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98)
또각, 또각.
바크란 케도우의 아침은 누군가의 발소리로 시작됐다.
그것이 어디에서 들렸는지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저 위에서일 수도, 옆방에서일 수도, 어쩌면 아래에서 들린 것일 수도 있었다.
이 기숙사는 방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지 언제나 책을 넘기고, 목욕하고, 사랑을 나누는 소리까지 여과 없이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라도 머물러야 하는 것이 현재 바크란의 처지였다.
“아, 머리 아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힘껏 주무르며 일어난 바크란은 곧장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몇 번이고 연거푸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조금 정신이 들어, 그제야 거울을 볼 수 있었다.
둥근 눈에 둥근 얼굴,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청년의 두 눈은 피로로 팅팅 부어, 아래에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바크란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러다 진짜 뒈지겠네.”
지난밤, 바크란은 새벽까지 영언 해례본을 작성하느라 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이번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최근 몇 주일 내내 그러는 중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교수가 지시하는 업무를 처리하고 과외와 가욋일까지 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돈이 없어서였다.
바크란의 집안은 가난했다.
원래도 그리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하나뿐인 아들을 대학원에 보내기 위해 빚을 진 탓에 더더욱 가난해졌다.
심지어 그러고도 비싼 대학원 학비, 그리고 진학을 위해 교수들에게 뿌리는 뇌물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랐다. 따라서 바크란은 대학원을 다니며 직접 모자란 돈을 충당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대학원생의 부업으로는 학비와 생활비, 품위 유지비를 감당할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없었다.
‘어디서 돈 안 떨어지나.’
돈, 돈,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번 학기의 학비도 교수가 유예해줬을 뿐 아직 입금하지 못했으며, 기숙사 숙박비 역시 두 달이나 밀린 상태였다.
얼마 전, 지인의 제안으로 시도한 회심의 주식 투자가 실패한 탓이었다. 속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투자를 제안했던 지인은 전 재산을 말아먹고 건물에서 뛰어내렸으니.
어쨌든, 이대로라면 다음 학기에는 돈이 없어 퇴학당할 터였다.
‘여기서 몇 년을 버텼는데, 그 꼴을 어떻게 보냐.’
만약 대학원을 정식으로 졸업하지 못한다면, 바크란의 미래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처박힐 터였다.
안 그래도 정말 빌어먹게 추운 시대였다. 최근 몇 년, 레만 공화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한 경기 침체가 불러온 참극이었다.
거리에는 왕정주의자와 혁명을 주장하는 족속들이 유혈 투쟁을 벌였고, 취업알선소 앞은 노숙을 하느라 까슬한 뺨을 한 이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 일거리를 찾았다.
아마 대학원을 졸업하지 못한다면, 바크란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물론 암울한 미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시대에서도, 아니, 이런 시대이기에 고전 비의를 탐구하는 영언 사학자의 존재는 더욱더 귀했다.
제대로 졸업하기만 한다면 어느 박물관이나 고고학자에게 고용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 고용되기만 한다면.
‘사채라도 빌릴까.’
바크란은 잘 다려낸 까만 정장을 입은 뒤, 회중시계를 차고 윤기 나는 회색 지팡이를 든 채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영언 사학자, 그리고 그 예비라 할 수 있는 역사학도는 노동자 계급과 구분되는 중상위 계층이었고 따라서 그에 맞는 품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바크란의 주머니 사정이 어떻건 간에, 계급에 맞는 품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교수나 동기들은 그를 경멸할 터였다. 그런다면 졸업 역시 물 건너가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품위 유지는 먹고 자는 것 이상으로 중요했다.
기숙사 입구로 나오자 흐릿한 회색 안개로 뒤덮인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크란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언제 봐도 숨이 다 막히네.’
레만 공화국 뮤니크 주의 주도, 뮤니크는 공화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발전된 도시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염을 부르는 법이다.
하늘을 떠도는 잿빛 안개가 그 증거였다.
오염된 마력연(魔力烟)이 인체에 해로우니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환경주의자들에 의해 수십 년간 제기되어 왔으나, 기업가들과 정치가들의 야합으로 인해 이러한 법안이 국회 문턱을 통과하는 일은 없었다.
