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
1화 – 즐거운 노예 생활
잘 부탁드립니다
거지 같은 삶에 거지 같은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죽을 듯 피곤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일해야 하는 삶.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욕을 먹고 밤이 늦어서야 돌아와 죽은 듯 쓰러져 잠드는 일상.
미어터지는 지하철, 힘겹게 일해 번 돈을 쓸 시간조차 없는 나날, 자기 자신이 사람인지 가축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자괴감.
설마 그런 삶이 그리워질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
아르센은 더러운 헛간에서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망상했다. ‘돌아가고 싶다, 제발 날 되돌려 줘.’
차라리 야근과 잔업, 상사의 잔소리가 그리웠다.
다리 어딘가를 타고 기어가는 벌레의 감촉, 그나마 이불로 쓰고 있는 천 씌운 지푸라기가 구멍 난 천을 뚫고 피부를 쿡쿡 찔렀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십여 년을 통해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아르센-!”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에 아르센은 화들짝 놀라 발을 놀리며 달려 나갔다.
달리다가 발가락이 돌부리에 차여 피가 나도, 아픈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달렸다.
헛간 밖에서 그를 부른 것은 키가 2m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체구의 거한이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소년을 쏘아보던 남자는 손등으로 아르센의 뺨따귀를 후려쳤다.
그야말로 힘껏 후려친 덕에, 아르센은 영화처럼 몸이 휙 돌아가며 자빠지고 말았다.
아마 진짜 맞은 것만 아니었다면 꽤 웃긴 슬랩스틱 코미디였을 것이다.
“네, 필루스 도련님…악!”
“너 이 새끼, 내가 분명히 필리아를 목욕시켜놓으라고 했을 텐데?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냐?”
아르센을 부른 거한의 이름은 필루스.
크라타 성의 성주인 레녹의 적장자였다.
필리아는 필루스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기승수로, 개중에도 흉포하기 짝이 없기로 이름 높은 칼날 표범이었다.
애초에 칼날 표범을 목욕시키는 일이 어린아이에게 시킬만한 일이 아닌 것은 둘째치고, 아르센은 필리아를 목욕시키란 얘기를 들은 적조차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필리아를 목욕시키란 말씀을 미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바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뺨따귀를 맞았지만 아르센은 곧장 머리를 땅에 박고 잘못을 빌었다.
그가 다시 태어난 이 세계에서 헛간의 벌레들이나 화장실의 악취보다 더더욱 익숙해진 것이 불합리였다.
육식 맹수나 다름없는 기승수를 열 살짜리 꼬맹이에게 목욕시키는 명령 역시 그런 것의 일환일 뿐.
여기서 ‘들은 적 없는데요?’라고 말대꾸했다가 건방지다며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갓 군대에 들어갔을 때 온갖 말도 안 되는 부조리에 자살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를 다시 한국군대로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영혼까지 내줄 수 있으리라.
“집어치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아버지랑 사냥 나가야 하니까. 이번에 사냥 다녀오면 꼭 씻겨 놔라. 안 그러면 진짜 뒈질 줄 알아!”
그렇게 윽박지르며 아르센을 다시 한번 걷어찬 필루스가 씩씩거리며 뒤돌아 사라졌다.
명치를 발 앞꿈치로 정확히 걷어차인 아르센은 웩웩거리며 구역질을 했으나 나오는 것은 위액뿐이었다.
어제부터 먹은 게 버린 음식을 모아다 끓인, 멀건 죽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씨발, 씨발…개 같은 표범박이 새끼…’
애초에 필리아라는 이름부터가 이곳의 말로 ‘필루스의 반려’라는 의미였다.
암컷 표범에게 저런 이름을 짓고 올라타며 기승수로 써먹다니 얼마나 변태적인 놈이란 말인가.
속으로만 욕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센은 흙으로 토한 흔적을 덮은 뒤 떠오르는 새벽 해를 보았다.
일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매우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노동 말이다.
지구에서 끊임없이 야근과 잔업을 반복하던 회사원이 죽어서 판타지 세계에 가서 승승장구한다.
아르센이 지구에 있었던 시절 즐겨보던 소설들에서 자주 나오던 이야기였다.
