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5)
발켄의 말이 암시하는 바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거인왕은 도서관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얻어내기 위해 계승자를 찾고 있었다.
이에 깜짝 놀란 감정을 숨기려는 것도 잠시, 아르센은 굳이 그런 표정 변화를 감추려고 하지 않고 순순히 드러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을 듣고 놀라지 않는 쪽이 오히려 수상해 보이지 않는가.
아눈과 바즈칼은 애초에 표정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들은 의도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놀랄 수 있었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기색에 만족했는지 발켄이 히죽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르센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를 보통 사람처럼 여긴다니, 강한 인내심을 갖춘 사람을 찾는다는 건가?”
“아니, 아니. 말 그대로 참을 필요도 없는 사람을 찾는단 말이지. 마법사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말이야.”
“들어서는 영 상상이 안 가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나?”
아르센이 태연하게 능청을 떨자, 옆에서 바즈칼과 아눈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글쎄, 일단 나는 이번 명령 이전까지는 들어본 적 없어. 왕국에서는 그런 자를 찾으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내리겠다고 온 사방에 공문을 보냈지만 말이야. 하여튼 그놈의 왕국은 도대체 그게 뭐라고 이 난리인지.”
투덜대는 발켄의 말을 들으며 아르센은 지나가듯, 은근히 질문을 던졌다.
“마치 본인은 왕국 소속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그야 뭐, 사실 내가 왕국에 속해 있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어서.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여기는 왕국 관리라는 사람들이 몇 년에 한 번쯤이나 찾아올까 말까 하는데 무슨 소속감을 느낄까.”
아르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실감했다. 독기가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 한, 이 세계에 국가라는 개념이 정착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하기야, 그가 있던 크라타 성채의 주민들만 해도 자기들이 벨루안 영지에 소속되어 있다는 실감이 약한 편이었다.
국가라는 관념도, 이에 관한 프로파간다도 없는 상황에서 평생 가보지도 못할 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한들 와닿을 리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영지와 성채보다도 훨씬 큰 개념, 영지 여럿을 묶은 국가라는 개념이 되어 버리면 소속감을 느끼는 쪽이 이상하게 되는 것이다.
“보상은 뭘 준다고 하지?”
“공주를 준다더군. 왕의 사위라니 탐나는 위치기는 하다만, 뭐 그런 게 정말 있어야 내주고 받을 거 아닌가.”
“하긴, 하늘의 별을 따면 세상 모든 걸 다 준다 해도, 일단 별을 딸 수 있어야겠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발켄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신나게 웃었다.
이에 맞장구치는 한편, 아르센은 조심스럽게 발켄을 부추겨가며 왕국의 내부 사정을 알아내기 시작했다.
발켄은 떠보는 족족 주절주절 떠들었다. 정치적 상황은 물론, 왕국 군대의 구성과 편제까지도.
놀라운 것은, 거인왕이 마법사를 그리 핍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본래 영주 시절에는 지나가는 마법사 집단이 수상하다고 공격을 가할 정도로 호전적이었건만,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놀라울 정도로 마법사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각 영지나 성채에서 태어난 마법사는 수도로 보내 키우게 하며, 그 대신 마법사의 부모는 물론 이를 배출한 영지나 성채에도 큰 보상을 내리기에 어린 마법사를 죽이는 영아 살해 행위가 크게 줄었다고 하던가.
수도의 마법사들은 명목상 왕의 노예지만 그 신분이 절대 낮지 않아, 어지간한 기사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왕이 직접 부리는 마법사 군대는 그 위용이 무시무시하다고 명성이 자자했다.
마치 지옥에서 온 마귀들을 묘사하는 듯한 발켄의 말을 들으며 아르센은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다.
마법사를 우대하는 통치자, 그리고 기존의 관념에 얽매여 이를 멸시하는 아랫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판박이였기에.
“그런데, 물어보는 걸 보니 친구는 수도를 안 들렀나 보군?”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에 쭉 일직선으로 내려오다 보니.”
“급하긴! 돌아가는 길에는 꼭 들러 보라고. 나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볼거리가 많다고 하니 말이야.”
