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86)
별부르미의 잔존 인원을 받아들인 뒤, 도서관은 다시 하늘 높이 솟아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났다.
그리고 먼저 확인한 것은, 이 도서관의 원동력이었다.
“별빛의 마력······이라.”
“옛날에는 어둠의 마력이라고도 했다더라. 사실 빛과 어둠을 나누는 게 무의미한 일이지만.”
“빛과 어둠은 무의미하다?”
“그야, 어둠의 마력이라고 딱히 사악한 힘이 깃든 마력 같은 건 아니니까. 다 쓰기 나름이지 뭐.”
엘로이즈의 설명을 들으며 아르센은 거대한 구체를, 이 도서관의 원동력이 되는 물질을 보았다.
그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각성석이라 부르는 물질을 압축한 것으로 원료는 별빛, 정확히는 별의 마력이었다.
마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 번째는 대지와 대기에서 유래하는, 마법사나 기사의 몸에 깃들며 마법 도구에 사용되는 유형의 마력. 두 번째는 저 하늘의 태양과 별에서 유래하는, 마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마력.
이 도서관은 그중 두 번째 마력을 원동력 삼아 움직였다.
“흠······.”
아르센은 각성석에 담긴 용기에 손을 뻗었다.
미끈한 유리 재질은 당장 주먹 한 방 내지르면 깨질 것 같았지만, 옆에 붙은 설명에 의하면 이 투명한 용기는 건물을 들어다 때려 넣어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이 녀석이 그 날의 범인이었단 말이지.”
아르센은 과거 어린 시절, 엉망이 되었던 축제를 떠올렸다.
당시 하늘에서 빛을 발하며 마수들을 깨워 벨루안을 침공하게 했던 그 빛의 정체가 바로 이 도서관의 각성석이었다.
정확히는, 과충전을 방지하고자 우주 공간으로 배출한 각성석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하늘을 비춘 것이다.
별부르미가 가지고 있는 각성석 역시 아마 그런 식으로 배출된 것이 지상에 유출된 것이리라.
“이 정도면 얼마나 움직일 수 있지?”
각성석이 담긴 용기를 잡고 질문하자, 도서관에 내장된 인공지능 비슷한 무언가가 대답했다.
-현재 잔량은 약 100중에서 99가 남았습니다. 475일간 대기권에서 잔류 가능합니다. 추가로 위성 내 시설을 이용하실 경우 이 시간은 짧아질 수 있습니다.-
“일단 시간은 여유롭고.”
아르센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럼 이제······사람들을 좀 모아야겠다.”
* * *
함교, 아르센은 방송을 통해 사람들을 소집했다.
별부르미의 장로 셋, 아르센을 따라온 기사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거나 내부의 지식을 탐구하다가도 아르센의 부름에 응해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아르센은 소집의 이유를 밝혔다.
“이제 행선지를 정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고 여기 떠서 머무를 수는 수는 없으니까요.”
“행선지라.”
라티스 장로가 슬쩍 동료들과 시선을 맞추더니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아르센 경을 따라갈 겁니다. 아시겠지만, 저희와 약속한 바는······.”
“물론입니다. 별부르미의 대의는 저 역시 공감하고 있으니, 일단 고향 벨루안에서 기반을 잡고 시작할 계획입니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향후의 행방에 대해 아르센은 별부르미와 어느 정도 입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그들의 목적은 마법사에 대한 혐오 의식을 없애고 이 세상을 다시 되돌리는 것으로, 이는 아르센으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가치였다.
별부르미의 입장에서도 뜻을 함께하는, 그리고 외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초월적인 기사와 그 기사가 존재하는 영지를 두고 굳이 맨땅에서 헤딩하려 들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별부르미는 아르센을 따라 벨루안에 그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러면 아눈 경은 가는 길에 엘타에서 내려드리면 될 것 같고······.”
“헤어지게 되니 섭섭하군요.”
아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엘타에 처자식도 있는 몸이었으니 당연히 돌아가야 할 터였다.
그가 타고 있는 진과 무기, 갑옷은 그간 충실하게 봉사한 대가로 그냥 넘겨주기로 했다.
“그냥 몸만 보내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원래 떠날 때 퇴직금은 넉넉히 챙겨 드려야 하는 법이죠.”
“퇴직금이요?”
그게 뭐냐는 질문에 아르센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런 뒤, 멀뚱멀뚱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바즈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바즈칼.”
“네, 형님.”
“우리 계약 기간이 5년이었던가?”
“그랬었죠.”
바즈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뒤, 아르센이 덤덤히 말했다.
“원래 계약한 기간은 많이 남았다만, 나르비크로 돌아가고 싶다면 계약 기간을 일찍 끝내주마.”
“네, 뭐, 그야······.”
어울리지 않게 고뇌에 찬 표정을 한 바즈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르센은 슬쩍 찌르듯 제의했다.
“혹시 벨루안에 갈 생각은?”
“당연히 있죠!”
