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6)
15화 – 마인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로군.”
팔라토가 나지막이 말하며 시커먼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동굴 주변에는 원정대의 습격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은 경계병 몇 명이 쓰러져 있었다.
말이 경계병이지 사실상 입구에 선 채 서로 시시덕대며 농담을 주고받던 모양새라,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공격받아 동굴 안으로 신호가 전달되는 낌새는 없었다.
동굴은 입구가 굉장히 커서 사람은 물론, 제법 큰 마수조차 들어갈 수 있을 듯 했다.
“동굴 입구가 생각보다 크네요.”
“정보에 따르면 적 중에는 마인까지 있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겠지. 보통 마인은 덩치가 크니까.”
동굴 앞의 공터는 원정대가 전투 진형을 갖추기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우선 종자와 병사가 타는 도마뱀은 이런 제한된 지역에서의 전투에선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기에, 이들은 도마뱀을 나무에 묶어 고정한 뒤 보병으로 변신했다.
아르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후 근처의 나무와 가시덤불을 자르고 꺾어내어 말뚝과 함정을 만들었다.
동굴 안에서 뛰쳐나올 약탈자들이 나무 말뚝이나 덤불에 막혀 쉽게 모이지 못 하도록 조치하기 위함이었다.
적의 침입을 알리지 못하게 만든 덕분에 얻을 수 있는 이득이었다.
“다 됐나? 시작하지, 불을 피워라.”
“알겠습니다.”
동굴 안에 들어가서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짓이었다.
기사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가장 큰 힘 중 하나인 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며, 상대에게 익숙하며 준비된 전장에서 싸워야 하는 셈이니까.
많은 경험을 통해 역전의 전사들은 약탈자 소굴을 소탕하는 여러 방법을 터득했다.
연기를 피워서 적들을 동굴 밖으로 꺼내는 방법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병사 한 명이 불을 붙이는 데 쓰는 마수의 뼈를 들어 칼로 긁어냈다.
마치 파이어스틸(Firesteel)을 긁은 것처럼, 뼈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튄 불똥은 밑에 깔아둔 나뭇잎과 마른 가지에 옮겨붙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닥불에서는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라 동굴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가 감돌고 얼마나 지났을까, 제노비아가 외쳤다.
“옵니다!”
그와 함께 콜록거리는 소리를 내며 동굴 안에서 일제히 사람들, 정확히는 약탈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도 더러운 모습에 온몸에 연기 검댕을 뒤집어쓴 탓인지 새카맣기 그지없었다.
어두운 동굴 속, 갑자기 역한 냄새와 숨쉬기 괴로워지는 뜨거운 공기 탓에 뛰쳐나온 이들은 차가운 바깥 공기를 폐로 빨아들이며 희열에 취했다.
공기만을 받아들여야 할 그들의 폐가 날카로운 쇳덩이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커헉!”
“적이다! 적!”
“영지 놈들이 쳐들어왔다!”
몇몇이 창에 꿰이고 칼에 찔려가는 와중에도 소리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탈자들이 동굴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연기가 들어찬 동굴 안은 이미 괴롭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들은 밖에 적이 있건 말건 당장의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였다.
뛰쳐나오는 압력에 밀려, 수십 명의 약탈자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뒤에선 계속 밀어대는 동료들이 있고 앞에는 날카로운 말뚝과 가시덤불에 막힌 상태에서 종자들이 일제히 창을 찔러대니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상황이 순조롭게 가고 있네요.”
“이대로 끝날 리가 없지. 준비하시게. 아마 곧 나올 테니.”
동굴 안에서 쿵, 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갈수록 묵직한 울림이 가까워질수록 원정대 역시 진짜 적이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한 병사는 긴장감 탓인지 손에 가득 찬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아냈다.
“어떤 개 같은 새끼들이냐아아아아-!”
동굴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의 3m에 가까운 체격의 거인이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손가락만 한 손톱이 각각 다섯 개씩 달린 네 개의 팔, 부패한 것처럼 질척거리는 가죽, 얼굴은 크고 뒤틀리고 일그러졌다는 점만 빼면 여우에 가까웠다.
거대한 몸집과 팔에 비해 다리는 짧고 굵었다.
약탈자 역시 몇 가지 특징을 제외하면 인간이기에, 그들 역시 단련을 통해 육체에 마력을 머금어 강해질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약탈자가 기사로 각성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외관상으로는 마수와 같은 특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일반 약탈자들과 달리 각성한 약탈자는 신체 자체가 마수처럼 변이되었다.
