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3)
아르센 일행은 수도를 지나, 미지의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미지의 공간이라고 해서 그리 특별한 일은 없었다.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올무 패잔병들이나 마수 무리, 혹은 올무보다 조금 더 크고 멍청한 아인종(亞人種) 정도였다.
이 역시 예리카의 작품으로, 정확히는 그녀가 버린 실패작들이었다.
짙은 남색 피부에 발달한 근육을 지닌 놈들은 꽤 강한 적수였다.
개체 하나하나가 기사를 위협할 정도에다 서너 마리씩 몰려다니니, 아마 올무들로서는 까다로운 적수였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일단 숫자부터 압도적인 차이가 날뿐더러, 올무와 마찬가지로 항마력이 없다시피 한 것은 물론 올무보다 훨씬 멍청하고 감각도 둔했다.
그냥 먼저 발견한 뒤 강화 석궁을 퍼부어 주고, 고통으로 절규하는 놈들에게 마법을 날려 주면 그만이었다.
사실상 지성 종족이라기보다는 마수에 가까운 수준으로 전락한 터라, 이들과 싸우는 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사냥이었다. 마수들을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쿠어억!”
“불쌍한 놈들이구만.”
얼어붙어 비명을 지르는 고릴라 비슷한 놈을 보며 바즈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도끼가 들려 있었다. 아르센이 애용하던 바람 도끼였다.
이쉬트의 창을 얻은 아르센이 마침 그 쓸모가 다한 무기를 바즈칼에게 넘긴 것이다.
전에 쓰던 대검처럼 담겨 있는 마법이 일회용도 아니고 무기로서의 품질 자체도 훨씬 좋은 터라, 바즈칼 역시 만족하며 이를 받았다.
물론 대검만 쓰던 그였기에 도끼 사용하는 법을 새로 연마하는 것이 고역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루덴의 딸 지샤란에게 접근해 제법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도끼를 사용하는 그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사이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두 사람은 묘하게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바즈칼에게도 좋은 날이 오네.] [나중에 루덴이랑 만나게 되면 재밌겠군. 만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나르비크와 벨루안 사이에 있는 평야는 정말로 건너가기 힘든, 가혹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
진을 타고 매일매일 전력 질주를 해도 2주일 가까이 걸리는 들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마땅치 않은 그 공간은 사막 이상으로 황폐했다.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숫자가 적고 진을 타고 있었으며 반쯤 목숨을 걸고 이동했기에 빠르게 건넜을 뿐, 평범하게 십수 명 이상의 무리가 건너가려면 몇 달 분량의 식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거기다 바즈칼은 모든 일이 끝나면 나르비크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고위 기사의 힘도 얻었으니 어쩌면 그곳에 있는 모든 기사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으리라. 나르비크의 영주가 된 바즈칼의 모습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났다.
‘사실 그보다 죽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리 자주,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아르센이 본 나르비크의 기사들은 전사나 싸움꾼이라기보다는 마피아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정면 승부로 안 된다면 기습하고 약을 타고 인질을 잡아 협박하는 등 별 수작을 다 부릴 족속들.
우직한 바즈칼이 힘 하나로 그런 이들을 꺾고 왕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차라리 벨루안에 와서 기사 노릇이나 하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지만, 처음 계약한 내용이 그것이었으니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일이 끝나고서 한 번 운을 띄워볼 생각이기는 했다.
[이제 바즈칼도 그냥 센을 따라가고 싶어할 거 같은데?] [글쎄, 그런다면 좋겠네. 얘기는 해 봐야지.]결국 영지에서 두 아들을 밀어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고위 기사가 된 바즈칼은 탁월한 전력이었다.
아르센은 한 명이라, 혼자서는 모든 것을 부술 수 있을지언정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바즈칼 같은 인재는 꼭 필요했다.
* * *
그렇게 몇 차례 덤벼드는 무리를 궤멸시키고 나니, 놈들은 마침내 아르센 일행을 먹이가 아닌 포식자로 인정한 것인지 습격을 멈췄다.
오히려 중앙 통로에 거주하던 무리 몇 개가 도주하여 그 흔적을 남겨 두었다.
“녀석들, 치즈도 만들어 먹나 봅니다.”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는 않던데.”
그 거주지에 남은 원시적인 문명의 흔적을 본 이들의 감상이었다.
강하지 않은 적에 식량도 물도 충분한 상황, 그러나 여정은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태양에 대한 갈망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태어난 자들이 지하에 너무 오래 갇혀 있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 해 보고 싶네.”