아무래도 남부에 관한 것은 크렌에게 들은 이야기뿐인지라 아르센의 이야기는 드문드문 어설플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도 발켄은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역시 변경 지대의 성주인 만큼 왕국의 소식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탓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이후로도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쓸만한 결과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발켄은 아르센이 원하는 주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자신의 신변잡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데 관심이 많았기에.
그렇게 얼마나 이야기를 나눴을까, 발켄이 손부채를 부치더니 말했다.
“이제 좀 덥군. 슬슬 나가는 게 좋겠어. 물에 몸을 너무 오래 담그면 건강을 해치거든.”
“그러지.”
“아마 하인들이 먹을 것을 준비해뒀을 거야. 여행 중에 맛 좋은 음식을 먹기는 힘든 법 아닌가. 즐기시게. 친구.”
* * *
식사는 호화스러웠다.
인도나 중국의 그것처럼 자극적인 향신료 탓에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그런 만큼 음식에 많은 정성이 들어갔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눈은 이 향신료가 입에 맞지 않는지 다소 끼적대기만 했고, 아르센 역시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묵묵히 참고 먹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역시 티가 났는지, 발켄이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이를 보며 말했다.
“친구들은 식사가 별로 입에 안 맞나보군?”
“음, 여행한 지 꽤 됐는데도 향신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이런 대접을 기쁘게 받지 못해 미안하군.”
아르센이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하자 발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멀리서 온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지. 오히려 내가 배려가 부족했어. 그렇다고 자네가 사는 곳의 음식을 해주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저 친구는 잘 먹어서 다행이군.”
다행히도, 바즈칼이 여기서 활약해 주었다.
워낙 아무거나 잘 먹는 저렴한 입맛이라 그런지 바즈칼은 향신료가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음식을 흡입했다. 발켄은 그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덕분에 조금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틈을 타서, 아르센은 조심스럽게 입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성채에서 마련하기는 조금 부담스러운 식사 아닌가? 이런 걸 익숙하지 않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니 조금 미안해지는데.”
“이 정도쯤이야!. 우리 성채는 영지에서 특별히 많은 식량을 공급받으니까. 해연석이 워낙 비싼 몸이라서.”
이어지는 설명에 의하면, 이 성채의 특산물인 해연석은 무려 거인왕에게 직접 진상되는 특산물 중 하나였다.
이름 그대로 바닷가에서 채취되는 돌로, 가루 내어 불을 붙이면 신묘한 은빛 연기가 나는데 담배 파이프를 이용해 이 연기를 흡입하면 무병장수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내심 설명하는 모양새가 약장수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르센은 이를 내색하지 않고 정중히 맞장구쳤다.
“효능은 확실한가 보군.”
“물론. 이곳 성주를 맡았던 이들은 사고로 안 죽으면 백 살까지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껄껄 웃던 발켄은 자기 역시 해연석을 자주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젊어서부터 쓰면 더 효능이 좋을 거라고 하던가.
아르센은 내심 거인왕에게 진상될 해연석에 독을 타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가 지웠다. 언제 가지러 와서 사용할지 기약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무의미한 피해자를 생산할 가능성만 더 높았기에.
어쨌든, 덕분에 유용한 정보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거인왕은 나이에 비해 육체적으로 그리 노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식사를 마친 뒤, 아르센은 바즈칼, 아눈과 같은 방에 숙박하기로 했다.
발켄은 개인실을 주겠노라고 제안했으나 아르센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아무리 호화스럽게 대접한다 해도 서로 떨어져 잠드는 것은 지나치게 무방비한 처사였기에.
정신만 멀쩡하다면 알몸으로 목욕하는 중에도 갑자기 쳐들어온 무장 병력을 물리치고 탈출할 자신이 있었지만, 잠든 상태에서는 어린아이의 공격조차 위험했다.
침대에 누운 채, 바즈칼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발켄이라는 친구, 좋은 사람이네요.”
“일단은 말이지.”
아르센의 얼굴이 썩 밝지 않은 것을 깨달았는지, 바즈칼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아가씨는 황야에 두고 우리끼리만 씻고 맛있는 거 먹어서 그러시는 거라면······.”
“정신 사나우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넵.”
바즈칼은 공손히 답한 뒤 아눈과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먹은 음식과 관련된 잡담을.