그렇기에 완전히 마수화된 인간, 마인이라 불렸다.
“모두 물러서라!”
팔라토의 명령에 따라 종자들과 병사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와 함께 여우 마인이 네 개의 팔을 휘둘러 말뚝과 덤불 함정을 간단히 날려버렸다.
병사 몇 명이 날아오는 말뚝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우리가 상대한다! 종자들은 계속해서 나오는 잔챙이들을 막아라!”
드디어 함정에서 뛰쳐나온 나머지 약탈자들의 잔당이 종자들과 무기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의 피해가 커질 것이 분명했기에 기사들의 행동은 신속했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포위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마인이 외모에 맞지 않게 높고 새된 목소리로 분노를 표했다.
“벌레 같은 영지인 새끼들이 감히!”
마인의 네 개의 팔이 두 개는 팔라토를, 다른 두 개는 각각 엔티르와 제노비아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일견 짧아보였던 팔은 마치 고무처럼 늘어나며 날아들었기에 기사들은 기겁하며 몸을 튕겨 마수의 공격반경에서 벗어났다.
다리는 짧고 굵어 그다지 날렵해 보이지 않지만,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네 개의 팔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였다.
“팔라토 경!”
엔티르의 고함과 동시에 팔라토의 주특기인 투창 공격이 마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마수는 일격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이 흉맹한 공격은, 뜻밖에도 점액질 섞인 마인의 가죽을 얼마 뚫지 못하고 막히고 말았다.
투창 자체가 박히긴 했지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을 확인한 팔라토는 바로 칼을 뽑아 들었다.
“투창은 안 먹힌다!”
마인이 자신에게 창을 던진 팔라토에게 발끈해 몸을 돌린 순간, 이를 정확히 간파한 제노비아가 반대편에서 창날로 옆구리를 베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베는 공격을 해야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제노비아의 말에 엔티르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진을 움직였다.
그의 거대한 도끼는 현재 상황에서 마인에게 가장 유용한 무기 중 하나였기에, 그가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엔티르는 이런 상황을 가장 좋아했다.
모두가 자신을 빛내는 장식에 불과하게 되는 그 순간을.
“어디 받아 보아라-!”
희열에 찬 고함과 함께 돌진한 엔티르의 도끼가 바람을 찢으며 휘둘러졌다.
빈틈을 드러내며 돌진하는 엔티르를 향해 날아드는 칼날 공격은 팔라토의 칼과 제노비아의 창이 가로막았다.
얼마 박히지 못한 팔라토의 투창과 달리, 이번에 내려찍은 도끼 공격은 확실하게 파고들어 갔다.
도끼가 뽑혀 나간 가슴 부분에서 검고 끈적거리는 피가 튀어 올랐다.
■■■■■—-!
사람이 낼 수 없는, 마수에게나 어울릴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한 마인이 엔티르의 목을 잘라내고자 손톱을 휘둘렀다.
제법 능숙하게 진을 몰아 공격을 피한 엔티르가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둘러 마인의 왼팔을 반쯤 잘라냈다.
비명을 지른 마인은 네 개의 팔을 어린아이가 투정하는 듯한 모양새로 휘두르며 주춤거렸다.
그렇게 밀리고 밀린 마인은 커다란 나무 하나를 지나 절벽을 방패 삼아 다시 섰지만, 한눈에 봐도 기운을 잃은 모습이 역력했다.
팔과 배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검은 피는 자만심을 부추겼다.
엔티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이죽거렸다.
“하! 이제야 죽을 거 같으니 겁이 나느냐? 겁쟁이 자식!”
“…숫자만 믿고 덤비는 주제에 누구보고 겁쟁이라는 거냐?”
마인이 어이없다는 어조로 엔티르를 비난했지만, 엔티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웃었다.
어차피 동료 기사들은 사소한 도움을 주기만 했을 뿐 치명타는 그가 먹인 것이 아니던가.
엔티르의 해맑은 뇌 속에서 이 승부는 정정당당한 일대일 결투였으며,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위기에 몰린 상대를 조롱할 겸, 엔티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인이 지나갔던 나무를 지나쳤다.
“어디 무릎이라도 한 번 꿇어 보거라, 그러면 특별히 살려…”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엔티르의 가슴 한복판에서 갑자기 검이 자라났다.
제노비아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눈이 좋은 팔라토와,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엔티르는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벨루안의 기사들이 무기를 만들 때 애용하는 검푸른 금속 재질, 굵고 넓은 날의 대검.
엔티르는 이 검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한때 그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겼던 검이기에.
