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96)
외전
서로 죽고 죽이는 아귀들의 땅, 나르비크.
그곳에서 바즈칼은 태어났다.
“바즈칼.”
“······왜?”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지?”
“몰라, 한번 살아봐야지. 까짓거 안 되면 별수 없고.”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면 못할 게 뭐겠니.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 당당하게······.”
바즈칼은 아버지의 얼굴을 몰랐다. 사냥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바즈칼이 태어나기도 전 마수에게 물려가 죽은 탓이다.
실로 감사하게도, 홀로 남은 어머니는 뱃속의 아들을 버리지 않고 키워 주었다.
베를 짜고, 음식을 만들고, 내부 구역의 기사와 조직, 바깥사람들이 ‘귀족’이라고 비아냥거리고는 하는 이들의 허드렛일을 해가면서.
하지만 바즈칼이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 역시 죽었다.
“엄마.”
어린 바즈칼은 누운 여인을, 자신의 어머니를 흔들었으나 그런다고 다시 눈을 뜨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칼을 맞았다. 하녀 일을 하는 도중, 조직 간의 전쟁에 휩쓸린 탓이었다.
그저 배에 칼침 한 대 맞은 것뿐이었으나 상처가 덧나 죽기에는 충분했다.
유언을 남긴 뒤, 그녀는 꼬박 하루를 앓다가 죽었다.
혼자가 된 바즈칼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른들, 어머니가 살아있던 당시 무엇 하나 도와주지 않던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머니와 바즈칼의 집을,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토막 내어 가져갔다.
저항할 수는 없었다. 어른들의 굵은 팔뚝과 살의에 찬 시선을 이겨내기에 열 살이란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기에.
바즈칼은 그보다 몇 살 많은 아이들의 패거리에 끼어들어 근근이 삶을 이어갔다.
어른 사냥꾼들의 무기를 닦고, 사냥 도구를 손질하고, 집을 청소했다. 그렇게 온갖 일거리를 도맡아야만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감히 무언가를 훔치는 일 따위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바즈칼이 선량해서만은 아니었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해? 물론 잘못했지. 이 새끼야. 감히 이 형님의 저녁 식사를 노려?”
“다리를 잘라, 미르폰.”
“아니, 그러면 피가 너무 나잖아. 여기서까지 피비린내를 맡아야겠냐? 그냥 힘줄만 잘라서 버려. 알아서 죽을걸.”
이 땅의 어른들은 모두 사냥꾼이었거나 사냥꾼인 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눈썰미는 매와 같았다.
마수를 상대로 숨고 함정을 파는 이들의 시선을 어린아이들이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자식을 낳고 키우느라 은퇴했던 바즈칼의 어머니조차도 집에 덫을 놓아 도둑을 잡고는 했을 정도이니.
아이들은 집에 설치된 함정에 걸려 죽거나 병신이 되었고, 그러지 않고 붙들리기만 했을 때는 사냥꾼의 손에 의해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사냥꾼들은 어린아이에게도 자비가 없었다. 한 번 자비를 보이는 순간, 자신의 집이 득실거리는 어린 거지들의 공공재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그렇게 몇 년, 바즈칼은 지쳐갔다.
희망 없는 삶, 미래가 없는 삶은 견뎌내기 쉽지 않았다.
이대로 자라서 평범한 사냥꾼이 되고, 운이 좋으면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고, 죽고.
그저 그뿐이라는 우울한 생각이 바즈칼을 잡아먹고 있었다.
슬슬 어머니의 유언마저 잊어갈 무렵, 특별한 사건 하나가 그를 일깨웠다.
사냥꾼 구역에서 일어난 기사 간의 싸움이었다.
* * *
사건의 발단은 굉장히 하찮은 일이었다.
외부 구역으로 나갔다 오는 이와 나가는 이, 두 기사는 같은 길을 사용하다가 마주쳤고. 당연하다는 듯 상대에게 비킬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이는 곧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아마 저 바깥에서라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둘 중 하나가 어물어물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며 끝냈거나.
하지만 이곳은 사냥꾼의 구역이었고, 수많은 평민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있었다.
‘사냥꾼들이 보는 앞에서 굴복하느니 죽고 말지.’
‘아마 내가 강하게 나오면 저 새끼가 쫄아서 물러나겠지?’
공교롭게도 두 기사는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 물러나지 않고 강짜를 부리고, 윽박지르고, 마침내 진짜로 감정이 상한 둘은 무기를 뽑았다.
“이 개새끼가!”
“뒈졋!”
기사들의 싸움은 굉장했다.
그들이 쥔 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지며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를 내었고, 서로 마주칠 때는 귀가 아릴 정도의 굉음을 일으켰다.
