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57)
아르센은 가능한 한 냉정을 유지하며 이 창이라 주장하는 물건을 관찰했다.
누가 봐도 창날 대신 드릴을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건만, 에버릭은 이것이 창이라고 주장했다.
그냥 얼핏 보기에 드릴 같을 뿐 창이 아닌가 하는 희망을 품고 다시 관찰해 보았으나,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것은 그냥 드릴이었다. 날이라고는 전혀 달려 있지 않은.
[바크란, 혹시 이게 뭔지······.] [땅 파는데 쓰는 거 아냐? 그렇게 생겼는데.]머릿속에서 들려온 바크란의 목소리가 아르센의 마지막 희망을 꺾었다.
혹시 고대에는 드릴을 뭔가 색다른 용도가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기대했던 탓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한탄이 담겨 있었다.
[내 눈에만 그런 용도로 보이는 게 아닌가 보군.] [그럼 저걸 어디다 쓰겠어?]핀잔을 놓듯 말하던 바크란이 문득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모양새가 너무 현대적인 거 아닌가? 내가 살던 시대 물건은 이제 안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글쎄, 어쩌면 이곳의 특성 때문일지도······.]“어디 한 번 들어 보아라.”
에버릭의 제안에, 아르센은 바크란의 말을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창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창을 들어 올린 뒤, 마력을 불어넣었다.
‘오.’
위잉, 하고 소리를 내며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드릴.
불어넣는 마력의 양으로 회전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많은 마력을 불어넣을수록 회전속도 역시 올라갔다.
점점 더, 얼마나 불어넣을 수 있을지를 시험하다 보니 마침내 한계까지 마력이 들어찬 드릴은 어마어마한 굉음을 토해냈다. 이 건물 전체가 울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소리가 어찌나 큰지, 공사장에서 들을 수 있는 드릴 소리 따위는 자장가로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회전하고 있는 드릴을 허공에 휘두르자, 마치 게걸스럽게 공기를 갉아 먹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만약 이게 어딘가에 닿는다면······.’
그렇게 의문을 품은 순간, 에버릭은 어느새 검을 들고 아르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아르센을 향해 장검을 쭉 뻗었다.
“어디 간단히 시험해 보자꾸나.”
검을 내미는 행위의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회전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졌는지 알고 싶은 것일 터.
아르센은 에버릭이 내민 검에 회전하고 있는 드릴을 가져다 대었다. 조심스럽게, 마치 계란을 집듯이.
그리 조심스럽게 행동한 보람도 없이, 검과 드릴이 닿는 순간 요란하게 금속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애처로운 파열음, 검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내려치거나 찌른 것도 아니고 그저 가져다 댔을 뿐인데도.
머릿속에서 바크란이 경악을 토했다.
[아니, 뭐 이런 어이가 없는······도대체 굴삭기를 어떻게 개조했길래 저런 무기가 돼?] [나라고 그걸 알까.]대답하는 한편, 아르센은 부러진 검을 든 에버릭을 보았다.
에버릭은 검의 파편이 튀어 손에서 피가 흐름에도, 그저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멍하니 부러진 검을 보고 있었다.
“조부님.”
“허어······.”
에버릭은 아르센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렸다.
“대단하구나, 정말로 대단해. 인도자이자 수호자인 이만이 다룰 수 있는 창이란 이런 것인가.”
그 감탄에는 묘한 질투와 아쉬움마저 담겨 있었다. 이 창이 인도자에게만 허용된 것이라면, 에버릭은 절대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니 당연한 일.
멍하니 창을 바라보던 에버릭이 물었다.
“그 창의 이름인 이쉬트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쉬트는 먼 고대, 끊임없이 폭풍이 부는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나야 폭풍이란 것을 직접 보지 못하고 회고록에서 그런 것이 있다고만 알게 된 것이나, 그 창의 기세를 보니 폭풍이 심히 두려울 것을 알겠다. 아마 너는 바깥에서 왔으니 어떤 느낌인지 명확히 알 수 있겠지.”
아무리 봐도 드릴 달린 창에 불과한 물건을 그렇게 멋들어지게 표현하니 듣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분명 그 위력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무시무시했지만.