마룬은 하루에 몇 번씩 그렇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누가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타박할 때까지.
누군가는 마법의 빛을 종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으며 다른 이는 쉼 없이 제 피부를 벅벅 긁었다.
이유를 물으니, 햇빛을 받지 못해서인지 피부가 썩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렇게 계속 지하에 있으니 몸뚱이가 없는 나도 정신병 걸릴 거 같은데, 당연하지.]배낭 밖에 매달려 있던 바크란이 그렇게 타박했다.
이 고대인은 최근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계속 배낭에 처박혀 있었는데, 툭하면 잔인하다면서 비명을 지르며 정신 나간 것처럼 구는 탓이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바크란은 사람이 반으로 갈라지거나 내장을 쏟아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지 못하고 구역질하고는 했다.
아르센 역시 그가 전처럼 기절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간 바크란을 배낭 안에 담아 휴면 상태로 잠들어 있게 하고 있었다.
[목적지가 남쪽에 있는 산이랬지?] [그래.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문헌(文獻)을 토대로 찾는 거라 좀 자세히 탐색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한 것처럼 높은 산이면······모르겠다. 내가 어디 여행을 다닌 적이 있어야지.]이전, 아르센은 라티스에게 한 권의 책을 받았다.
별부르미가 필사해 가지고 있는, 그들이 이 마법사 조직을 만들게 된 기원이 되는 책이었다.
‘도서관’의 공사와 설계에 참여했던 한 마법사의 회고록.
설명에 의하면, 인류가 갑작스러운 재난을 맞아 멸망할 때를 대비하여 마법적, 비 마법적 지식과 이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여러 시대의 도구를 담아 띄운 것이 도서관이었다.
당연히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능 정도는, 1시대에도 있었던 기술이니 훨씬 진보한 형태로 존재하리라.
책의 끝에서, 마법사는 도서관을 부를 수 있는 호출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그려 놓았다.
남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산에 호출기가 있노라고.
[그런데 진짜 특이한 사람이더라. 옆에서 보니까 그리 옛날 사람도 아닌 거 같던데, 무슨 펜으로 글을 쓴담.]그는 바크란과 같은 2시대의 인물로, 모두가 글을 마법적으로 작성하고 기록하는 시대에 굳이 펜과 잉크를 사용해 글을 쓰는 괴짜였다.
아마 그런 덕분에 그의 기록이 현대까지 보존되어 올 수 있었으리라 짐작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단 위치로 보면 대충 바야카 군주국 근처네. 여기가 위성 기술이 좀 뛰어나기는 했지.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니까.] [첫 번째는?] [그야 우리 레만 공화국이지. 세상의 온갖 신기한 건 다 여기서 먼저 시작했거든. 흉악한 것들도 많이 만들었지만.]레만 공화국,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아마 바크란이 생전에 살고 있던 나라였던가.
자기들이 먼 옛날 세계를 통일했던 공화국의 후예라고 자칭하는, 대충 그런 나라라는 설명은 들은 적 있었다.
자기 나라에 대해 그리 평가하는 바크란의 말투는 영 신랄하여 칭찬하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애매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네 나라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군.] [원래 자기들이 위대하다고 우기는 건 정작 밖에서 보면 그렇게 추할 수가 없거든? 아, 생각해 보니 너희는 나라가 없어서 잘 모르겠구나. 나중에 나라 하나 세우면 꼭 기억해 둬.] [그렇게 하지. 지금 갈 곳은 이미 나라가 있는 모양이지만.]아르센은 잠시 라티스가 묘사했던 남부 왕국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덟 개 이상의 영지가 전이문으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여, 순식간에 백 명의 기사와 천 명의 병사를 부릴 수 있는 막강한 나라.
이 세상 어느 영지도 그처럼 강력할 수는 없으리라.
심지어 올무들의 왕국조차 이러한 기동성과 소통의 부재로 허를 찔려 멸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거인왕, 나르도크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
3미터에 달하는 키를 가진 기사이며, 아르센을 간단히 꺾었던 고위 기사, 크렌이 이길 수 없었다고 선언한 인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꽤 나이를 먹었을 것이나, 꾸준히 단련해 전성기의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면 상대하기 쉽지 않은 적일 터였다. 이렇게 강해진 아르센조차 경계해야 할 정도로.
[그래도 크렌 경에게 남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추 들은 바는 있어. 간단하게 지도도 만들었고.]아르센은 크렌에게 들은 것을 토대로, 옛날에 세계 지도를 보았던 기억을 쥐어짠 바크란의 도움을 받아 남부 왕국의 지도를 그렸다.
