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00)
투릭은 지하 세계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 시절에는 ‘지하 세계’라는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본래 그에게 있어 세계는 어두운 동굴과 동굴의 연결로뿐이었고, 하늘 대신 천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에.
그가 ‘지상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열 살 무렵, 지상에서 내려온 그의 사촌 덕분이었다.
사촌은 그들 혈족과 닮은 눈 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머리카락 색만은 특이했다. 금발이라는, 이 지하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머리 색이었다.
그의 사촌은 막강한 수호자, 그들의 말로는 기사였다.
저 위쪽, 지상 세계에서 데려온 마법사들을 무수히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자신 역시 강력하기 짝이 없어 지저인의 가장 큰 적인 올무, 그중에서도 수호자들조차 쩔쩔매는 올무 영웅과 장군들이 그의 무기 앞에서 맥없이 쓰러질 정도였다.
올무들을 죽이고 죽인 끝에, 마침내 그는 왕을 죽이고 지저인들을 구원했다.
그의 사촌, ‘굉음의 창’ 아르센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타며 부풀려져, 신화에 가깝게 전해졌다.
잠시 그들 혈족의 본거지에 머물던 시절, 아르센은 투릭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 지상의 무시무시한 마수들, 화려한 풍경, 온갖 기이한 환상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까지.
어린 투릭에게는 하나같이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이를 듣던 소년이 모험을 동경하게 되기 충분할 정도로.
투릭은 꿈을 품었다. 언젠가 자신의 사촌처럼 자유롭게, 직접 땅 위를 걸으며 모든 것을 돌아보겠노라는 꿈을.
사촌 형이 떠난 뒤, 투릭은 정식으로 수호자가 되기 위한 단련을 시작했다.
소년은 소심하고 소극적이던 본래 성격과 달리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했다. 이를 보던 선생, 그의 고모가 조금 쉬어가며 하라고 달랠 정도로.
열여덟 살, 투릭은 마침내 수호자가 되었다.
지하 세계의 변두리에 숨어있던, 올무 잔당들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얻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인도자’가 수호자가 된 것에 모두가 기뻐할 무렵, 투릭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던졌다.
앞으로 이 년 안에, 지상으로 올라가 모험을 떠나겠노라고.
“적당히 해라, 투릭!”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아직 어린애라지만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꺼내지 마라.”
당연히 그의 가족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그들 혈족의 우수함을 상징하는 인도자가 투릭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후손조차 남기지 않고 나가겠다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던 탓이다.
‘간다. 반드시 간다.’
하지만 투릭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소심하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그 어떤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고집 센 모험가가 있을 뿐.
삼 년 뒤, 투릭은 비슷한 나이대의 수호자 몇 명을 모아 지하 세계를 나섰다. 거의 가출에 가까운 출정이었다.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과거 아르센에게 들었던, 그가 말해준 모험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출정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뭐야, 왜 그래?”
“자, 잘 모르겠어. 이상하게 힘이 빠져······.”
“나도······못 서 있겠어······.”
출구 가까이 도착할 때쯤, 스물스물 피어오른 독기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투릭과 달리 ‘혈족’이 아닌 그의 친구들은 독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수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독기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투릭은 그들을 안전한 곳까지 옮겨준 후 혼자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문이 열리고, 지상으로 올라온 투릭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눈을 찌를 듯한 태양의 은총이었다.
아마 지하에서 살다 올라온 보통 사람이라면 눈이 멀었을 것이나 투릭은 수호자, 즉 기사인 덕에 그런 곤경을 면할 수 있었다. 쉼 없이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
“아······!”
투릭은 하늘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린 것은 그저 눈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저 하늘, 끊임없이 펼쳐져 어디에도 닿을 것이 없는 하늘을 보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였다.
그것이 너무나 기쁘면서도 슬펐다. 그의 가족, 친구들은 평생 저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기에.
투릭은 그대로 봉우리 위에 드러누운 채, 두 팔을 벌려 하늘을 끌어안았다.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후, 투릭은 동쪽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리 녹록한 여행은 아니었다. 목적지를 알 수 있는 기준점은 과거 그의 사촌 형에게 들은 동화 같은 이야기뿐.
확실한 것은 무엇 하나 없는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걸음을 옮겼다.
