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
16화 – 승리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센은 즉시 종자들을 인솔해 기사와 마인의 전장을 향해 달렸다.
두 명의 기사는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명백히 불리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여우 마인은 가장 위협적이던 엔티르를 처리한 탓에 기세등등하게 덤벼들며 몰아치고 있었고, 나무뱀 마인은 큰 공격 사이사이의 빈틈을 커버했다.
엔티르의 시체는 저 멀리 방치되어 있었다.
기사들을 위협하는 것은 의외로 나무뱀 마인 쪽이었다.
마인치고는 전투적인 변이가 얼마 없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상대지만, 여우 마인의 공격범위 안에서 보호받으며 검을 휘두르니 상대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웠다.
거기다 저 마인이 가진 검은 기사의 검, 그것도 보급품이 아니라 강력한 마법이 걸린 애병이였다. 팔라토의 투창이나 엔티르의 도끼, 제노비아의 창과 동급인 무기.
어지간한 공격 따위는 무시하고 강력한 공격조차 경감시킬 수 있는 기사들의 마법갑주조차, 저 무기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찢겨나갈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팔라토의 갑옷은 오른쪽 옆구리 부분이 갈라져 있었으며 제노비아의 투구는 뺨 부분이 우그러져 있었다.
둘 모두 여우 마인의 발톱에 스친 결과였다.
아마 마법갑주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마인의 발톱이 아니라 기사의 검에 맞았다면 팔라토는 옆구리로 내장을 쏟아냈을 것이고 제노비아는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이런, 우리 쪽 쓰레기들이 다 당한 거 같은데. 형님.”
“젠장.”
슬쩍 눈을 굴려 달려오는 적들을 보며 여우 마인은 계산했다.
적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우세한 상황에서 변수는 달갑지 않다.
사실 여우 마인의 질척거리는 피부는 불에 약했기에, 가능성은 작지만 저 중 동굴 앞에 불을 피웠던 도구를 가진 녀석이 있어 그걸 사용하기라도 하면 위험했다.
차라리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이 낫지, 상대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의외의 공격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영민하게 머리를 굴린 여우 마인이 다리가 아닌 팔을 이용해 몸을 휙 날리며 기사들과 달려오던 종자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적절하게 골짜기의 좁은 입구 부분을 틀어막은 상황이라, 아무리 진을 이용한다 해도 무시하고 돌아갈 수가 없는 지형이었다.
“내가 시간 끌어주마, 저놈들부터 다 죽여버려.”
“좋아!”
여우 마인이 기사들의 개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나무뱀 마인이 검을 들고 종자들을 향해 접근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아르센은 재빨리 대열에서 이탈해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누가 봐도 나무뱀 마인을 피해 도망치는 모양새였다.
“아르센 경!”
“도대체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종자들이 동요했지만 아르센은 설명하지 않고 달렸다.
눈앞의 마인에게 자기가 달리는 이유를 들켜서는 안 됐기에.
나무뱀 마인이 마인치고는 약하다지만 말 그대로 마인치고는 약할 뿐, 종자들 따위는 덤비는 족족 도륙당할 터.
기사이긴 해도 전투능력과 장비 모두 기준 미달인 아르센 역시 크게 다르진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승부를 뒤집을 다른 한 수가 아직 있었다.
왼쪽을 봤다가 아르센이 왜 달려갔는지 깨달은 팔라토의 수석 종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공격! 어서 공격해!”
소리를 지르며 종자들이 덤벼들자, 갑자기 도주하던 아르센에게 잠시 흥미를 느꼈던 나무뱀 마인은 검을 들어 그들을 도륙했다.
신체능력도 높은 상대가 검을 맞대면 검이, 창을 맞대면 창이 잘려나가는 무기를 쓰고 있으니 제일 용맹하게 앞섰던 종자 두 명이 순식간에 머리와 몸이 토막 나며 쓰러졌다.
조금 전 싸움에서 죽은 게 세 명, 이번에 죽은 게 세 명, 이제 남은 종자들은 고작 일곱 명이었다.
하지만 수석 종자는 그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움을 독려했다.
“싸워라!”
종자와 병사 몇 명을 도륙한 나무뱀 마인이 지휘를 내리는 수석 종자부터 죽이고자 덤벼들어 칼을 휘둘렀다.
수석 종자는 용맹하게 맞섰다.