그제야 바즈칼의 얼굴이 활짝 폈다.
벌떡 일어난 바즈칼이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발을 탁탁 굴렀다.
“아, 형님이 이 얘기 안 꺼내서 속이 다 타덥니다.”
“나르비크의 기사는 기사에게 고개 숙이지 않는다더니?”
“그게 대체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아르센은 일 년도 안 됐다고 타박해줄까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바즈칼이 속 편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형님이 이 바즈칼을 버리지는 않으시리라 믿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해서······.”
주절대는 모양새를 보건대, 아르센을 따라오고 싶기는 했으나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기가 겸연쩍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심리인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따라오겠다고 말했는데 아르센이 그냥 필요 없으니 나르비크로 꺼지라고 할까봐 마음 졸였다는 것 아닌가.
바즈칼이 어울리지 않게 배시시 웃으며 말을 더했다.
“거기다 저도 이제 나이도 찼으니 결혼도 해야 하는데, 그, 장인어른 될 분도 뵈어야 할 거고······.”
바즈칼이 슬쩍 시선을 돌린 곳에는 지샤란이 있었다. 일행의 약초사이자 루덴의 딸.
그녀는 바즈칼의 말에 무뚝뚝한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했다.
최근 도끼술을 배우며 둘이 친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을 줄이야.
아르센은 부하의 빠른 진도에 감탄하며 말했다.
“루덴 경이랑 한 판 붙으면 볼만하겠군.”
“거, 듣기로는 마법사라고 하던데 까짓거 장인어른의 매운 손맛 좀 보고 말죠, 뭐.”
아르센은 루덴이 엘로이즈에 버금가는 대마법사이며, 저항하지 않는 바즈칼을 매우 아프게 때리기는 충분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미리 알아봐야 무섭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래, 다행이군. 그럼 지샤란 님도 같이 벨루안으로 가실 거고······.”
“네.”
“나중에 어둔숲에도 들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이렌느는 어둔숲의 계약자로, 죽기 전에는 숲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따라서 그녀를 다시 보려거든 지샤란과 루덴이 직접 어둔숲으로 가야 했다.
어둔숲과 벨루안의 거리를 생각했을 때, 아르센이 직접 옮겨주지 않으면 두 장소를 오가기 위해 몇 달은 넘는 시간을 소요해야 할 터였다.
“감사합니다.”
지샤란의 감사 인사를 받은 뒤, 아르센은 다른 기사들을 보았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르비크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돌려보내 주마. 장비와 탈것도 모두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게 하겠다.”
“저는 영원히 대장님을 따를 겁니다!”
리노가 눈을 빛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이에 따라 정중히 고개를 숙임으로서 돌아가고 싶은 이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애초에 그들은 벨루안을, 서로 죽고 죽이는 나르비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꿈꾸며 아르센을 따른 이들이었다.
아르센은 충성을 맹세하는 부하들에게 엄숙하게 선언했다.
“모두 따라준다니 고맙다. 맹세하건대 너희들이 벨루안의 법을 존중하고 내게 충성한다면, 나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을 지키마.”
“알겠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마친 후, 아르센은 몇 가지 조작으로 거대한 홀로그램을 띄웠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현대의 지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벽한 대륙 전도.
그중에서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긴 산맥 안쪽의 작은 지역을 지목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벨루안으로 돌아간다.”
* * *
벨루안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만큼 멀지 않았다.
하늘길을 이용하는 만큼 장애물을 극복할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그들이 서쪽 끝에서 지하 통로를 타고 남동쪽으로 내려오느라 직선거리가 짧아진 덕이기도 했다.
도서관의 속도 자체도 꽤 빠른 편이었다.
덕분에 며칠 뒤 그들은 아눈의 고향, 전쟁 신을 섬기는 영지인 엘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축적이 엉망인 구식 지도와 신식 지도를 대조해가며 영지의 위치를 찾아야 했던 탓에 오래 걸린 것일 뿐, 아마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이틀이면 충분했으리라.
도서관은 보이지 않게 투명화한 채, 엘타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평야에 착륙했다.
펼쳐진 계단 위에 올라선 아눈이 아쉬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아눈 경이 찾아오기에는 벨루안이 머니까요.”
“그야 그렇죠, 찾아오신다면 정말 호화로운 대접을 준비하겠습니다.”
“기대하죠.”
도서관의 주인인 아르센에게 있어 엘타로 찾아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그렇기에 그들은 웃는 얼굴로 헤어질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웃는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이 상승하는 순간에도, 바즈칼은 열린 입구에 매달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눈 경! 또 봅시다!”
저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아눈의 모습이 보였다.
* * *
아눈을 떠나보낸 뒤, 도서관은 동쪽을 향해 날았다.
물론 도서관에 타서 이동하는 동안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저 놀고 있지는 않았다.