아는 것은 그저 하나였다. 동쪽, 저 동쪽으로 가다 보면 벨루안이 나온다는 것.
그나마 다행인 점은, 투릭이 여행을 제법 착실하게 준비해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아르센이 남겨준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을 타고 있었으며, 인도자 혈족이 가지고 있는 유물 중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모조리 가지고 나온 상태였다.
혼자라 기습에 취약하다는 약점은 경보 유물로 극복했고, 마법 배낭에는 몇 달을 버티고도 남을 식량을 쟁여 놓았다.
그 외에도 몸을 숨기고, 짧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등 여러 도구의 힘을 빌릴 수 있었기에 투릭은 혼자서도 마수와 약탈자들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 * *
동쪽으로 얼마나 갔을까,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거대한 강이었다.
졸졸 흐르는 지하수만 보고 살아온 그로서는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믿기 힘든 어마어마한 넓이의 강.
그러나 투릭은 이를 신기하게 보면서도 절대 그 강에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물속에 사는 마수들이 지상의 친척들보다 수십 수백 배는 크고 위험한 놈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서였다.
강을 지나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사는 영지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거대한 영지는 하늘에 떠 있었다.
이 하늘섬의 사람들은 투릭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의문을 품었다.
“자네가 ‘그’ 아르센의 사촌이라고?”
“네, 맞습니다.”
“흐흠······.”
“맞는 것 같습니다. 눈 색이 똑같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그 아르센 경보다 더 진한 보랏빛 눈인데······.”
“저 진도 본 적 있어요. 그분을 따르는 기사 중 한 명이 타고 있었죠.”
투릭의 눈 색, 그리고 그가 가져온 진이 그 증거가 되었다. 보랏빛 눈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몹시 드문 색이며, 도마뱀 형태의 진 역시 희귀한 것이었던 탓이다.
마침내 그들은 먼 동쪽에서 온 기사, 치료제로 그들을 구원한 영웅의 사촌을 맞이하여 축제를 열었다.
함께 참여해 술을 마시며, 투릭은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형님은 허풍쟁이가 아니었어. 이야기는 모두 진짜였다고!’
아르센의 모험 이야기를 듣고 꿈을 키울 때마다, 다른 친척들이 참견하듯 한마디씩 하고는 했다.
그런 이야기는 원래 부풀려 말하는 거라고, 여행자의 허풍을 진지하게 믿지 말라고.
하지만 정말 아르센은 이곳을 지났고, 약을 얻어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투릭은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 * *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사막의 영지, 갈라이오였다.
이곳에서도 그는 아르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 그 보라색 눈의 기사······.”
“대단했지. 그때 우리 셋이 한 번에 덤벼도 상대가 안 되지 않았었나?”
“나는 갑옷을 좀 긁기는 했어. 한 대도 못 맞춘 건 너였고.”
영지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 세 명이 입 모아 말하기를, 그들은 젊은 시절 아르센과 삼 대 일로 겨루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를 주제로 대화를 꽃피운 끝에 그들은 승부를 겨루기로 했고, 투릭은 세 기사에게 모두 패했다. 기량 면에서, 어린 그는 아직 나이 든 기사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 친목을 다지고, 맛 좋은 음식을 즐기며 피로를 푼 투릭은 슬슬 이 사막을 떠나고자 했다.
그때, 사건이 발생했다.
“아아아아악!”
“도망쳐! 빨리!”
“이 미친 새끼야! 지금 짐 쌀 때야? 당장 도망치라고!”
“이건 우리 어머니가 남겨준 가보야! 안 가지고는 못 가!”
사막의 왕,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그 마수가 반쯤 미친 채 영지를 습격한 것이다.
그저 걸어서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수십 채의 건물이 장난감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광경은 차라리 신화적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공포에 빠졌다.
그야말로 작은 동산이 하나 걸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그 누가 자연을 상대로 적의를 불태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모두가 겁에 질려 도망치던 와중, 갈라이오의 영주가 펼친 기적이 사막의 왕을 강타했다. 놀랍게도, 이 막대한 마법의 힘은 놈을 잠시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용맹한 사막의 기사들은 사막의 왕의 몸뚱이를 타고 올라 놈을 미친 듯이 난도질했다.