물론 출처가 하나같이 애매하여 그 신뢰성에 다소 의문이 가는 물건이나 이마저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여기에 라티스가 전해준 책의 그림을 참고하니 대충 그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 중 하나는, 그들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진입한 곳은 153번 통로였으며 올무의 수도를 지날 때 즈음에는 201번 통로, 현재는 349번 통로였으며 목적지는 561번 통로였다.
거기다 그들이 행군하는 속도 역시 지상에서보다 훨씬 빨랐다. 이 지하 통로에는 우회를 강요하는 산도, 힘겨운 언덕도,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없었기에.
그저 평지를 쭉 달리고 달릴 뿐이라 지상과는 이동하는 효율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다.
[아, 더럽게 머네. 나도 몸 가지고 싶다. 책도 읽고 싶고.] [대학원생이라 공부를 좋아하나 보군?] [공부 좋아한 적 없어. 다 출세해서 잘 먹고 살아 보자고 하는 짓이었지. 소설책 같은 게 보고 싶다고.]* * *
그로부터 한 달, 그들은 행군을 계속했다.
햇빛을 받지 않아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로 마주치는 모든 것을 도륙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신과도 같았다.
그렇게 전진하고 전진하며, 도륙하고 도륙한 끝에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461번 통로······이겁니다. 여기로 나가면 됩니다.”
문 옆에 쓰인 글씨를 읽으며 라티스 장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앞에 있는 통로, 아르센은 그곳에 손을 얹었다.
내심 걱정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만약 위곤 유적 때처럼 자격을 요구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문을 열어라.”
[감사합니다. 또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방문자님.]다행히, 아르센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유적은 순순히 대답하며 문을 열었고, 마침내 그들은 약 석 달 만에 지하를 나설 수 있었다.
“어둡군요. 지금은 시간상 낮일 텐데.”
“아마 여기도 입구랑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올라가다 보면 밝아지겠죠.”
과연, 나선형으로 비비 꼬인 통로가 라티스 장로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계단을 타고 나선형 통로를 올라가기를 몇 분, 슬슬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인공적이고 창백한 마법의 빛과는 다른, 마치 그 안에 따뜻함이 차오르는 듯한 햇빛이.
“밖이다아아아앗-!”
“와우!”
바즈칼과 마룬이 환호를 내지르며 가장 먼저 햇빛 아래, 지상을 향해 뛰쳐 나갔다.
밖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신중하게 움직이라는 아르센의 말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물론 괴로운 시간이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바즈칼에게는 적절한 처벌이 필요할 듯했다.
옆에 있는 라티스 장로의 얼굴을 보니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안전합니다! 아무도 없어요!”
메아리치는 바즈칼의 외침. 이를 들은 아르센은 한숨을 내쉬며 전진할 것을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
출구는 작은 봉우리 위에 있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처럼 가파른 봉우리 위에 있는, 완전히 숨겨진 장소는 아니었으나 그 높이는 절대 낮지 않았다.
덕분에 주위를 둘러보기는 좋았다.
“오, 서늘한데······거기다 바람 냄새가 좀 이상하군요. 무슨 비린내 같은 게 좀.”
아눈이 자신의 뺨을 비비며 그렇게 말했다.
슬슬 겨울이 다가오는 것인지 쌀쌀해진 날씨에, 그의 말대로 공기에서는 기묘한 비린내가 풍겼다.
이 땅 위를 가득 채운 독기의 악취로도 가려지지 않는, 소금기 섞인 비린내.
아르센은 이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구에서, 이는 흔히 바닷바람이라 불렸다.
“저기, 물이다!”
“엄청난데?”
누군가가 남쪽을 가리키며 그렇게 외치니,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저 멀리에, 그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처럼 하얗게 깔린 모래, 이 위를 덮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파도.
그리고 그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물의 세계.
엘다린 강과도 비슷하지만, 강에서는 느끼기 힘든 묘한 압박감이 존재했다.
“와······.”
북쪽에서 바다를 본 적 있는 별부르미의 마법사들은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은 듯했지만, 내륙 중의 내륙인 나르비크에서 살아온 아르센의 기사들은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를 멍하니 보고 있는 아르센이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압도되었다 여겼는지, 옆에서 라티스 장로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바다는 처음 보시는 겁니까? 아마 여기가 남쪽 바다일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이 세상의 끝이죠.”
그저 너무 오랜만에 바다를 보았기에 지구를 떠올렸을 뿐, 딱히 압도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센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실감하게 되었던 탓이다.
마침내 그들이, 세상의 끝에 도달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