죽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건 판타지 세계에서 환생해버린 아르센에게 닥친 것은 그것보다는 조금, 아니면 조금 많이 거지 같은 운명이었다.
이 세계는 흔히 거론되는 판타지 세계와는 조금 달랐다.
판타지 판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해야 할까?
먼 옛날 마법사들이 뭔가 잘못한 탓인지 대충 망해버린 세상은 ‘가을출타’의 세계처럼 위험한 생물들이 나돌아다니는 죽음의 땅이며, 고대 마법의 정수가 담긴 ‘영지’나 ‘성채’의 영역이 아니라면 생존하는 것조차 많은 제약을 받았다.
마력을 다루며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닌 기사들이 성채를 점거하고 영지를 꾸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아르센의 위치는 유감스럽게도 노예에 가까웠다.
심지어 아르센의 아버지가 성채의 주인인 레녹 경임에도 그랬다.
“야, 아르센. 오늘 아침에 도련님한테 맞았다면서?”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이 성채에서 형님이 모르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내가 바로 성채의 귀 라프람이니까!”
“말은 잘해요.”
아르센과 함께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은 그의 이복형제인 라프람이었다.
그보다 두 살 많은 라프람은 얍삽하고 얄미운 녀석이지만 그래도 이복형제 중 제일 덜 나쁜 놈이기도 했다.
굳이 친절을 배풀진 않지만 도움을 요청했을 때 피해가 없으면 들어줄 정도.
그 정도면 이 성채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따 저녁에 필루스 도련님 돌아오시면 그 표범 씻겨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냐?”
“오…잘 가라. 즐거웠다. 형제여.”
“개자식.”
냅다 빼는 라프람에게 서로의 아버지를 동시에 모욕하는 욕설을 내뱉으며 아르센은 힘껏 마당을 쳐올렸다.
사실 그도 라프람이 칼날 표범을 같이 씻기자고 했으면 바로 거절했을테니 할 말은 없었다.
라프람이 한탄하듯이 말을 꺼냈다.
“우리도 도련님들처럼 기사 집안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어머니가 살아있기만 해도 지금보단 나았겠지. 엄마 없는 놈들 취급이 이 지경인 걸 어쩌겠어.”
아르센과 라프람이 아버지 쪽이라도 기사 혈통을 받았음에도 왜 노비 취급을 받는가 하면,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욕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이 성채에는 레녹이 다른 기사 가문 여식에게서 본 자식만 여섯 명, 서자와 서녀는 열대여섯 명이 넘게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서자와 서녀는 어머니 쪽이 맡아서 키우지만, 어머니가 죽은 성주의 자식들은 성주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며 마음대로 굴려졌다.
성채의 사람들이 자기가 원할 때 마음대로 부려먹는 노비 취급 같은 거 말이다.
거기다 심지어 아르센의 어머니는 레녹이 어딘가에서 납치해오다시피 한 외부인 출신이었다.
아르센이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불길한 보라색 눈을 한 여자’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는 어머니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아르센을 비꼬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기도 했다.
이렇듯, 닫힌 사회가 다 그렇듯이 외부인 혈통에는 잔혹하다는 점도 아르센이 받는 푸대접에 한몫했다.
“그래도 니가 나보단 낫지.”
라프람은 아르센에 비해 주변 사람들의 대우가 훨씬 좋았다.
라프람의 어머니는 지금은 병들어 죽었어도 한때 성주가 총애하던 하녀였다.
그녀와 친했던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이리저리 보살펴 준 덕분에 라프람은 아르센에 비해서 훨씬 좋은 처지였다.
적어도 헛간에서 자며 하인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주워먹는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지금 옷차림만 봐도 라프람은 이리저리 기우긴 했어도 구멍 없는 셔츠와 바지를 차려입고 신발까지 신은 데 비해 아르센은 맨발에 구멍이 숭숭 난 넝마 차림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넝마를 여러 겹 뒤집어 써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야 뭐, 우리 동생은 나에 비하면 성에 얹혀 사는 거지잖아.”
“말 한번 더럽게 좋게 하네.”
“틀린 말도 아닌데 뭘.”
