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0)
정수에 손을 얹은 순간, 아르센은 묘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전에는 기절한 탓에 느끼지 못했던, 정수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몸 안을 차오르는 감각을 느낀 탓이었다.
마력이라고 단정하기 힘든, 그보다 더 근원에 가까운 에너지가 몸 안쪽을 채우며 구조를 변화시켰다.
근육은 더 촘촘하고 질기게, 피부는 탄력있게, 뼈는 단단하게.
이미 강력하다 믿고 있던 육체가 더더욱 성장해가는 과정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대장님?”
리노가 불안하다는 듯 부르는 소리에 아르센은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
그렇게 대답하려던 순간, 아르센은 지금 상황이 그리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슬 힘을 충분히 흡수하여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건만, 정수에서는 아직도 에너지가 넘어오고 있었다.
이는 약탈자 군주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어째서?’
분명 조금 전 싸운 마수는 강력했지만, 약탈자 군주 역시 이에 못지않았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초월적인 크기와 지성, 여러 특수 능력을 겸비한 놈은 그야말로 괴물 중의 괴물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둘의 정수에 담긴 힘은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과부하 된 마력으로 손이 저리는 것을 느끼며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크윽!”
본래 아르센이 죽인 마수는 예리카가 수명 연장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녀는 이 마수에게 생명력을 추출하는 힘을 부여한 뒤 통제하기 쉽게 부정형(不定形)으로 개조했으며, 가사 상태에 빠트린 뒤 마수를 지배하여 융합했다.
그런 뒤, 마수의 능력을 이용해 수만 명이 넘는 인간의 생명력을 갈취해 생명을 이어왔다.
마수를 깨운 후 예리카가 미친 듯이 분노했던 이유는, 한 번 깨어난 마수를 다시 잠재울 수 없으며 다시 그것을 만들어낼 방도도 없기에, 마수가 깨어난 시점에서 예리카의 거짓 영생이 사실상 끝장난 셈이었던 탓이다.
즉, 이 정수는 죽은 인간들이 남긴 잔여물, 극소량의 마력이 모여 만들어진 결정체였다.
생명력은 예리카의 수명 연장에 쓰였으나 미처 쓰이지 않은 미량의 마력이 쌓이고 쌓여 수만 명 분량이 되었고, 그 힘은 강대한 군주의 정수마저 아득히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이를 인간 한 명이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크으윽······!”
아르센이 얼굴을 찌푸리고 신음을 흘리자 모두가 걱정하며 그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대장님!”
“어, 어떻게 하지? 강제로 떨어트려야 하나?”
“그러다 큰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고통에 이를 악무는 와중에도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다른 이들과 떨어져 있으려 한발 물러선 채,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다리를 동동 구르는 모습.
그런 모습을 보자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아르센은 차분한 마음을 유지한 채 해결책을 궁리했다.
‘진정하고, 침착하게.’
정수에서 손을 뗄 수는 없었다.
힘이 전달되고 있는 탓인지, 그의 손은 마치 접착제로 붙이기라도 한 듯 정수와 착 달라붙어 있었기에.
아르센은 정수에서 흘러들어오는 힘에 정신을 집중한 뒤, 그 흐름을 역으로 뒤바꾸려 노력했다.
이제는 팔을,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격통에도 이를 악문 채 끊임없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좋아,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르센은 자신이 흐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끊임없이 밀려들며 아르센의 몸을 파괴하려던 힘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정수로 보내려 애쓰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로 완전히 흐름이 정지할 것이고, 그 틈을 노려 손을 뗀다는 것이 아르센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르센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그에게 넘어오는 힘의 흐름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차 싶어 그만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흐름이 완전히 정지하다 못해 힘이 다시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센의 몸에 소화되지 못하고 고여있던 힘의 극히 일부, 티끌처럼 작은 분량이 다시 주입된 순간,
정수가 폭발했다.
“으헉!”
“꺄악!”
“컥!”
아르센의 주위에 모여있던 바즈칼과 리노, 그리고 다른 병사들은 일제히 비명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정수에서 터져 나온 순수한 힘이 갑자기 주입되는 충격에 온몸이 마비된 것이다.