아르센은 이를 한 귀로 흘린 채 고민에 빠졌다.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한 가지 가설이었다. 거인왕이 도서관과 호출기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어쩌면 호출기가 있는 산은 철통같은 경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곤란한데.’
그럴 가능성을 배제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사실로 밝혀지니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힘이 모자라 돌파하고 도서관을 부르는 데 실패한다면, 그 뒤로는 왕국 전체와 싸워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아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나.’
발켄에게서 들은 정보 중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었다.
그것은 왕국이 예상보다 훨씬 더 단합되지 않은, 말 그대로 봉건제 국가에 가까운 정치 체제라는 것이었다.
현재 남부 왕국에 속한 영지는 무려 열세 개로, 그중 상당수는 해당 영지에서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한 혈통의 후예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인왕 나르도크를 가장 강한 영주로 여기며 존중할지언정 복종하지는 않았다.
즉, 왕은 남부 왕국의 열다섯 개 영지의 힘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
이는 크렌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정보로, 아무래도 크렌 본인이 정치적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천생 무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라티스가 했던 걱정, 들키는 순간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이 떼로 몰려들 것이라는 걱정은 과한 것이었다.
거인왕이 직접 부리는 것은 영지 두어 개 수준의 기사, 그리고 수십 명의 마법사 군대 정도로 가정하는 것이 편하리라.
이 정도라면 여전히 막강한 상대이기는 해도 아예 상대 못 할 절망적인 차이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이는 즉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에 한정된 것이고, 휘하 영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릴 시간을 주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거인왕이 휘하 영주 한 명당 기사 다섯 명만 빌려와도 오십 명이 넘는 기사가 추가될 테니까.
병사들까지 모인다면, 라티스가 말했던 그런 악몽이 정말 현실이 될 것이다.
‘일단 방문한 보람은 있군. 덕분에 근처 지리도 좀 더 확실히 알게 됐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감이 오니······.’
막연하기만 하던 위협의 실체를 확인했으니 대책을 짜야 할 터. 아르센은 생각을 정리할 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아눈이 불침번을 서기로 했으며 바즈칼, 아르센 순으로 다시 일어나기로 약속한 뒤였다.
‘졸린데.’
푹 씻고 맛 좋은 음식을 먹은 탓인지, 눈을 감자 의식은 순식간에 저 먼 곳 어딘가로 떨어져 내려갔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 속, 바즈칼이 고로롱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다음날, 아르센은 발켄의 배웅을 받으며 성채를 나섰다.
그들은 즉시 성채 주위, 다른 일행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엘로이즈가 가장 먼저 나와서 아르센을 환영했다.
“다친 데는 없어?”
“당연하지. 만약 내가 다칠 정도로 싸웠다면 저 성채가 이미 박살이 났을걸.”
“자랑은.”
타박하듯 말하며 배시시 웃는 엘로이즈.
아르센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왜?”
“아니, 아무것도.”
잠시 후, 아르센은 회의를 열었다.
그들이 성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이를 토대로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위한 회의였다.
“그러니까······거인왕이 이미 호출기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뒀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네. 적어도 그냥 방치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의 영토에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이 있는데, 그게 안 열린다고 그냥 버려둘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아르센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 라티스를 보며 위로하듯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마냥 나쁜 소식인 건 아닙니다.”
“어째서입니까?”
“그야, 계승자를 찾고 있다는 건 저들이 호출기를 써먹기 위해 내버려 뒀다는 뜻이니까요. 저희에게 있어 최악의 전개는 놈들이 호출기를 부숴버리는 겁니다. 그간의 모든 고생이 전부 의미 없는 헛짓거리가 되는 거죠.”
별부르미의 장로들은 상상만 해도 오싹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기야, 오직 이것만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이들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악몽일 터였다. 만약 호출기가 부서진다면 그 이후에는 계승자 백만 명을 데려온다 한들 소용이 없을 테니.
“일단 이곳 성주에게 받은 지리 정보를 이용해서 돌파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정도 숫자로 들키지 않고 가기는 쉽지 않겠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에서 목적지인 산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렇기에 이곳을 출구로 삼은 것이기도 했다.
“일단 출발하죠. 주의를 끌지 않고 움직여야 하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호출기가 있는 산까지는 몇 주일이면 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