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9)
“높군······.”
누군가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하늘이 아니라 산이었다. 하늘처럼 높게 뻗은 산.
바크란의 말에 의하면 먼 고대, 바야카 군주국의 영산(靈山)중 하나였다고 했다. 당시에는 레투라고 불렸다던가.
종교가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서, 그런데도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의미 있는 곳이었다고 했다.
종교가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은 영지마다 종교가 난립하는 이 시대에서는 얼핏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벨루안만 해도 르하라는 토속신을 섬겼으며, 다른 영지들도 비슷한 신앙이 하나쯤은 있었으니.
엘타에서는 전쟁의 신을 섬겼고, 산 너머 마나르에서는 아예 마법사를 죽여야 승천할 수 있다는 기괴한 가르침이 존재했던가?
보안을 위해 이 근처 주민들과는 접촉하지 못해 알 수 없으나, 아마 그들 역시 이 산을 신적인 무언가로 섬기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높이였다.
산허리에 구름이 걸리고 저 위로 끝도 없이 솟은 모습을 보며 어떻게 경외감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이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눈이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말했다.
“도발적이군요.”
“네?”
“나는 이렇게나 높은데, 네가 감히 올라올 수 있겠느냐고 도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눈은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압도적인 높이의 산을 보며 가장 먼저 느끼는 게 호승심이라니, 여러모로 대단했다.
감탄하는 한편 아르센은 저 북쪽, 위주 산맥을 떠올렸다. 대륙을 동과 서로 가르는 거대한 산맥을.
‘하긴, 그쪽 산맥은 이곳에 비하면 장난이겠군.’
산은 위주 산맥보다 좌우의 폭이 좁았으나 위로는 높았다. 어찌나 높은지 하늘에 닿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신들이 사는 곳, 올림포스가 저럴까.
마침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이어서인지 산 위쪽은 하얗게 눈이 얹혀 있었다. 아르센은 저 눈이 사시사철 녹지 않는 만년설인지, 아니면 여름에는 녹는 것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아눈 경은 기세도 좋으슈, 난 저기 올라간다고 하니 돌아버릴 지경인데.”
“보온 준비를 잘해야겠습니다. 계속 마법을 써서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바즈칼과 리노가 다소 압도당한 듯 맥빠진 어조로 말했다.
그 말대로, 막상 산의 압도적인 스케일을 마주하자 대부분은 다소 기가 질린 듯했다.
“모두 등산 준비는 마쳤나?”
“네!”
“라티스 장로님, 마법사들 쪽은 어떻습니까?”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기사들의 발걸음을 쫓아가기는 어렵습니다만······.”
라티스의 대답에 아르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올라가죠.”
* * *
왕의 늑대, 혹은 왕의 사냥개.
남부에는 그렇게 불리는 기사들이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그들이 누군가에게는 경외의 대상,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경멸의 대상인 탓이다.
그들은 왕의 직속 기사들로, 가장 강대한 기사인 왕에게 언제나 무예를 지도받을 수 있으며, 원한다면 대련과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심지어 왕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유물 역시 잔뜩 받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왕국의 기사들 중 이 늑대 무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는 적지 않았다.
당연히 대가는 있었다. 오직 하나, 절대적인 충성.
설령 옳지 않은 일이라도 왕이 명령했다면 수행하며, 무의미한 명령이라도 왕의 명령이라면 이행해야 했다.
그들에 대한 경멸은 여기에서 왔다. 왕의 명령에 따라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조차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기에 자진해 찾아오는 이들만큼이나 그만두는 이들도 많았다.
지금 이곳, 하늘에 닿은 산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기사 벨테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벨테.”
“음? 왜요?”
“함정이 울렸다. 뭐가 걸렸어. 가서 확인하고 덫 정비해.”
“지금 점심 먹고 있는데요.”
“하고 와서 먹어.”
“에이, 귀찮게······.”
기사 벨테는 들고 있던 빵을 마지못해 내려놓은 뒤 툴툴대며 몸을 일으켰다.
‘왕의 늑대’가 된 이후 두 번째로 맡은 임무는 실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없이 높은 산, 그 위용답게 춥고 황량한 이곳에서 침입자를 기다리며 몰려드는 마수들과 부대껴야 하는 이 임무는 번거롭고 위험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기에.
더 중요한 것은, 침입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에 보람조차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귀찮아서?”
“아뇨, 갑니다.”