어린 아기 시절에는 그래도 성주 혈통이라고 하녀들이 대충 키워줬지만 대여섯 살 무렵부터는 헛간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아마 환생 전의 기억이 없는 어린아이였다면 이 나이까지 살아남지 못하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몰래 우물물을 사용해서라도 꼭 씻어서 청결을 유지했고 기생충이 있을지도 모르니 물은 꼭 끓여 마셨다.
사형수의 피를 받아마시거나 귀신을 물리친답시고 상처에 썩은 오줌을 바르는 등의 머저리 짓을 하지 않으며 상처는 푹 삶은 천으로 감쌌다.
그것만으로도 위생적 측면에서 어마어마하게 취약한 이곳에서는 어린아이가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한 신세였던 ‘형제’ 중 세 명 정도가 온갖 질병으로 급사하는 와중에도 목숨을 건졌으니까.
‘물론 오늘 죽을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현대인의 얕은 지식 중 흉포한 칼날 표범에게서 안전하게 몸을 지키며 그것을 목욕시키는 방법 따위는 없다. 애초에 지구엔 그런 생물이 없으니까!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떤 경로로 그에게 떠밀려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전능하신 르하께 비나니, 제발 필루스가 사냥 갔다 뒈지게 해 주시옵소서.’
아르센은 혹시 누가 들을지 두려워 속으로만 기도하며 빗자루를 휘둘렀다.
병사 막사 앞을 쓸어낸 뒤에는 막사 공용 화장실도 비워야 한다. 당연하지만 변기는 재래식이다.
처음 했을 땐 토할 것 같았고, 몇 번 했을 때도 익숙해지지는 않았으며 늘 할 때마다 새롭게 엿 같은 일이었다.
그 때, 어딘가에서 또 만능 노동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센, 아르센!”
“갑니다!”
또 뭔 일을 시키려나 속으로 한탄하며 아르센이 달려가려고 할 때, 종이 땡땡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종지기가 미친 듯이 줄을 잡아당기는 것이 보였다.
가끔 주변에 마수나 소규모 약탈자 무리가 나타나면 종을 치긴 하지만 저렇게 겁에 질린 것처럼 종을 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종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적이 쳐들어왔다! 병사들은 즉시 성벽으로! 나머지는 집으로 들어가!”
그 때, 마수 가죽으로 된 갑옷을 걸친 레녹의 수석 종자가 나타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막사 안에서 병사들이 달려 나오고 다른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옆을 보니 이미 라프람은 어딘가로 쏜살같이 내뺀 상태였다.
아르센 역시 걸음을 빠르게 놀려 헛간으로 뛰어들어갔다.
“들어라! 적이 쳐들어왔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병사를 제외한 인원의 외부 활동을 금지한다! 즉시 실내로 들어가라! 들어라! 적이…”
수석종자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아르센은 짚더미 속으로 몸을 쑥 집어넣었다.
지푸라기 끄트머리가 몸을 따갑게 찔렀지만 지금 그의 머리로는 여기보다 더 안전한 장소를 생각할 수 없었다.
성채 중앙의 성주관은 한낱 이방인 태생 서자인 그가 들어갈 수 없는 성역이었고 더러운 노비 녀석을 집에 들여놓을 사람도 없었으니까.
짚더미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아르센은 조금 전 달려오며 주워든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빌고 또 빌었다.
‘전능하신 르하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전생에 무신론자였기에 내심 르하를 신봉하는 이 세계의 종교를 비웃던 그였지만, 고된 삶과 두려움은 불신자를 종교인으로 만들어주는 마력이 있었다.
무언가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삶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 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음에 목이 바짝 말라왔다.
[다 뒤져!] [이제 이 성은 우리 거다!]체감상 몇십 분에서 몇 시간쯤 지난 뒤, 불행히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암시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으며 비명과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외부인들이 성을 침략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제 약탈의 결실을 맛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발 이 헛간을 찾지 못하기를, 아니면 그냥 지푸라기밖에 없는 공간이라고 실망하며 떠나가길 기원하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뭐야?”
“그냥 헛간인가 본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외부인 두 명이 헛간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