아니, 파고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들은 무기로 마수의 살을 찢어 파내고 피바다를 헤엄쳐가며 놈의 내장을 도려냈다.
투릭 역시 이에 참여하여, 거의 오두막 크기인 놈의 거대한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승리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어헉!”
그리고 뇌의 한가운데를 찢어발긴 순간,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빛이 솟아나 투릭의 몸을 파고들었다.
투릭은 그대로 기절한 채, 마수의 뇌수에 잠겨 있다가 간신히 구조되어 살아났다.
하루쯤 지나 깨어난 뒤, 그는 자신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깨달았다. 이곳의 말로 ‘고위 기사’가 된 것이다.
듣기로는 이 용어 역시 아르센이 전해준 것이라고 하던가.
워낙에 거대했던 탓인지 놈은 머리와 심장, 그리고 내장 두 군데까지 총 네 개의 정수를 지니고 있었다.
사막의 기사들은 정수 중 하나를 이방인이 차지했다는 사실을 아쉬워했으나, 숨통을 끊은 것은 투릭이기에 이를 존중했다.
모험을 떠나고 네 달 만에, 투릭은 고위 기사가 되었다.
* * *
갈라이오를 떠나, 투릭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몇 달을 걸었을까, 안개의 땅을 비롯한 많은 영지를 지나 도착한 곳은 유적 도시 사티엔이었다.
과거 들었던 대로 이곳에는 수없이 많은 기사가 있었다. 인근 영지에서 온, 각기 다른 습속을 가진 기사들은 서로 충돌하고 협력하고 견제하며 문화의 용광로를 이루었다.
그곳에서 투릭은 과거 아르센에게 이름을 들었던 기사, 크렌과 라수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투릭이 아르센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를 크게 환영하며 손님으로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기사 크렌은 투릭에게 대련을 종용했는데, 나이가 들어 은퇴한 기사임에도 그 기량은 무시무시했다. 갓 고위 기사가 되어 자신만만했던 투릭은 온종일 바닥을 굴러야 했다. ‘제 형보다는 못하군.’이라는 냉소적인 지적을 받으며.
이에 발끈하여 쉼 없이 덤벼든 탓에, 사티엔에서 머무른 몇 주일간 투릭의 몸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충분히 휴식하고 지도와 물자를 구한 뒤, 투릭은 유적의 도시를 지나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 근방은 비교적 여행자가 많은 편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혼자 다니는 기사는 꽤 특이한 존재였기에, 투릭은 여러모로 시선을 끌었다.
개중에는 그를 고용하고 싶어한 영주도 몇 명 있었지만 투릭은 이러한 제의 모두를 정중히 거절했다.
* * *
두어 달 뒤, 그는 독기가 정화되는 신비한 숲에 도달했다.
이름하여 어둔숲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투릭은 수호자의 환각에 공격당하며 아르센의 이름을 부르짖어 간신히 입장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르센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르센은 약 칠 년 전 이곳에 다시 왔었다고 했다. 이 숲을 지키는 전대 수호자의 연인와 그 딸을 데리고.
수호자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다른 수호자가 대신하여 숲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숲을 나와 평야를 가로지른 끝에, 마침내 투릭은 대륙을 반으로 가르는 거대한 산맥에 도달했다.
위주 산맥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산맥은 오직 좁은 입구 하나만으로 출입을 허용했고, 그 건너편에는 영지 하나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강철의 영지, 엑세키아가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마법사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볼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아르센의 업적이었다.
본래 마법사는 다짜고짜 쫓아내 버리는 것이 엑세키아의 풍조였으나, 아르센이 큰 공을 세운 이래 엑세키아는 그 대가로 마법사들이 머물 수 있는 거처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마침 그가 갔을 때 젊은 방랑 마법사 두 명이 머물고 있었는데, 연인이나 부부인가 싶었으나 알고 보니 이복 남매라고 했다. 남매가 마법사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쪽도 벨루안에 가는 겁니까?”
“네. 당신들도?”
“맞습니다. 어쩌면, 벨루안에 가기만 하면······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들의 고향은 이곳에서 북서쪽에 있는 영지인데, 언제부터인가 저 동쪽 끝에 마법사가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의 억압과 차별을 피해 도망쳐, 벨루안을 찾아 여행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투릭이 마법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그와 벨루안까지 동행하기를 원했다.