마침내 격렬한 충돌로 인해 부러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사는 주먹다짐조차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움직였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상대를 쳤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서로의 주먹이 상대를 때릴 때마다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나중에는 기사 한 명이 상대의 발목을 잡아 이리저리 메치고 근처의 오두막집에 처박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부서진 쪽은 기사가 아니라 땅과 건물이었다.
기둥이 꺾여 무너지는 집을 보며, 집의 주인인 사냥꾼은 입을 쩍 벌린 채 소리 없이 절규했다.
나중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싸움은 기사의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실로 저열한 수준이었다.
상대의 칼에 맞을까 두려워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서로 무기를 붕붕 휘두르고, 그러다가 칼이 부러진 탓에 뒤엉켜 주먹질하고 서로를 잡아 던지는 꼴이라니.
제대로 된 기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대놓고 말해 힘센 원숭이들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술 수준이 아무리 저열하다고 한들 초인적인 힘만은 진짜였다.
건물 기둥을 부수는 완력, 움직이는 게 쉬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 그러한 공방전 와중에도 부서지지 않는 튼튼한 몸뚱이까지.
그들의 싸움이 끝난 뒤, 바즈칼은 기사라는 압도적인 초인의 존재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기사가 되겠어.’
물론 그냥 ‘되고 싶다’라고 마음먹어 기사가 되었다면 나르비크에는 기사 아닌 이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바즈칼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은 남들보다 튼튼한 몸, 그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우직함이었다.
“뭐 하냐?”
“훈련.”
“뭐 하러 그런 걸 하는데?”
“기사가 되려고 그런다.”
“돌덩이를 들어서 기사가 된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네.”
바즈칼은 늙은 사냥꾼들에게 주워들은, 몸을 단련하는 여러 비법을 수행했다.
커다란 바위를 들고, 달리고, 허리를 꺾으며 유연성을 키우는 등 온갖 괴로운 수행이 이어졌다.
또래 아이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바보들이야, 기사가 된다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될 테니까.
바즈칼은 남들보다 훨씬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가혹하게 단련하는 만큼 더 많은 음식이 필요했고,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쉬거나 노는 시간에도 일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거기다 일하고 남은 시간에는 단련에 매진했으니, 바즈칼에게 여가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십 대 소년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과였으나 바즈칼은 이를 악물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오로지 하나, 기사가 되기 위해서.
* * *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열일곱 살이 된 바즈칼은 크고 강인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또래보다 머리 반 개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크고 단단하게 근육이 붙은 팔을 지닌 바즈칼은 누가 봐도 훌륭한 사냥꾼이 될 자질이 엿보였다.
본격적으로 사냥꾼이 되고자, 바즈칼은 그간 모은 돈을 가지고 늙은 사냥꾼들을 찾아갔다.
“혼자 사냥을 한다고?”
“그렇수.”
“깊은 숲까지 들어가서?”
“그렇다니까.”
“숨지도 않고, 기습도 안 하고, 정면으로?”
“도대체 몇 번 물어보는 거요?”
“미친 새끼.”
은퇴하며 쓸모없어진 사냥 장비를 판다는, 늙은 사냥꾼은 바즈칼을 미친놈 보듯이 보았다.
나르비크의 사냥꾼들에게는 몇 가지 철칙이 있었다.
‘사냥은 여럿이 집단을 이뤄서, 정화 구역 인근의 숲에서, 공격은 상대가 이쪽을 보지 못했을 때만.’
이는 마수에 비해 철저히 약자인 사냥꾼이, 어떻게든 피해 없이 고기를 얻어내고자 만들어낸 수칙이었다.
기사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냥꾼들은 이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나르비크를 둘러싼 숲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숲에는 사냥꾼 따위 순식간에 도륙 낼 수 있는 괴물들이 득실거렸기에.
하지만 바즈칼은 그 수칙을 철저히 어기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은퇴한 사냥꾼이 뭐라고 훈계하건, 바즈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비를 받은 뒤 사냥을 나섰다.
홀로 숲으로 들어간 바즈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수와 마주칠 수 있었다.
바즈칼은 긴 칼을 앞으로 내민 채,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서서히 접근했다.
“자, 얌전히 있으렴. 착하지?”
쉬이익!
그의 첫 사냥감은 까막뱀이라는 이름의, 사람 팔뚝보다 조금 굵은 크기를 한 검은 뱀이었다.
몸통 아래에 작은 돌기가 달린 것 외에는 크게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고, 체격도 작아 위험하지 않아 보였기에 바즈칼은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실제로 어른들이 잡아 온 까막뱀을 먹은 적도 몇 번 있었기에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애송이의 돌격 따위, 포식자들의 공격에 익숙한 이 뱀에게는 하찮은 수준에 불과했다.
까막뱀은 벼락처럼 몸을 날려 바즈칼의 한쪽 팔을 문 뒤 마비독을 주입하고 도망쳤다.
