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8)
17화 – 복귀
잘 부탁드립니다
기존에 계획되어 있던 외뿔소 사냥은 취소되었다.
외뿔소는 기사 한 명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그리 잡기 어렵지 않은 마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상이 심한 상태로 사냥을 시도해도 좋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남아있는 기사 셋은 팔과 다리 중 하나가 부러졌거나 어린아이거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기에 시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루를 푹 쉰 뒤 약탈자들의 소굴로 돌아가 동굴 내부를 뒤졌지만 레녹의 갑옷은 찾을 수 없었고, 질식해 죽은 약탈자들의 시체만 잔뜩 구경할 수 있었다.
가져올 만한 물건도 꽤 있었지만, 몇 명 남지 않은 원정대로서는 손이 부족했기에 가장 귀한 것 몇 개만 챙겨서 나왔다.
이후, 원정대는 열흘 정도 성채에서 머물며 부상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진 뒤 영지로 복귀하기로 했다.
성채를 떠나 영지로 돌아가는 원정대의 행렬은 초라했다.
기사가 한 명 죽었으며 종자들은 반 이상 죽은 데다 병사도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남아있던 식량과 물, 수레와 야영 장비 중 절반 이상을 성주관 지하에 숨겨놓고 가야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그 덕분에 대열이 작아져 속도도 빨라지고 마수를 만나는 일도 줄었다는 것이다.
진을 타고 걸어가던 아르센은 돌멩이를 위로 던졌다.
돌멩이는 마치 풍선을 던진 것처럼 느리게 떠오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느려지는 것은 돌멩이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 흔들리는 나뭇잎,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돌멩이를 받으며 집중을 풀자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제노비아가 물었다.
“또 연습 중이야?”
“네. 신기하기도 하고…익숙해지려면 자주 해봐야 할 거 같아서요.”
“하긴, 나도 처음에는 여기저기 엿듣고 다닌다고 난리였으니까. 내 특기도 그런 종류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지난번에 마인이랑 싸울 때…에휴, 이런 소리 해봐야 쓸데없단 걸 아는데 아쉽네.”
여러 차례 확인하고 분석한 결과, 아르센이 각성한 특기는 사고속도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본인이 극도로 집중하는 순간, 혹은 깜짝 놀라거나 위기를 느끼는 순간 시간을 느리게 인식했다.
꽤 드문 편에 속하는, 전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종류의 특기였다.
“특기를 가지지 못한 기사들도 많잖나, 제노비아 경. 자네가 그러면 그런 이들은 뭐가 되나.”
“뭐, 그건 그렇지만요.”
점잖게 제노비아를 꾸중한 팔라토가 아르센을 향해 조곤조곤 조언했다.
“그러진 않을 거라 믿네만, 특기를 갖게 됐다고 해서 특기에 취해 단련을 소홀히 하는 우는 범하지 않도록 하게. 결국 가장 근본이 되는 건 단련된 육체와 기술이네.”
“네, 팔라토 경. 주의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르센을 보며 웃던 팔라토가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도착했군.”
언덕 아래로 갈색 땅과 곧게 뻗은 나무, 한창 추수 때의 밀밭이 저 멀리 보이는 마을까지 펼쳐져 있었다.
원정대 모두에게서 안도와 피로가 담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21일 만의 귀환이었다.
* * *
당연하지만, 벨루안 영지는 원정대의 복귀 후 발칵 뒤집혔다.
종자와 병사들이 반 이상 죽은 것도 상당한 타격이지만 영지 내에 십수 명밖에 없는 기사 중 한 명이 죽은 것은 그 이상의 손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무기와 갑옷, 진은 온전히 회수했다는 것일까.
원정대는 영주관 앞에서 해산, 아르센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영주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
꽤 오랜만에 오는 영주의 집무실은 이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과거 영주를 호위하고 있던 팔라토와 제노비아가 아르센의 옆에 서 있고, 다른 두 기사가 영주를 호위하고 있다는 점일까.
“그래…레녹 경은 목숨을 잃은 것이 거의 확실하고, 엔티르 경까지 떠났나.”
벨루안의 영주, 누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레녹이 성채를 지키지 못했으니 마인이 있으리라 예견했고, 드문 일이지만 혹시나 둘 이상일까 싶어 기사를 세 명 파견했다.