아르센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에버릭은 후련한 표정으로 아르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이제 올무를 물리칠 준비가 되었으니, 중대한 비밀을 말해야겠구나.”
“비밀이라고 하시면?”
“너를 여기에 불러온 이유도 이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는 혈족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아야 할 사실이니.”
노인의 진지함에, 아르센 역시 창에 불어넣은 마력을 회수한 뒤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들을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에버릭이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올무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
“네. 지저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설이 있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고······.”
“그래. 그럴 게다. 우리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지상에서 인류를 인도한 우리만이.”
올무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궁금했던 주제이기에, 아르센은 이를 제대로 듣고자 자세를 바로 고쳤다.
“이 모든 것은, 시조 라두스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다.”
라두스.
최초의 인도자이자 인류를 지하로 인도한, 말하자면 지하 인류의 시조나 다름없는 인물의 이름이었다.
이들 인도자 혈족의 시조이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지저인 중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라두스 님에게는 예리카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서 내려온 가계(家系)가 우리이니, 우리에게 있어서도 남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인물이다.”
“네.”
“라두스 님은 너도 알다시피 인도자였고, 또한 기사였다. 예리카는 마법사였지.”
아르센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법사라는 존재는 타인과 교류하기가 지극히 힘들어, 그저 보통 사람처럼 대해주기만 해도 엄청난 호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는 그가 엘로이즈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묘한 죄책감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저 계승자 혈통의 소유자로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한한 호의를 받는 기분이었기에.
“어쨌든, 그 둘은 지상의 어떤 참극을 피해 사람들을 이끌고 지하로 내려왔다. 라두스 님은 지상에서 상당한 세력가였기에 그럴 수 있었지. 그리고 지하로 내려온 그들의 앞에, 엄청난 힘을 가진 물건이 나타났다.”
“엄청난 힘이라면······?”
“인간의 피를 조작하여, 그 후손을 더 훌륭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이다.”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며, 동시에 바크란에게 물었다.
[이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 [나도 들었을 뿐이지만 아마 맞을 거 같은데. 유전자 조작기······.]유적 시대부터 시작해서 바크란의 시대까지, 고대 인류는 생명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그 수준은 실로 놀라워 발달한 과학 문명의 기억을 가진 아르센이 보기에도 초현실적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라두스 님은 자신의 자손은 물론, 다른 사람들 역시 그 혈통을 개조하여 힘겨운 지하 생활을 손쉽게 이겨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았지.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모든 지하 인류가 번성하기를 바라며.”
그 이야기만 듣자면 실로 숭고한 희생이었다. 비록 그 대가를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자손들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온전히 옹호하기는 힘든 관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리카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라두스 님의 자식이란 곧 자신의 자식일진대, 세상 누가 제 자식을 실험 대상으로 쓰고 싶을까. 사실 내가 보기에는 라두스 님이 여러모로 대단할 뿐, 예리카의 반응이 정상으로 보인다. 물론 그 뒤에 저지른 일은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지만······.”
설명하는 에버릭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결국 예리카는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했지. 라두스 님에게는 그 몸을 이용해 실험하고 있다고 거짓말하면서, 다른 주민들을 납치해서 온갖 실험을 했다. 워낙 이를 철저히 은폐한 탓에, 이 사실이 알려지는 데 이십 년이 걸렸지.”
퍽 듣기 찜찜한 이야기였다.
이들 말로 인도자, 즉 계승자이자 기사인 라두스와 마법사인 예리카의 조합은 아르센과 엘로이즈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탓이다.
“지하로 내려오고 수십 년, 라두스 님은 나이를 먹고 있음에도 점점 건강이 호전되기 시작했고 태어나는 자식들 역시 부작용 따위 없이 누가 봐도 아름답고 빼어났다. 좋은 일이지만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어. 라두스 님은 점점 예리카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했지.”
“그것만으로 말입니까?”
“비록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이긴 하지만, 온갖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알려진 물건을 사용하는데도 전혀 부작용을 겪지 않고 있었으니까.”
에버릭의 말에 아르센은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
“실험을 통해 얻어낸 자료를 이용해서, 안전한 요소만을 적용한 모양이군요.”