오랜 전투경험을 통해 일격에 무기가 잘려 나가되 신체가 상하는 것을 피했지만, 뒤이은 발차기 한 방에 격한 기침을 토하며 쓰러졌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거 더럽게 시끄…”
수석 종자를 마무리 지으려던 순간 나무뱀 마인을 덮쳐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약체인 특성답게 생존 본능이 발달한 나무뱀 마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빙글 돌려 날아드는 것을 피하려 했다.
날아들던 무언가의 옆에서 길쭉한 실루엣이 하나 더 생겨나 나무뱀 마인의 몸통을 쪼개놓으려 했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서 막은 탓에 몸이 쭉 날아가긴 했지만,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뭐야!?”
나타난 것은 조금 전 혼자 옆으로 도망갔던 어린 소년이었다.
놀랍게도 소년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조금 전 그가 죽인 기사에게서 도끼를 주운 뒤 진을 타고 공격해 온 것이다!
“이런 염병, 새끼 기사일 줄은 몰랐군. 다 큰 놈들은 키로 알아보겠는데 어린놈들은 어렵단 말이지.”
분노를 짓씹듯 중얼거리는 마인의 앞에서, 아르센은 조금 전 공격으로 충격을 받은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평정을 가정했다.
얼얼한 것이 쉽게 감각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괴물 같은 새끼!’
위에서, 무거운 무기로, 가속도를 붙여서 공격한다.
냉병기 싸움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합한 공격이었는데도 손해를 보았다.
갑주나 진이 없어서 그렇지, 상대의 신체능력 자체는 제대로 된 기사 수준이었다.
‘기동성은 내가 위지만 정면으로는 못 이겨!’
진에 탑승한 감각은 굉장히 기묘했다.
마치 사람의 몸 밑에 짐승의 몸 하나가 더 생겨서 두 개의 몸을 동시에 다루는 느낌.
몇 번 팔라토가 타게 해 준 덕분에 타는 법 자체를 익히고는 있었지만 이걸 타고 전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거기다 엔티르의 도끼는 지나치게 무겁고 컸다.
아르센같이 작고 가벼운 사람이 휘두르면 완력과 상관없이 무기에 몸이 휘둘릴 정도로.
그나마 진을 타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어거지로 휘두르는 것이었다.
“왜 안 덤비냐, 꼬마야. 무섭니? 엄마가 그리워? 엄마 곁으로 보내줄까?”
마인이 비아냥거리며 도발했지만 아르센은 동요하지 않고 진을 몰아 천천히 마인의 주위를 맴돌았다.
약점을 찾는 맹수처럼, 양손에 쥔 도끼를 늘어트린 채.
“나 엄마 없다. 이 새끼야.”
아르센의 담담한 반문에 마인의 얼굴이 잠시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도 잠시, 마인의 시선이 종자들을 향해 돌아갔다.
“안 올 거면 저것들부터 먼저 죽여주마!”
마인이 몸을 돌리자 아르센은 바로 진을 몰아 마인을 향해 돌격했다.
즉시 고개를 휙 돌린 마인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르센은 애초에 그대로 들이받을 의도가 전혀 없었기에, 검의 반경에 들어가기 직전 급정지하며 검을 피했다.
다시 벌어진 둘의 거리는 처음 그대로였다.
“이…”
마인은 아르센의 의도를 이해했다.
공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할 것이며 빈틈을 보인다면 공격하겠다.
전형적인 시간 끌기 전술이지만 전형적이란 말은 곧 빈틈이 없는 정석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마트라! 나와 함께 아르센 경을 도와라! 나머지는 저쪽으로!”
옆구리를 손으로 감싼 채, 팔라토의 수석 종자가 지휘를 내렸다.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박력이었다.
그 명령에 팔라토의 종자 두 명이 아르센과 합류했고, 나머지는 두 기사를 도우러 달려갔다.
“포위해!”
종자 둘이 좌우에서 창을 겨누자 마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 이 새끼들아!”
모험을 결심한 마인이 발작하듯 검을 휘둘러 부상 탓에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수석 종자를 공격했다.
아르센은 마인의 공격과 동시에 진을 몰아 도끼를 휘둘렀다.
공격을 받아내지 못한 수석 종자의 몸이 토막 나며 반대쪽에서 찔러진 창이 마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마인은 한 손을 쭉 뻗어 아르센이 휘두르는 도끼의 날이 아닌 자루를 받아냈다.
손바닥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성공적으로 공격을 받아낸 마인은 그대로 도낏자루를 쥔 채 아르센을 내동댕이쳤다.
엄청난 힘으로 땅에 내려찍히며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아르센은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애새끼, 드디어 잡았다!”