윽박지르듯 말하는 상급자의 태도에 내심 발끈했지만, 상대는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라 실력 역시 그보다 한참 위였기에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벨테는 혀를 차며 병사 한 명을 불렀다.
“너, 덫 정비할 줄 알지?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진에 탑승한 뒤 마찬가지로 기승수에 탄 부하를 데리고 달리며, 벨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둘까······.’
최근 몇 년, 유난히 왕이 부하를 많이 모집하기는 했다.
약 십오 년쯤 전, 왕국이 갓 생길 무렵에는 정말 기사 중에서도 이름 높은 강자만 받았다면 지금은 기량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과장 조금 보태서 중범죄자라도 받는 수준이었다.
그랬던 것이 설마 이런 무의미한 임무 때문이었을 줄이야.
이미 입단 당시의 부푼 마음도, 환상도 와장창 깨진 상태였다. 남은 것은 피로감뿐.
차라리 부도덕한 일이 낫지,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만 죽이는 일은 질색이었다.
“어디지?”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병사는 둥그런 쟁반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주변 지형과 함정을 표시해주는 유물이었다.
험준한 지형 곳곳,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길목에 설치된 함정은 역시 마법이 깃든 것이었다.
슬슬 함정이 설치된 곳에 근접했다는 말에 벨테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보나 마나 죽거나 상처 입은 마수가 있으리라.
“살아있으면 내가 처리할테니 뒤로 물러나 있······.”
“베, 벨테 경! 사람입니다!”
“뭐?”
벨테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병사가 놀라다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조금 전 함정에 걸린 것은 사람입니다! 여기, 불이 자주색으로 들어왔다는 건······.”
그 말대로, 병사가 들고 있는 유물에는 자주색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이를 보는 벨테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 산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다른 기사나 병사가 걸렸을 가능성도 거의 없고, 그들이 걸렸다면 미리 보고했을 터.
그렇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말 침입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침입자를 잡는다면 그 공을 내세워서 좀 더 편안한 내근 쪽을 지원할 수도 있으리라.
수도에서 머물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왕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벨테는 전방을 주시하며 외쳤다.
“빨리 탐색기 돌려서 확인해! 주변에 있나?”
“네, 알겠습니······아악!”
그렇게 대답하려던 부하의 말이 끊기며 비명이 울리자, 벨테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병사는 이제 탐색 유물을 들고 있지 않았다. 두 팔이 잘려나간 탓에, 피를 분수처럼 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유령처럼 소리 없이 떠 있는 원반 하나가 있었다.
“무슨?”
벨테의 말에 대답하듯 원반이 휙 돌더니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기사의 공격을 능가하는 힘과 속도에 벨테는 경악하며 검을 들어 이를 막았다.
그러는 한편, 목걸이에 마력을 집중하며 힘껏 외쳤다.
“이런 썅! 본진, 본진 나와라! 적이다! 적은 원반······!”
그렇게 보고하려던 순간, 갑자기 가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원반을 막기도 힘든 상황이라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그 느낌이 들자마자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도저히 진에 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벨테는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뭐······.’
가슴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구멍이 생겨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 주먹도 지나갈 크기의 구멍이었다.
그것이 투창이 지나간 흔적임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슴을 뚫고 지나갔음을 깨달을 여유는 없었다.
곧장 날아든 원반이 머리를 가르며, 그의 의식을 영원히 끊었기에.
* * *
유감스럽게도, 아무 장애물 없이 순조롭게 산을 오를 수는 없었다. 등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위를 탐색하라고 보낸 정찰병이 아르센에게 이를 보고했다.
“산 곳곳에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키고 있다고?”
“네. 초소까지 세워놓았는데, 꽤 낡은 것이 어제오늘 세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턱을 쓸어내린 뒤, 아르센은 진형을 바꿀 것을 지시했다. 조금 더 길게, 뱀처럼 늘어진 진형으로 전진하도록.
탐색 주문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계속해서 숲속을 살피며 초소의 위치를 먼저 알리고 이를 교묘하게 피해 전진할 수 있었다.
정찰하는 기사 중 한 명이 함정에 걸리기 전까지는.
“마법 함정?”
“네. 다치지는 않았습니다만 순간 얼어붙어 버려서······풀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거기다가 함정 발동을 알리는 기능이 있더라고. 탐색 주문에 걸리지 않는 기능이랑 인식 저해 기능도 있고. 요즘 마법사가 만들 만한 함정이 아니야.”