마법사와 함께 여행한다면 여러모로 편할 것이기에 투릭 역시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산맥을 내려오고 몇 주일, 마법사 동료들이 합류한 덕에 여행은 더욱더 편해졌다.
불을 피우거나 길을 건너고 많은 수의 마수와 약탈자를 해치우는 등, 마법사들은 투릭을 돕고 투릭은 마법사들을 보호했다. 그 과정에서 투릭은 지상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척박하고 힘들게 사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한 달 뒤, 마침내 투릭은 벨루안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벨루안 왕국’에 도착한 것이다.
그를 반긴 것은 벨루안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 나르비크였다.
본래 기사들이 대립하고 격돌하며 혼란을 자아내던 이 도시는 사 년 전, 아르센이 이끄는 군대에 정복되어 벨루안 왕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도시를 통치하고 있는 벨루안의 기사들은 그 무장이 실로 특이했는데, 땅 위를 둥실 떠다니는 독특한 진을 타고 길쭉한 막대기 비슷한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쏘아지는 무언가는 엄청난 힘과 속도로 간단히 마수를 분쇄해 버렸기에, 그들은 혼자서도 넓은 구역의 마수들을 모조리 구제할 수 있었다.
“사촌 동생······? 설마 그, 지하의?”
“알고 계십니까?”
“그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었으니까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기사 미로입니다.”
투릭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지하 세계의 존재를 아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과거 아르센과 함께 모험한 병사 중 한 명으로, 이름은 미로라고 했다.
아르센의 혈족이 지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다 벨루안 특유의 진 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투릭의 정체를 즉시 납득하고 믿어 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혹시 국서 전하를 뵈러 오신 겁니까?”
“국서 전하요?”
“아르센 님을 말하는 겁니다. 여왕에 즉위하신 엘로이즈 폐하의 반려이시니, 높여 부르는 거죠.”
“아······네. 일단 맞습니다.”
기사 미로는 사정을 들은 뒤, 그냥 나르비크에 있는 전이문을 타고 가라고 설득했다.
어차피 여기서 동쪽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황야만 계속되니 굳이 진을 타고 가봐야 볼 것도 없고 그저 힘만 뺄 뿐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그 설득을 들어, 투릭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전이문을 타고 건너가기로 했다.
벨루안 쪽에 미리 연락하던 와중, 아르센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투릭?]“네, 형님. 투릭입니다! 형님과 같은 인도자였던, 혹시 기억하시나요?”
[물론. 기억은 나지. 그런데 이 먼 나르비크에는 어쩐 일로, 설마 진짜 기사가 되어서 온 건가?]“맞습니다. 형님이 말해주셨던 여행 경로를 거꾸로 따라서 왔죠. 고생도 꽤 했습니다만, 덕분에 형님의 명성이 지상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투릭은 오랜만에 자신의 우상과 대화한다는 기쁨에 젖어, 수정구 너머를 향해 격렬하게 환희를 토해냈다.
잠시 침묵한 뒤,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다소 머쓱해 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쑥쓰러운데······어쨌든, 마침 내일이 전이문이 열리는 날이니 넘어와서 만나지. 이쪽으로 넘어오면 바로 왕궁에 올 수 있게 조치해두마.]“기대하겠습니다!”
* * *
마침내 벨루안으로 가는 전이문이 열리자, 투릭은 냉큼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이 위대한 마법 도구의 힘으로, 투릭은 고작 한 걸음을 내디뎌 몇 주, 몇 달의 여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는 벨루안의 수도에 도착해 있었다.
“아······!”
그들이 나온 곳은 벨루안 중앙이 아닌, 외곽 지역이었다.
행여나 적대 세력이 전이문을 타고 기습할 수 있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길을 막지 않고자 물러난 뒤, 투릭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그와 함께 온 마법사 남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벨루안의 모습은 그간 여행하며 보았던 여러 영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저게 벨루안인가?”
“그런 것 같은데.”
“사람이 아니라 신들이 사는 세상 같아.”