위기의 순간이 되자 마치 전투에 집중하라는 듯, 다리의 통증이 사라지며 아르센의 정신이 명징하게 깨어났다.
아르센은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도끼 따위는 즉시 손에서 놓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마인은 아르센이 제대로 일어나기 전에 죽이고자 달려들며 검을 내리쳤다.
아주 느릿하게, 기어가는 듯한 속도로.
그 기묘한 감각에 순간 당황한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움직여 날아오는 마인의 대검을 받아내려 했다.
아르센의 몸 역시 물에 들어간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방어한 것이 무의미하게도 아르센의 검은 마인의 대검에 걸려 잘려 나갔다.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한 듯 느리게, 금속으로 된 검이 두 동강 나는 모습은 가히 초현실적이라 할 만했다.
저항을 분쇄한 대검이 아르센의 머리를 노리며 내려왔다.
몸을 움직여 피하고자 했지만, 이 느린 속도는 상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 아르센의 몸 역시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죽는다!’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는 직감이 든 순간, 아르센의 몸 어딘가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눈앞의 마인에게서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대검은 더 이상 아르센을 향해 전진하지 않고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이마 바로 앞에 들이대진 검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멈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르센은 즉시 토막 난 검을 휘둘렀다.
마인의 목이 맥없이 잘려 나갔다.
“…아!”
목이 붕 떠서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보고서야 시간이 올바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는 느낌과 함께 긴장이 확 풀리며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더 버티고 서기 힘들어져 아르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겼다!”
살아남은 종자 한 명의 외침을 듣고서도 아르센은 승리를 실감할 수 없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난적이었던데다 승리의 과정조차 모호해, 그냥 어쩌다 상대가 알아서 쓰러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 몸속에서 난 소리를 확인하고자 몸을 더듬으니 허리에 찬 주머니에 파편 같은 것이 만져졌다.
꺼내 보니 영지에서 엘로이즈에게 받았던 나무 조각상이 산산조각나 있었다.
‘설마 이게 조금 전…’
“아르센! 괜찮나!?”
멀리서 팔라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센은 달려온 팔라토의 모습을 보았다.
팔라토의 모습 역시 멀쩡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른쪽 팔은 부러졌는지 축 늘어트린데다 몸통 갑옷 어딘가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온 흔적이 보였다.
“이건 설마…혼자 잡은 건가?”
“예.”
“…대단하군,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르센 역시 감동한 듯한 팔라토의 말에 동의했다.
진을 타고 있었음에도 단 한 번의 실책으로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기 직전 검이 잠깐 멈추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었으리라.
기술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신체능력과 무기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다른 마인은…제노비아 경은, 어떻게 됐습니까?”
“끝장냈네. 불이 약점이더군. 제노비아 경은 무사하네. 아마 우리 중 제일 멀쩡하지 않나 싶어.”
아르센은 전날 제노비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역시 현실은 영화와는 달라, 사망 플래그를 꽂는다고 진짜 죽는 건 아니라고.
“왜 그러나?”
“아닙니다. 그냥…다행이라고 생각해서요.”
“자넨 아닌 거 같은데, 다리가 부러졌나? 고생이군.”
“이건…”
아르센은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하려다 팔라토가 내미는 물건을 보고 말을 삼켰다.
조금 전 마인이 들고 있던 대검이었다.
“근래 우리 영지의 기사들이 무기를 잃어버린 경우는 하나밖에 없지. 아마 자네 아버지의 검인 것 같군.”
“.”
아르센은 검을 받아 날 부분을 땅에 찍어 지팡이처럼 디디고 일어서려 했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날카로워서인지 땅속으로 푹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용도로는 쓸 수 없었다.
그 바보 같은 모습을 보던 팔라토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게, 일단 내가 옮겨주지.”
“…네.”
검을 받은 팔라토가 한 손으로 능숙하게 자신이 탄 진의 옆에 검을 묶었다.
“일단 성채로 돌아가지. 대부분이 약탈자들의 피니까 당장은 괜찮지만, 곧 마수들이 올 걸세.”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살아남은 종자 한 명의 부축을 받아 다시 엔티르의 진에 올라타 신경을 연결했다.
종자의 두 눈에는 경외와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르센 경.”
“아닙니다. 이름이…”
“마트라입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마트라. 우리가 이겼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되뇌듯 말하며, 아르센은 진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팔라토의 말대로 공터는 역겨울 정도로 진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동굴 안은 아직 연기로 가득 차 들어갈 수 없으니, 여기서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마수들과 싸울 게 아니라면 성채로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