엘로이즈의 설명에 아르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함정이 발동됐다면 확인하러 오겠군, 빨리 벗어나야······.”
“누가 오고 있습니다!”
“늦었군. 일단 모두 주위에 숨도록!”
잠시 후, 재빨리 근처 수풀에 숨은 일행들을 지나는 것은 기사 한 명과 병사 한 명이었다.
선두에 선 기사의 무장은 무시무시했다. 입고 있는 갑옷은 물론 무기, 장신구 몇 개까지 모두가 유물이었다.
그 탓인지, 상대는 마치 유적 도시의 성공한 기사처럼 보였다.
‘저게 예전에 빼앗았다는 별부르미의 유물인가?’
슬쩍 라티스를 쳐다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의문이 그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아르센은 가만히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그냥 지나가 준다면 최고이고, 만약 이쪽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일단 제압한 뒤 심문할 생각이었다.
“빨리 탐색기 돌려서 확인해!”
기사가 그렇게 외치자 옆에 있는 병사가 무언가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탐색기라는 이름으로 짐작건대 아마 주위에 광역 탐색을 시전하는 형태의 물건일 터, 아르센은 이를 제지하고자 즉시 나래칼을 날렸다.
유적 도시에서 가지고 나온 이 유물은 그야말로 벼락처럼 날아 순식간에 병사의 두 팔을 잘랐다.
그리고 경악하고 있는 기사와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크헉!”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며 검으로 나래칼을 막는 적의 모습, 이를 관찰하며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생각보다 실력은 별로군.’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평범한 기사 수준이었다.
갓 기사가 된 아르센의 부하들은 이길 수 있으나 바즈칼과 리노, 아눈에게는 패배할 정도.
나래칼을 조작하는 한편, 아르센은 직접 적을 제압하고자 흑사자에 매여 있던 투창을 꺼내 쥐었다.
그때, 기사가 다급한 어조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썅! 본진, 본진 나와라! 적이다! 적은 원반······!”
그 외침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상대는 본진, 즉 다른 기사들이 모인 곳에 즉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센은 다리를 맞추려던 것을 바꾸어 즉시 가슴을 노리고 투창을 날렸다.
투창기의 힘 덕에 몇 배로 빠르게 쏘아진 투창은 그야말로 대포 같은 기세로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헉······!”
상대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날아든 나래칼은 즉시 상대의 목을 쳤다.
“······들킨 것 같군.”
손을 뻗어 나래칼을 회수하며 한탄하듯 말하자, 옆에서 이를 듣던 바즈칼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원래 심문하기로 했던 거 아닙니까?”
“조금 전의 그 말, 그냥 혼자 지껄인 것일 리가 없잖아. 우리의 존재가 들통났다. 이제 최대한 빠르게 전진해야겠어.”
그렇게 읊조린 뒤, 아르센은 살아남은 병사를 가리켰다.
그는 팔이 잘린 고통으로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일단 저 녀석부터 데리고 와.”
* * *
그 시각, 산의 경비를 총괄하는 본거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신참 기사가 보낸 다급한 전언(傳言)으로는 적의 정체도, 규모도 특정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만 침입 자체는 순식간에 산 전체로 알려졌다. 본부에서 즉시 모든 초소에 연락을 보낸 덕분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각 초소 하나하나마다 수정구를 배치해두고 있었고, 이를 통해 동시에 연락할 수 있었다.
[적이라니, 진짜로 침입자가 있단 말입니까?] [숫자,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벨테는 ‘원반’이라는 말만 남겼고, 아마 지금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단 휴식 인원들까지 모두 동원해서 산 전체를 수색하고, 이상이 생기면 즉시 본부로 연락하도록.]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덧붙였다.
[적을 만난다면 벨테처럼 무의미한 말만 지껄이다 죽지 말고 확실하게 적의 정보를 전달해라. 왕에게는 내가 보고하겠다.]지시를 내리는 기사, 말락은 이 산의 경비를 총괄하는 책임자이자 왕의 늑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참으로, 왕이 아직 영주이던 시절부터 그를 따르던 충신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루바크, 벨테는 네 부하였지? 실력은 어느 정도냐?] [그냥 평범합니다만······그래도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그렇게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죽이기 힘듭니다. 저는 자신 없습니다.] [좋아, 만만한 적은 아니로군. 그렇게 보고하겠다.]해산을 명령하고 수정구를 끈 뒤, 말락은 방 안에서 또 다른 수정구를 꺼내 손을 얹었다.
왕국의 수도에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수정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