최근 기사가 파견되어야 할 문제가 꽤 있었기에, 세 명을 크라타 성채로 파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영지 안보를 담보로 한 큰 투자였다.
그런데 이런 희생이 날 줄이야.
“그래도 장비 회수에는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군. 엔티르 경의 도끼와 갑옷은 루덴 경에게 보내 녹여 주괴로 만들어놓도록 하고, 레녹 경의 대검은…기사의 장비는 영지에서 회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르센 경 본인의 전리품인데다 부친의 물건이기까지 하니 상속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아르센 경은 이만 가서 쉬게.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어. 나머지는 팔라토 경과 제노비아 경에게 자세히 듣도록 하겠네.”
그렇게 보고를 끝냄으로써 자유시간을 얻은 아르센은 목발을 짚은 채 마법사의 탑으로 갔다.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루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접니다, 아르센.”
문이 열리자 오랜만에 보는 루덴의 산적수염이 도드라졌다.
밖에 너무 오래 있어서인지 저 얼굴마저 정겹게 느껴졌다.
목발에 기대고 선 모양새를 본 루덴이 눈살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다리는 또 왜 그 꼴인가?”
“싸우다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붙는 편이죠. 서 있기 좀 불편해서 그런데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일단 들어오게.”
아르센은 아직 덜 붙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탑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가 어린 덕분일까, 아직 걸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이 정도면 다친 기간에 비해 굉장히 빠른 회복속도였다.
팔이 부러진 팔라토 경이 아직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 것과 비교하자면 더더욱.
의자에 앉는 아르센을 보며 루덴이 한숨을 쉬었다.
“엘로이즈가 이 꼴을 보면 질질 짜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먼.”
“아가씨는 여기 없습니까?”
“지하에서 마법 수련 중이네. 자네가 떠난 날 이후로 마법이고 대장장이 기술이고 아주 열심이야. 지극정성인 약혼자를 둬서 좋겠어.”
“약혼자라뇨.”
“그럼 엘로이즈랑 결혼 안 할 건가? 저 애는 자네 아니면 평생 남자랑 결혼하긴 글렀는데? 남자가 그러면 안 되지. 첩을 추가로 열 명을 둘지언정 엘로이즈는 받아주는 게 도리 아닌가.”
“그게 더 나쁜 짓 같습니다만.”
루덴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아르센은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부서진 조각상을 매만졌다.
이것에 대해서 엘로이즈에게 자세히 물어보려고 했는데 정작 루덴만 있는 탓에 난처해졌다.
루덴 몰래 주고받은 물건을 대놓고 꺼내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보다, 엘로이즈가 준 선물은 어디에 갖다 버렸나?”
“아가씨가 말했습니까?”
“말했겠나? 강력한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가지고 다니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다네. 어디다 놓고 왔냐고 하니 어물거려서 추궁했지. 얼마 안 가서 자백하더군.”
루덴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여튼, 엘로이즈 그 계집애는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나중에 남자 하나 잘못 만나 홀랑 털렸을 성격이야. 내가 중요한 거니까 꼭 가지고 다니라고 누누이 말했건만.”
“정확히 어떤 효과를 가진 물건이었던 겁니까?”
“소유자가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당할 경우 그 공격을 한 번 막아주는 마법이 걸려있네. 내 스승님이 살면서 딱 세 개 만든 물건 중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거였지.”
루덴의 말에 아르센은 난처함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지금 그걸 박살 냈다고 말해야 할 참에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는지를 들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르센은 책상 위에 부서진 조각상의 잔해를 올려놓았다.
원래 그려져 있던 파도 문양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손을 들어 잔해를 쓸어내며 루덴이 말했다.
“상당히 강력한 공격을 막았군. 기사의 일격이라도 받아냈나?”
“비슷합니다. 기사의 칼을 들고 설치던 마인이었죠.”
“운이 좋았구먼, 이게 없었으면 확실히 죽었을 테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루덴이 두 손을 부서진 조각상 위에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온 푸른 빛이 조각상에 스며들어 점점 조각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다시 조각상이 완성되나 하던 순간, 빠직 소리를 내며 완성되어가던 조각상은 두 동강이 나 다시 떨어졌다.
“젠장, 혹시나 했지만 안 되는군.”