‘레녹.’
그 한 마디를 입속으로 되뇌며, 엔티르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저건…”
엔티르와 그의 진이 힘을 잃고 쓰러지자, 나무에서 껍질이 일어나듯이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듯한 큰 눈에 크고 긴 꼬리를 했다는 점 외에는 인간과 제법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온몸이 나무의 색과 질감을 그대로 따온 듯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마인이 두 명이었군.”
나무뱀이라 불리는 마수가 있다.
피부의 색과 질감이 나무와 비슷해 나무 사이에 나뭇가지처럼 붙어있다가 적을 공격하는 특성을 지닌 마수.
그 형질을 계승한 마인의 은신술 역시 은밀하기 짝이 없어, 엔티르는 적을 바로 등 뒤에 둔 채 지나치면서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너 이 새끼, 내가 당할 때까지 안 나오는 줄 알았다?”
“에이, 형님이 이해해 주셔야지. 한 방에 못 죽이면 위험하잖아.”
여우 마인이 동굴에서 튀어나올 때, 은근슬쩍 뒤에 있던 약탈자들과 섞여나와 나무에 숨은 뒤 적을 유도해 기습하는 작전.
이것을 위해 여우 마인이 혼자 공격을 받아내며 어느 정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 부상이 치명적이지 않은 데 비해 기사들은 전력의 1/3을 잃었다.
어느 쪽이 이득을 보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우 마인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공평하게 2대 2로 하면 되겠군.”
* * *
“놈들을 막아!”
아르센은 달려오는 수십 명의 약탈자들을 보며 칼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새카만 홍수처럼 달려오는 적의 무리.
이제 제법 키가 커서 150cm 정도는 되지만, 다른 종자들보다 확연하게 작은 아르센을 노리고 두 명의 약탈자가 칼을 휘둘렀다.
둘 다 마수의 뼈를 갈아 만든 것 같은 어설픈 물건이었다.
“이 새끼!”
“뒈졋!”
심호흡과 함께 폐를 공기로 부풀린 뒤, 아르센은 왼손에 든 원형 방패를 우에서 좌로 크게 휘둘러 두 개의 칼을 모두 후려쳤다.
무식하기 짝이 없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라, 약탈자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손아귀에서 무기를 놓쳤다.
그다음, 아르센은 그대로 무방비하게 놓인 적 한 명의 얼굴을 방패로 끊어치듯이 강타했다.
문자 그대로 얼굴이 박살 나며 날아가는 모습에 주변에 있던 약탈자들이 경악하는 것이 보였다.
“으아아아아-!”
한 번의 경합으로 자신의 힘과 기량에 확신이 선 아르센은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고양감을 그대로 포효의 형태로 내질렀다.
그 포효 안에는 라프람을 타락시킨 이들에 대한 분노, 약한 자를 괴롭히는 가학심, 정의를 집행한다는 자부심 등,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용광로에 든 쇳물처럼 뒤섞여 있었다.
아르센의 압도적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종자들 역시 힘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 쪽엔 기사가 있다! 밀어붙여!”
“아르센 경!”
“벨루안을 위하여!”
아르센은 아직 몸도 다 자라지 않았고 기술도 부족했지만, 근력과 순발력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강했다.
일대일 싸움이라면 모를까, 이런 난전에서는 기술보다는 힘이 훨씬 큰 역할을 했다.
아르센이 오른손에 쥔 칼을 휘두르자 앞에 있던 적의 가죽 갑옷과 몸통이 동시에 갈라졌다.
사각에서 노려오는 공격은 좌우의 종자들이 막아준 덕분에, 아르센은 하이에나 떼 사이에 들어간 수사자처럼 약탈자 무리를 분쇄했다.
이런 싸움이 그렇듯 일단 한 번 기세에서 밀리면 걷잡을 수 없는 법.
약탈자들의 숫자는 종자와 병사들의 세 배가 넘었지만, 아르센에 의해 무리 자체가 반으로 갈리자 자기들이 지고 있다는 확신에 스스로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덤벼드는 적의 다리를 한 번 걷어차 정강이를 부러트린 뒤, 칼자루로 머리를 찍어 죽이자 더 이상 서 있는 약탈자는 없었다.
짧은 싸움이었지만 온 힘을 다해 싸운 아르센은 격한 피로를 느꼈다.
“하아, 하…”
‘마인은, 기사들이 해치웠나?’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던 아르센의 귀로 비극이 들려왔다.
“아르센 경, 엔티르 경이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기사님들도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