조금 뒤에 떨어져 있던 엘로이즈만이 여기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정수가 폭발한 것을 본 그녀는 황급히 다가와 아르센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냐?”
“진정해. 난 괜찮으니까. 일단 다른 사람들부터.”
잠시 후, 쓰러진 이들을 확인하던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 탄성을 터트렸다.
바로 옆에 있던 엘로이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 설마?”
“맞아.”
마법 투구를 쓴 아르센의 눈이, 기사로서 아르센이 가진 특수한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혹시 잘못 느꼈나 싶어 다시 확인해 봐도 명확했다.
병사 아홉 명이 모두 기사로 각성했다.
“정수가 각성을 유도한 건가?”
“아마도?”
아르센은 몰랐지만, 이들이 기사로 각성한 것은 아르센이 기사로 각성한 과정과 거의 동일하다 볼 수 있었다.
방대한 마력, 혹은 그와 유사한 힘에 접촉하여 그 충격으로 ‘깜짝 놀란’ 감각을 일깨우는 개념이었으니.
잠시 후, 마비가 풀렸는지 그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 이게 무슨.”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아르센은 가장 먼저 바즈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바즈칼은 아르센이 그저 일으켜주려고 한 줄 알았는지 손을 잡고 일어났으나, 그러고도 아르센이 손을 놓지 않자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
“힘 꽉 줘봐.”
바즈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르센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어차피 그의 힘으로 아르센의 손아귀를 으스러트리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기도 했다.
꾹 쥔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전 바즈칼의 힘이 체감상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중고등학생 정도는 되었다.
과거 약탈자 군주의 정수를 통째로 흡수한 아르센만큼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확실히 신체 능력의 변화가 느껴졌다.
이번에 아르센 역시 정수를 흡수해 더 강해졌음을 생각했을 때 그 성장 수준은 절대 낮지 않을 터였다.
‘보아하니 리노도 마찬가지인 거 같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둘을 보며 아르센은 빙그레 웃었다.
평상시 남들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진심 어린 웃음을.
그저 부하들이 기사가 되어 자신의 힘이 강해졌다거나 하는 타산적인 계산으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기뻐하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축하한다.”
* * *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설명한 후, 그들은 이제 검은색이 아니게 된 검은 궁전을 나섰다.
정문 앞은 꽤 시끌벅적했다. 고통에 찬 비명, 신음, 그리고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고함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중 싸움으로 인한 소리는 없었다. 올무들과의 전투는 이미 끝난 뒤였다.
“아르센 경!”
“오셨습니까!”
티막과 수장들, 그리고 라티스 장로가 아르센을 반겼다.
그들 역시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는데, 심지어 마법사이기에 후방에서 지원만 했을 라티스조차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상처의 위치로 짐작건대 화살을 맞은 모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르센은 차분히 인사를 나눈 뒤, 티막에게 질문했다.
“전투는 끝났습니까?”
“끝났소. 미친 듯이 덤벼들던 놈들이 갑자기 꿈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번쩍 차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거 아니겠소. 놈들을 쫓아 거의 괴멸시켰으니 당분간은 걱정 없을 거요.”
“그렇군요. 그런데 숫자가······.”
올무의 수도를 침공한 특공대는 그 수가 꽤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처음 침투할 때와 비교했을 때 절반 이하로 줄어든 수준.
티막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희생 없이 승리하는 전투는 드물지 않겠소. 올무의 왕을 치고 이만한 희생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오.”
그렇게 대답하던 티막은, 그제야 뒤를 따르는 아르센의 병사들을 보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니, 저들 모두 수호자가······?”
“네. 인연이 닿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센을 보며 티막은 허탈하게 웃었다.
“거 쉽게 말하는구려. 지상인은 수호자가 되기 쉽소?”
“쉽지는 않습니다만, 저들은 수호자가 되고도 남을 치열한 모험을 해온 사람들이니까요.”