땅속에 무진장하게 잠든 마력을 제한하려는 것은 정치 논리에 따른 폭거에 불과하다느니, 마력연이 몸에 해로운 것은 음모론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헛소리만 주워섬길 뿐.
공기 좋은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바크란이 보기에, 그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오염된 공기를 받아들이는 이곳 도시 토박이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족속들이었다.
“여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바크란은 두둥실 떠다니던 마차(魔車)한 대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시는지?”
“뮤니크 대학으로 갑시다.”
“어이쿠, 대학생이신 모양이구먼. 이거 귀한 분을 태웠네.”
바크란의 옷차림만 봐도 신사 계급인 것이 명확히 보일 것이건만, 늙은 마부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말하며 고객의 기분을 띄워 주었다.
이에 바크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가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크란의 쪽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소음이 차창 너머로 귀를 때려서였다.
[각성하라! 일어나라!] [우리 위대한 군주를 기억하라! 그분이 돌아오시리라!] [백성들아, 타락한 공화주의에서 벗어나라!]“무슨······.”
바크란이 눈을 뜨자, 앞에서 마차를 몰던 마부가 혀를 차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저 빌어먹을 왕정주의자들이 또 시위하는 모양이오. 에잉, 그놈의 왕가가 무너진 지가 벌써 몇 년인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차가 지나가는 광장 앞, 커다란 팻말을 든 사람들이 잔뜩 모여 소리 지르고 있었다.
추레한 옷차림을 한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공화국이 세워지며 몰락한 구 귀족 계급의 후예일 터였다. 소위 ‘혁명 세력’에게 모든 부와 권력을 뺏긴 족속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을 금속으로 두른 거인들이 나타났다. 경찰에서 운용하는 진압용 전투 인형인 모양이었다.
[다 붙잡아!] [맞서 싸우십시오! 더러운 공화주의자들에게······!]전투 인형은 시위대를 진입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는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개중에 마법사도 몇 명 있었는지 마력광이 번뜩이고 마법이 날아들었지만 전투 인형에게 그런 공격이 먹힐 리 없었다.
이제 거의 전투가 벌어지다시피 하는 광장을 지나기는 무리라 판단했는지, 마부는 마차를 돌려 다른 길을 찾았다.
비교적 고요한 거리를 날며, 노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젊은 시절 혁명전쟁에 참여하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소만, 그 사실에 후회 한 점 느낀 적 없소. 나라를 살리기 위해 바친 것이었으니까. 우리 공화국을 보시오, 투표로 뽑힌 총통들이 그저 혈통으로 내려온 군주들보다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건 이미 증명된 바 아니오? 그런데 아직도 옛 향수를 잊지 못해 저러는 꼴이라니.”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노인은 한쪽 다리가 없었다.
이후로도 그는 마치 물꼬가 트인 것처럼 자신의 정치관을 줄줄 늘어놓았다. 혁명 시기에 귀족들은 모조리 목을 매달아야 했다느니, 요즘 젊은이들이 게을러서 나라 경제가 이 모양이라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를.
‘그런 소리를 해봐야 정작 지금 총통도 전 총통의 조카잖아, 전 총통은 초대 총통의 아들이고······.’
대놓고가 아닐 뿐이지 세습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그런 의견을 밝혀가며 참전용사로 보이는 노인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크란은 침묵한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차는 뮤니크 대학 앞에 도착했다.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교수가 나오라고 했던 시간은 지나 있었다. 시위대를 피해 옆으로 빙 돌아온 탓이리라.
미리 연락해두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책을 피할 수는 없을 터. 늦으면 늦을수록 질책과 경멸의 강도는 더 강해질 터였다.
바크란은 단말기를 꺼내 마차 요금을 결제한 뒤 경망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어내렸다.
“잘 탔습니다!”
“안녕히 가시구려!”
마차를 떠나보낸 뒤, 바크란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대학 건물을 가로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달리고 싶었으나 경박한 태도로 체면을 깎아 먹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대학원 구역에 들어선 바크란은 가능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날 선 시선을 마주쳐야 했다.
“바크란 케도우.”
“네, 교수님.”
“늦었군.”
“죄송합니다.”
