혈족을 이끄는 기사, 샤티아를.
“연회는 즐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즐겼습니다, 덕분에.”
상투적인 인사를 나누며,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다시 보아도 그 얼굴은 아르센의 것과 흡사했다. 그가 열댓 살쯤 더 먹은 뒤 여성이 된다면 아마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샤티아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아르센 경의 어머니가 저와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제 어머니가 보라색 눈을 가진 분이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저를 낳고 돌아가셔서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역시······.”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에, 아르센은 티막에게 그랬듯 덧붙였다.
“그분이 이곳 출신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 고향인 벨루안은 여기서 엄청나게 먼 곳이라서요.”
샤티아는 아르센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가져온 가방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주먹 두 개 크기의 작은 청동색 향로였다.
“아르센 경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이게 뭡니까?”
“우리 혈족의 보물입니다. 혈연(血緣)을 확인하는 유물이죠. 이 안에 두 사람의 피를 넣으면 그 둘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를 알려줍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이걸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결과가 나온다면 모두 설명해 드릴 테니, 부디.”
로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가며 간청했다.
아르센은 고개 숙인 그녀를 한참 응시하고서야, 귀걸이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엘리. 들어와 줘.]아르센이 요청하고 몇 초 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로이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를 보고 샤티아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이 대화에 다른 사람은······.”
“본 적 없는 유물을 사용하려면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예전에 한 번 데일 뻔한 적이 있어서요.”
아르센은 그렇게 말한 뒤, 엘로이즈를 보며 덧붙였다.
“거기다, 엘리는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저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게 무엇이든 비밀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샤티아는 조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아르센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아르센이 이 향로를 사용하게 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엘로이즈가 유물에 손을 얹자 그녀의 얼굴이 얼핏 보여, 아르센은 귀걸이로 속삭이듯 말했다.
[얼굴이 좀 빨개졌는데?] [시끄러워.]투덜대듯이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쑥스러움과 뿌듯함이 섞인 묘한 감정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쑥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이내 엘로이즈는 진지한 얼굴로 감정 주문을 시전했다.
빛이 몇 번 번쩍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물에서 손을 뗐다.
“확실해. 이상한 기능은 없어.”
“고마워.”
그 성능까지 확인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는바, 아르센은 단도를 꺼낸 뒤 새끼손가락을 찔러 피를 흘려 넣었다.
단도를 거꾸로 쥐어 샤티아에게 넘기자 그녀 역시 피를 흘려 넣어, 마침내 두 사람의 피가 향로 안에 섞였다.
샤티아가 향로의 뚜껑을 닫고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 뚜껑을 닫고 마력을 주입하면······.”
향로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안에서 김이 끓는 듯 쉭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멍으로 피처럼 검붉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결과가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샤티아의 얼굴은 바짝 굳어 있었다.
아르센은 뭉게뭉게 새어 나오는 연기를 손으로 가볍게 흩어서 날리며 물었다.
“붉은 연기군요.”
“네.”
“무슨 의미입니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옅은 울음기마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매우 가까운 혈연이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모와 조카 정도겠군요.”
* * *
잠시 눈가를 훔친 뒤, 샤티아는 정중한 어조로 엘로이즈를 내보낼 것을 요청했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 혈족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는 이유였다.
아르센이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던 찰나, 엘로이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겠어?] [응. 내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라면 센이 말해주겠지.]그렇게 신뢰를 표시한 뒤, 엘로이즈는 망설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단둘이 남았음을 확인한 뒤, 샤티아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제게는 비테아라는 쌍둥이 자매가 있었습니다.”
“있었다고 하면?”
“네. 이미 이 지하 세계를 떠난 지 오래죠. 아마 그 비테아가 아르센 경의 어머니일 겁니다. 그녀를 제외한 제 친인척은 모두 여기서 나고 죽었으니까요.”
아르센이 무엇을 물어보려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우리는 이 지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이고, 덕분에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기서 나갈 수 있는 탈출구죠.”