물론 정수를 얻었으며, 이를 이용하는 데 있어 큰 기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는바, 아르센은 화제를 돌릴 겸 티막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눈 경은 어디 있습니까? 설마?”
“지상인 수호자 말이오? 설마 그리 용맹한 이가 죽을 리 있을까, 그 하늘을 나는 탈것으로 주변을 순찰하고 있소. 혹시 도망친 올무 놈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 확인한다면서.”
그때, 지저인 전사 한 명이 티막에게 다가와 외쳤다.
“티막 영감!”
“무슨 일이냐?”
“여기 노예로 있던 사람이 그러는데, 올무 놈들의 부화장이 있답니다!”
“뭐?”
그 말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 * *
올무의 생식 구조는 개미와 유사하다. 번식을 담당하는 극소수의 수컷과 암컷, 그리고 성별이 없는 전투 개체로 이루어진 사회.
예리카는 그중에서도 번식을 담당하는 올무 암컷을 모조리 수도 번식장에 모아 놓았다.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올무의 숫자를 직접 통제하고, 행여나 그녀의 통제를 벗어난 ‘야생 올무’ 세력이 생겨나는 것을 막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 수도가 함락당한 지금, 그 방식은 그대로 독이 되었다.
“다 죽여!”
“한놈도 살려두지 마! 배까지 싹 터트려!”
번식장에 쳐들어온 인간들은 저항할 능력이 없는 암컷 올무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창으로, 칼로, 쇠뇌로.
아르센은 죽어 나가는 올무 암컷을 보며 나르비크에서 보았던 곤충 마수를 떠올렸다.
여왕개미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로 인해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던 그 모습을.
어쩌면 예리카는 그 마수의 형질을 가져와 올무에게 주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번식 방법을 가진 마수가 하나밖에 없지는 않겠지만.
“일단 공식적으로 올무 놈들의 번식장은 이거 하나뿐이라더군. 이것만 부수고 안에 있는 놈들을 다 죽인다면 올무는 끝이오. 그대로 멸종하는 거지.”
완벽히 박멸할 수 있겠다며 티막은 유쾌하게 웃었다.
아르센은 한 종(種)을 멸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도덕적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태어난 이래 수십 년 이상을 올무에게 핍박받으며 살아온 이들에게는 무례한 생각일 테니.
“이제 본대가 문제군요. 정보대로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우리가 놈들에 관해 알고 있는 확실한 정보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르센의 말에 티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일단 우리는 올무 놈들의 수도를 본거지로 삼을 거요. 마침 놈들의 노예로 부려지던 인간들도 수천 명에 달하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적을 방어할 수 있겠지. 이곳에 있는 예비 부품을 이용해서 화살 발사기도 몇 대 더 설치할 예정이고.”
물론 화살 발사기에 장전할 화살을 만들어내는 유물은 재현할 수 없을 터였다. 그들에게는 예리카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유물을 이용해 화살을 양산한 뒤 충분히 쟁여 놓는다면 극복할 수 있는 약점이었다.
올무들이 쳐들어올 수 있는 위치에 화살 발사기를 몇 개씩만 설치한다면 수도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터였다.
올무에게는 비익조도, 폭발 투창도 없으니까.
그리고 수도를 장악한 뒤, 올무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근차근 구역을 넓히며 세력을 구축해 나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전망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티막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아르센 경은, 조만간 떠날 생각이오?”
“네. 며칠 정도는 쉬었다가 떠날 계획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센을 보며 티막은 손을 내밀었다.
이를 마주 잡자, 티막은 격정적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대는 진정으로 이 지하 세계의 구원자요, 영웅이라오. 그대가 지상에 나간 후에도 이 지하 세계에서는 계속해서 노래가 전해질 거요. 굉음의 창, 구원자 아르센의 이야기가.”
아르센은 낯부끄러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을 뻔하다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듣기에 낯부끄러울지언정 이곳 사람들에게는 멋진 이야기일 테니.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영광은 그대 같은 사람과 함께 싸울 수 있었던 우리가 영광이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면 그대의 영광에 걸맞은 보상을 마련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