루덴은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이 동강 난 조각상을 구석에 던져버렸다.
“복구가 안 되는 겁니까?”
“맞네. 내가 스승님보다 못한 마법사는 아니지만, 이건 실력보단 계통 문제지. 어쩌면 나중에 엘로이즈가 고쳐줄 수도 있겠군.”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 루덴이 발로 바닥을 몇 번 굴렀다.
잠시 후, 바닥에서 문이 열리며 사다리를 탄 엘로이즈가 올라왔다.
“왜 불러? 루…아르센?!”
엘로이즈는 그대로 사다리를 놓고 지하로 뛰어내린 뒤, 몸을 거꾸로 휙 돌려 먼지가 묻은 머리칼을 빠르게 털었다.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아내고 옷까지 탁탁 털고서야 다시 올라왔다.
엘로이즈가 과장되게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서 와! 마실 거라도 좀 줄까?”
“허, 내숭은. 그래,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을 서방님이 오셨으니.”
거친 투덜거림에 엘로이즈는 움찔하며 슬쩍 루덴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조각상을 넘겨준 것 때문에 생각보다 더 크게 혼쭐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엘로이즈를 잠깐 째려보던 루덴이 아르센에게 말했다.
“그럼 할 만한 얘긴 다 한 거 같으니 난 위층에서 자다 만 낮잠이나 마저 자겠네. 놀다 가게.”
덤덤히 말을 남긴 뒤, 루덴은 2층으로 쌩하니 올라가버렸다.
둘만 남자 엘로이즈는 조금 전의 쾌활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쑥스러운 듯이 슬쩍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더니 말을 걸었다.
“밖에 나간 건 어땠어? 위험하진 않았어?”
“음…위험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겠네요. 위험했어요. 피해도 컸고.”
아르센은 괜찮았다고 거짓말을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엘로이즈가 고립되어 살아간다 해도 듣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질 얘기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엘로이즈를 안심시킬 겸, 아르센은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래도 아가씨가 준 조각상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
아르센의 말에 엘로이즈는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몸을 푹 숙였다.
“왜 그러세요?”
“…응, 아냐. 아무것도.”
그리고 잠시 침묵, 어색함이 방 안을 채웠다.
“요즘 마법이랑 제련술 공부를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응. 내가 열심히 배워서 아르센이 절대 다치지 않도록 멋진 갑옷을 만들려고.”
“힘들지는 않아요?”
“괜찮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
그렇게 말하는 엘로이즈의 손은 전과 달리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정말 열심히 했구나 싶어 기특한 마음에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손바닥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엘로이즈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손, 이상하지?”
“아뇨. 자기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로 생긴 굳은살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는데요. 제 손도 곱진 않잖아요.”
“루덴이 내가 재능이 있대. 열심히만 하면 자기보다 더 나은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진짜 열심히 노력할 거야.”
“응원할게요. 아가씨가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기를.”
그 말을 들은 엘로이즈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입을 몇 번 달싹이며 망설이더니,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엘리.”
“네?”
“아, 앞으로…아가씨가 아니라 엘리라고 불러줘. 원래 친한 사이에는 애칭을 쓰는 거라고 그랬어.”
엘로이즈는 그렇게 말하며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매만졌다.
아르센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열 살짜리 여자애의 풋풋한 마음을 비웃을 의도는 없었지만, 너무 깜찍한 모습이라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웃지 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수치심에 얼굴까지 새빨개지는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한창 예민할 나이인 아가씨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 미안해요. 놀리려는 게 아니라 너무 귀여워서 잠깐 웃은 거예요. 알았어요. 엘리. 됐죠?”
“마, 말도 편하게.”
“알았어, 엘리.”
그 대답을 들은 엘로이즈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좋아, 성공했어!’라고 작게 속삭였다.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당연히 그 소리는 아르센의 귀에 충분히 들리고도 남았다.
이후로도 몇 가지 잡담을 나누며-주로 엘로이즈가 배우던 마법과 기술에 관한 잡담을 아르센이 듣는 쪽이었지만-시간을 보내던 중 저 멀리서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목발을 짚고 일어나는 모습에 깜짝 놀란 엘로이즈가 부축을 해주겠노라 우기는 것을 말리며, 아르센은 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