티막이나 다른 지저인들이 알게 된다면 놀라 자빠질 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르센 일행이 지상에서 왔음을 알자마자 어떻게 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던가.
“정확히는 사용자를 어딘가로 이동시키는 유물로, 한 번 사용하면 꽤 오랫동안 쓸 수 없는 데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혈족 전체가 위기에 몰린 순간에 사용하기로 정해진 물건이라, 이를 마음대로 쓰는 것은 금기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전이문이었으나, 설명만 듣자면 이를 열화시킨 것처럼 느껴졌다.
반대쪽에 전이문과 이를 다룰 공간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는 단점을 제거한 대신, 다른 단점이 몇 개나 생겼으니.
말 그대로 ‘비상 탈출용’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걸 사용해서 지하를 나갔단 말입니까?”
“네. 비테아는 언제나 이곳을 갑갑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가축 같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게 되더라도 떠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죠. 정말 그럴 줄은 몰랐지만.”
어느 날, 비테아는 정말로 공간 이동 유물을 몰래 사용하여 떠나 버렸다고 했다.
제 쌍둥이 자매에게는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자유를 즐기며 살겠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오래오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아르센은 지하 세계를 떠난 비테아, 어머니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족과 영영 이별하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당찬 아가씨가 꿈꾸던 미래라는 것이, 기사에게 납치당한 뒤 그의 첩이 되어 자식을 낳다 죽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아르센 경을 낳고 죽었다니, 결국 나가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은 셈이군요······그 몇 년간은 행복했을까요?”
아르센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저었을 뿐.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샤티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아르센은 그녀가 충분히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몇 분 뒤, 조금 진정한 샤티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이해합니다. 그보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이야기하신 대로라면, 제 이모가 되시니 말입니다.”
아직 그 공간 이동 유물을 보기 전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샤티아의 말 자체는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았다.
실제로 유물을 이용해 가까운 혈연임을 확인하기도 했고.
“······그래. 알았다.”
“그런데 로샤 님이나 다른 분들······심지어 저까지, 좀 신기할 정도로 닮았더군요. 보통 혈연이라고 해도 모두가 그 정도로 닮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닮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에 비하면 로샤나 다른 보석 눈의 혈족, 그리고 아르센의 외모는 굉장히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혈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라 이를 물으니, 샤티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혈족의 특징이지.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라두스, 위대한 인도자의 후예이니.”
“인도자라면?”
아르센의 질문에 샤티아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전해 내려오기로, 우리의 선조는 지상과 지하를 잇는 문을 열 수 있었다고 하지. 끔찍한 지상의 재앙을 피해 지하로 사람들을 이끈 것이 최초의 인도자, 우리의 선조다.”
계승자를 암시하는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지하 통로로 들어오는 문이란 고대의 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적은 계승자에게 문을 열어 주는 법이기에.
즉, 아르센이 가진 계승자의 능력 역시 이쪽 혈통에서 왔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아름답고, 똑똑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더 쉽게 수호자가 되기도 하고. 우리의 피는 진하여, 다른 혈통과 한두 번쯤 섞인다고 쉬이 동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덮어 버린다면 모를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혈족 내에 비테아의 아들이 돌아왔음을 알려야지. 아마 모두가 기뻐할 거다.”
“행여나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그게 제 행보를 제약하는 일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껏 알게 된 친척들과 얼굴 붉히고 싶지 않다는 아르센의 말에, 샤티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것도 비테아를 닮았구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나부터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고, 다른 이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열 명도 넘는 수호자와 수십 명의 마법사를 부리는 이의 심기를 거스르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샤티아는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데다가, 조금 전 마법사······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데, 너 역시 인도자의 자질을 가진 모양이지.”
“네, 맞습니다.”
아르센이 당당히 인정하자, 샤티아는 몹시 기껍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혈족이 머무는 곳을 방문한다면 이 싸움에 큰 도움이 될 물건을 빌려주마. 인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마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