“이번 학기 들어서 네 번째군. 갈수록 늦어. 내가 자네를 언제까지 배려해줘야 하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경고하는데, 자꾸 내가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말게. 역사학은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야. 따라서 더더욱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더 잘 알아야 하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담당 교수, 아진 레무르의 질책에 바크란은 조용히 고개 숙여 사죄를 표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변명임을 알기에 시위대를 만나 돌아왔다느니 하는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경우를 고려해서 더 빨리 나왔어야지’라는 질책이나 받고 말 것이기에.
이 교수는 자신의 담당 대학원생이 학비를 버느라 하루 세 시간만 잔다는 사실을 신경 써줄 정도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위인이 아니었다.
* * *
수업과 여러 일정을 마친 뒤, 바크란은 반쯤 시체가 되어 테이블에 널브러지듯 몸을 눕혔다. 당장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잠이 오는 마당에 체면 따위는 신경 쓸 수도 없었다.
그때, 꿈과 현실을 헤매고 있는 바크란을 향해 누군가 말을 걸었다.
맑고 고운,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케도우 선배님?”
번뜩 눈을 뜨니, 그의 앞에는 그보다 몇 살 어릴 것으로 짐작되는 아가씨가 서 있었다. 곱게 땋아 내린 연보랏빛 머리칼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상당한 미녀였다.
바크란은 재빨리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내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신지.”
“예리코 교수님이 부르셔서요.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으시냐고······.”
혹시, 하고 떠오르던 바크란의 장밋빛 꿈은 시작과 동시에 부서졌다. 바크란은 이내 허탈하게 대답했다.
“아, 네. 곧 찾아간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용무는 그것뿐이었다는 듯, 여학생은 쌩하고 바크란을 지나쳐 사라졌다.
그저 미녀가 말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펼쳐졌던 망상을 접은 뒤, 바크란은 몸을 일으켰다.
* * *
“어서 오게, 케도우 군!”
“반갑습니다, 교수님.”
예리코 교수는 뮤니크 대학 생명공학부의 담당 교수였다.
과거에는 마법 생물학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분야는 전투 인형을 비롯한 여러 인간과 비인간의 생물적 특징을 조작하는 학문이었다.
그리고 예리코 교수는 이 분야에 있어 세계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말했던 제안은 생각해 봤나?”
“아, 그거 말씀이시죠······.”
얼마 전, 예리코 교수는 바크란을 슬쩍 불러 기묘한 제안을 했다. 일종의 불법적 인체 실험 제안이었다.
본인 말로는 이미 동물 임상까지는 완전히 끝났으나, 윤리적 문제로 인체 실험 허가가 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론상 안전성은 확실하며, 그저 사소한 윤리적 문제에 발목을 잡혀 있을 뿐이라고.
“사고 이식 실험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 별거 아니야. 그냥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면 10억 란트를 벌 수 있는 거라고. 자네가 영언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제안을 받지도 못했어.”
10억 란트라면, 인체 실험의 대가로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금액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 걱정이 없는 것은 물론, 이 집값 비싼 뮤니크에서 작은 가족 하나가 거주할 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수준.
일반 노동자 계급이라면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벌 수 없을 돈이었다.
“그게, 저는······.”
하지만 그런 보수도 자기가 죽는다면 모두 헛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바크란으로서는 명성 높은 교수가 굳이 이런 불법적 실험을 하는 이유가 실험이 위험하거나 뒤가 구린 탓이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망설이는 그를, 교수는 열띤 어조로 설득하려 들었다.
“전혀 수상한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네. 이 실험이 자네에게까지 돌아온 건 그놈의 정치 논리 때문이야. 천박한 원로 교수 놈들이 자기 자리를 뺏길까 두려워 내 실험을 승인해주고 있지 않거든. 미리 말해두는데 이 기회가 평생 있는 게 아니라네. 승인만 된다면 영언 능력을 지닌 사형수라도 데려와서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이 기회라고.”
이미 예전에도 거절한 제안이었고, 이번에도 거절할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10억 란트라는 돈은 물론 거금이나, 바크란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언 사학자로 취직하기만 하면 충분히 벌 수 있는 돈이었기에.
그런 돈을 벌기 위해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실험에 자원하는 것은 바보짓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고작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크란은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비어가기만 하는 통장, 한계에 도달한 육체, 빚더미에 오른 집안,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그런 바크란에게 예리코 교수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저는······.”
바크란을 보는 교수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아무래도 그 역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바크란이 그의 제안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