어찌나 그 속도가 빠른지, 바즈칼이 고통에 팔을 흔들었을 때 까막뱀은 이미 수풀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크윽!”
바즈칼은 비명을 지르며 뱀에게 물린 팔을 걷어 올렸다.
이미 팔뚝은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 * *
집에 돌아간 뒤, 바즈칼은 며칠 내내 끙끙 앓았다.
강력한 마비 독은 바즈칼의 팔을 마비시키는 것은 물론,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끔찍한 고통, 거기에다 다시는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두려움에 바즈칼은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요양하던 와중, 바즈칼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바즈칼, 있냐?”
“뭐야?”
“뭐긴 뭐야, 다쳤다길래 병문안 왔지.”
다친 바즈칼을 찾아온 것은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또래 소년들이었다. 갓 사냥꾼이 된 애송이들.
우습게도, 그들은 인적 없는 밤에 무기를 들고 병문안을 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바즈칼이 사냥에 나갔다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뜯어먹을 게 없나 싶어 찾아온 모양이었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
“에이, 그러지 말고······.”
“꺼지라니까!”
바즈칼은 한쪽 팔을 축 늘어트린 채, 작은 칼을 들이밀며 어린 사냥꾼들을 쫓아냈다.
놈들은 바즈칼의 독기 어린 시선에 주눅이 들었는지 더 덤벼들지 않고 물러섰다.
어디 두고 보자는, 조무래기 악당 특유의 상투적인 대사를 남기며.
* * *
다행히 며칠 뒤, 팔은 멀쩡히 나았다.
돈이 없어 약도 사 먹지 못하고 동네 약초사에게도 찾아가지 못하는 형편이었기에 나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몸이 나은 바즈칼은 곧바로 다음 사냥 계획을 세웠다.
이제 와서 다른 길을 도모할 수는 없었다.
바즈칼은 열일곱 살이고, 체격은 성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크고 나면 허드렛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장성한 청년은 같은 사냥꾼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일거리를 주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고 인근의 다른 사냥꾼 패거리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미 은퇴한 사냥꾼이 소문을 퍼트린 탓에, 그들은 바즈칼 같은 정신병자를 받아들여 문제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바즈칼은 다시 혼자서 사냥을 나섰고, 처음으로 결과물을 얻었다.
“으아아아!”
사투 끝에 승리한 바즈칼은 있는 힘껏 포효했다.
그의 발밑에 쓰러진 마수, 반쯤 난자된 사냥감의 정체는 양뿔늑대였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마수.
정말로 운이 좋게도 그가 목표로 한 상대는 늙고 병들어 무리에서 버려진, 젊은 청년이 혼자 맞서기에 딱 적당한 상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바즈칼이 아무 희생 없이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목과 가슴은 발톱에 난자되어 피가 철철 흘렀으며, 다리는 물려서 뼈에 금이 가기까지 했다.
조악한 수레에 양뿔늑대를 실은 채, 절뚝대며 돌아오는 바즈칼의 모습을 보고 사냥꾼들은 수군거렸다.
“저 자식, 양뿔늑대를 혼자 잡은 건가?”
“그렇겠지. 죽은 놈을 훔쳐 온 거라면 저렇게 상처가 날 이유가 없으니까.”
“함정을 만들 도구도 없던데······.”
“저거 완전 또라이 아냐?”
함정을 파고, 단체로 기습하고, 다른 마수가 먹다 남은 잔해를 훔치는 것이 일반적인 사냥꾼의 방식인바, 마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은 사냥꾼의 상식 밖에 있는 일이었다.
그런 것은 저 안쪽, 기사를 따르는 조직원들과 같은 전업 전사들의 특권이니.
그들이 보기에 바즈칼은 이 구역에 어울리지 않는 이단아였고, 건드려서는 안 될 맹수였다.
이제 그의 또래 청년들은 물론, 나이 든 사냥꾼들도 함부로 바즈칼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되려 그가 째려보면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
몇몇 마수를 사냥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바즈칼의 주머니 사정은 훨씬 좋아졌다.
물론 죽을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으나, 단체로 사냥하고 그 수익을 나눠 먹는 다른 사냥꾼들과 달리 바즈칼은 혼자서 수익을 독식할 수 있었다.
사냥을 거듭하며 더 좋은 칼, 더 좋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지식과 경험이 쌓일수록 사냥은 더 쉬워졌다.
그렇게 몇 년, 양뿔늑대가 시시하게 여겨질 무렵 바즈칼은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진짜 강한 놈이랑 싸워야지. 더 큰 위기가 필요해. 죽지는 않을 정도로, 하지만 죽을 것 같을 정도로.’
이대로 사냥꾼들 사이에서 출세한 셈 치고 살아가기에는, 바즈칼이 품은 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기사가 된다는 꿈 하나만으로 그는 더 안쪽에서, 더 강한 적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