“아마 그런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지.”
그러는 와중에도, 에버릭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걸레를 들고 쇳가루가 뿌려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아르센이 나서서 닦겠다고 했으나 노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걸레질 소리와 함께 설명이 이어졌다.
“결국 진실이 밝혀졌다. 이십 년간, 예리카가 백 명이 넘는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희생시켰으며 그들에게서 뽑아낸 유의미한 결과만을 라두스 님에게 부여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크게 상심한 라두스 님은 어떻게든 예리카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내전이 일어났지. 예리카를 따르는 이들은 의외로 많았다. 제 혈통을 강력하게 하고 싶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버린 이들이 많았지.”
다소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사실 그 유전자 조작기의 주인인 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혈통을 개조하려고 시도한 라두스부터가 인간의 가치를 포기한 인물이 아니던가.
이를 듣던 바크란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무슨 싸구려 영상극 내용 같네.] [조용히 해.]타박한 뒤, 아르센은 눈을 똑바로 뜨고 에버릭을 응시했다.
이제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가는 듯했기에.
“전쟁은 라두스 님을 따르는 이들의 승리로 끝났으나, 피해는 컸다. 예리카는 패배자들을 이끌고 저 앞쪽,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변방으로 도망쳤지. 그리고 수십 년 후······인간과 닮은, 하지만 훨씬 더 강력하고 기괴한 족속들이 앞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을 올무라 부르기로 했지.”
그 설명만으로도 올무의 기원을 짐작하기는 충분했다.
전쟁에서 진 에리카는 제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저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깊은 어둠 속에 숨으며 이를 갈았을 것이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이를 몰라 주고 배신한 남편과, 배은망덕한 남편의 추종자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이에 맞설 군대를 만들고자 함께 따라온 추종자들의 유전자를 개조하고 뒤틀어, 지하에서라면 인간을 압도할 수 있을 강력한 군대를 꾸리려 했으리라.
“이는 우리가 올무를 두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 역시 예리카의 자손이기도 하기에, 그녀의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니.”
“지상에서 지원군을 불러온 적은 없습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에버릭이 흐릿하게 웃었다.
“이미 그런 적이 있다. 오래전, 한 인도자가 지상에서 군대를 끌고 왔지. 지하 세계 전체를 제 영지로 삼고 싶었던 세력가를 구워삶은 결과라고 했던가, 어쨌든 열 명인 넘는 수호자와 백여 명의 전사들이 우리를 돕고자 들어왔다.”
아마 그 규모로 보아, 그 인도자가 설득했다는 세력가는 지상의 영주인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열 명이 넘는 기사를 부리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하지만 그들은 이곳 지하 세계에서의 전투에 능숙하지 않았고, 오만하여 인도자의 말을 따르지도 않았지. 오합지졸이 내분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전쟁은 참패했다. 마법사가 거의 없었던 것이 패인이기도 했고. 이 전쟁의 패배로 사정은 더 나빠졌다. 그나마 올무와 대립하며 큰 세력을 이루고 있던 인간들은 지금처럼 숨어 사는 처지가 됐지.”
이쯤 되면 외부인들이 도와준다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마 다른 지저인들에게는 이에 관한 기록이 명확하게 남지 않은 탓이리라.
“결론은 하나다. 올무는 우리가 감내해야 할 죄업이며 또한 박멸해야 할 적이라는 것이지.”
단호하게 선언한 에버릭은, 아르센을 돌아보며 조금 힘 빠진 어조로 덧붙였다.
“물론 지상에서 나고 자란 네게 우리 혈족의 업을 지우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이나, 어차피 너 또한 올무들을 물리쳐야 할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거기다 네가 가진 많은 재능과 재주 역시 우리 혈족으로 태어난 덕에 얻은 것이니 그 의무 역시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아르센은 개인적으로 부모나 조상의 죄업을 대속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으나, 이를 내색하지 않고 동의를 표했다.
에버릭의 말처럼 어차피 올무를 물리쳐야 하는 만큼 굳이 감정 상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에버릭은 아르센이 그를 본 이래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부디 저 창이 올무들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무척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르센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