기사들은 공터 하나를 연무장으로 개조해 기술을 갈고 닦았고, 마법사들은 신문물을 필사적으로 흡수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물건, 유전자 조작기는 엘로이즈와 별부르미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마법사들이 모두 달라붙어 연구에 매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마법사를 특별하게 인식하는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용법에 포함된 풍부한 사례집, 그리고 아르센이라는 훌륭한 대조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발견이었다.
이를 제거할 방법과 부작용 여부 등을 면밀히 파악한 뒤, 그들은 곧장 첫 시술에 들어갔다.
조작기 앞, 바즈칼과 엘로이즈가 실랑이를 벌였다.
“아, 아가씨, 이거 정말 안전한 거 맞죠?”
“정말 안전하다니까. 애초에 부작용이 생길 여지가 아예 없어. 머리카락을 뽑았다가 건강이 나빠지는 걸 걱정하는 거랑 마찬가지야.”
“머리카락을 뽑는 건 충분히 건강에 나쁜데······.”
한때 머리가 나지 않아 고생이 많았던 만큼, 바즈칼에게는 예민한 문제였다.
이에 엘로이즈가 말을 돌렸다.
“이제 곧 루덴을 보러 가는데 만나서 얼굴 찌푸리면 되겠어?”
“아니 뭐, 그야 그렇지만.”
마법사 인식 교정의 첫 시술 대상자가 바즈칼인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대조군인 아르센과 신체적 조건이 비슷한 것이 고위 기사인 그와 리노였고, 그 둘이 제비뽑기를 해서 뽑힌 것이 바즈칼이었다.
“진짜 잠깐이면 끝나니까 빨리 들어가.”
“어, 잠, 잠깐······.”
엘로이즈는 바즈칼을 원통에 밀어 넣은 뒤 문을 잠갔다. 그녀의 옆에서는 이미 다른 마법사들이 작동시킬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아르센은 귀걸이로 슬쩍 물었다.
[진짜 부작용 없는 거 맞아? 지상에서 약탈자라도 붙잡아서 실험을······.] [안 해도 돼. 확실하다니까. 거기다 기존 정보도 저장되니까 문제가 생기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어. 물론 문제가 생길 여지 자체가 없고.]엘로이즈의 말에 아르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인 그는 이런 고등 마법 분야에는 무지하기에 딱히 뭐라 의견을 피력하기가 힘들었다.
미래 지식을 조언해주는 바크란 역시 이런 유전자 개조 같은 분야는 전혀 몰랐기에, 전적으로 마법사들의 지식에 의지해야 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이게 성공하기만 하면······정말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야.”
주변에 있는 마법사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아마 안에 있는 바즈칼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두려워서라도 당장 기계를 때려 부수며 뛰쳐나왔으리라.
물론 유전자 조작기의 설계도 역시 가지고 있으니 부서진다고 못 만들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시작!”
엘로이즈가 외침과 동시에, 마법사 한 명이 버튼을 눌렀다.
원통 안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끽 소리를 내며 문의 잠금이 풀렸다.
엘로이즈가 원통을 탕탕 두들기며 말했다.
“끝났으니까 나와.”
“엥, 벌써······?”
옆에서 보기에는 무슨 사진이라도 한 장 찍는 듯한 모양새였다.
조심스럽게 원통을 열고 나온 바즈칼은,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쩍 벌렸다.
“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주변이 이상하게 보이거나 하는 문제는?”
엘로이즈의 질문에 바즈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없슴다.”
바즈칼의 대답에 마법사들은 일제히 환호를 터트렸다.
“성공이다!”
“이제 아무나 넣고 돌리기만 하면 돼!”
“일반 기사랑 일반인 대상으로 한 설계도 해야지.”
“여기 나온 결과를 보면 별 차이 없을 거 같은데?”
설명에 의하면 이 시술은 소모하는 마력량도 쥐꼬리만 한 수준에 불과하고 일단 세팅해놓으면 그것을 돌리기만 하면 될 뿐이라서 딱히 전문성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거기다 시술을 받은 이의 후손에게도 형질이 유전될 테니, 벨루안에서 시작해 모든 사람을 개조하다 보면 마법사에 대한 혐오 인자는 금방 도태될 터였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고대와 마찬가지로, 마법사가 인간과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환호 속에서, 바즈칼은 마법사들을 유심히 보며 감탄했다.
“이야, 몇 달은 같이 지낸 사람들인데 이렇게 보니까 새롭네요. 새삼 반갑슴다, 마룬 경.”
“저도 반갑습니다, 바즈칼 경!”
두 바보 형제는 서로 주먹을 맞대며 성공을 축하했다.
본래도 꽤 친했던 그들은, 이제부터는 한 줌의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마룬과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던 것도 잠시, 바즈칼이 엘로이즈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느낀 건데, 확실히 아가씨 미모가 장난 아니시네요. 왜 형님이 아가씨를 위해 뭐든 하려고 하는지 알겠······윽.”
중얼대던 바즈칼이 작게 비명을 터트렸다. 뒤에서 지샤란이 그의 오금을 툭 찬 것이다.
흠흠, 하고 헛기침한 바즈칼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