눈에 보이는 모든 곳, 지평선 끝까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을 채운 것은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와 온갖 채소를 키우는 밭, 한참 푸르게 자라나는 밀밭이었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곳 너머까지 펼쳐진 농작물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따라온 병사의 인솔에 따라 시내로 들어서자 그 감동은 더욱더 커졌다.
도시 내부는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건축물이 가득했고 길은 잘 닦여 있었다.
사람들의 면면 역시 대단했다. 다들 혈색 좋은 얼굴에 옷이 말끔한 것이, 다들 부유하고 고귀해 보였다. 언제나 궁핍한 기색 가득하던 농민들의 모습은 엿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들은 마법사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이 사실에 마법사 남매는 감동한 탓인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선 끝에, 그들은 왕궁에 도달했다. 과거 영주관이라 불렸던 건물을 증축한 그곳에 들어간 뒤에, 투릭은 드디어 고대하던 사촌 형을 만날 수 있었다.
“형님!”
“투릭.”
그의 사촌 형, 아르센의 모습은 예전과 비슷했다. 목 위로 친 금발에 그들 혈족을 상징하는 보랏빛 눈과 잘생긴 얼굴까지.
서른 줄을 바라보는 탓인지 슬슬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는 했으나, 얼핏 보기에는 아직도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그 옆, 화려한 옷을 걸친 아름다운 여인을 보며 투릭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이곳에 오기 전, 병사가 여왕을 상대하는 예절을 어느 정도 알려준 덕에 이를 미리 숙지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화려한 장신구를 단 여왕, 엘로이즈가 무릎 꿇은 투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그때 그 꼬맹이라고?”
“네, 맞습니다. 폐하.”
“거기서 진짜 여기까지 오다니, 도대체······.”
엘로이즈는 너무 대단해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손짓하며 지시했다. 일단 절차부터 진행하고 이야기를 하라며.
잠시 후, 투릭은 하인의 인도에 따라 기묘한 기구에 잠시 들어갔다 나와야 했다. 뭔가 빛이 번쩍였는데, 그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함께 온 두 마법사 역시 이를 진행했는데, 그들은 투릭과 달리 신원을 명확히 보증할 수 없기에 따로 입국 절차를 더 거쳐야 했다.
부디 잘 풀리기를 바란다며 인사한 뒤, 투릭은 응접실에서 아르센과 마주 앉아 그간 겪은 모험을 신나게 풀어냈다.
“이러니까 좀 신기하네요. 옛날에는 형님이 저에게 모험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이젠 제가 모험 이야기를 하니······.”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설마 진짜 그 길을 되짚어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지하 세계, 인간들의 거주지는 어느 쪽 통로를 이용하건 간에 적어도 몇 주에서 몇 달을 이동해야 하기에 통행하기가 몹시 불편했다.
지상이라면 도서관으로 날아서 가겠으나 그럴 수도 없으니, 아르센 역시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는 자신의 혈족을 만나보러 가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진짜 사막의 왕을 잡았다고? 그 괴물을?”
“네. 사실 그곳 영주님이 무력화해놓은 것을 숨통만 끊은 정도지만요. 덕분에······.”
투릭은 미리 준비해 담아둔 모래 한 줌을 꺼낸 뒤, 이를 손으로 가볍게 비벼냈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모래가 두둥실 떠올랐다.
“모래를 조종할 수 있게 됐어요.”
“일부 강력한 마수의 능력은 정수를 취한 자에게 전해진다······들은 적 있기는 하지. 운이 좋았네.”
“뭐, 이걸 딱히 어디 써먹기는 힘들지만요.”
실없이 웃고 있자니, 응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들어온 것은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어린 소녀였다. 체구로 보아 나이는 아마 여덟 살쯤 되었을까.
“아바마마!”
“오, 그래. 우리 딸.”
귀엽게 오도도 달려온 소녀는 그대로 아르센의 품 안에 폭 안겼다.
기사답게 큰 체격을 지닌 아르센이기에,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맹수에게 물린 토끼를 떠올리게 했다.
“공주님! 국서 전하께서 얘기 중이신데 마음대로 들어가시면······.”
뒤따르던 담당 하녀가 다급히 외치자, 아르센은 손을 내저으며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아니, 괜찮다. 애는 내가 볼 테니 나가 있도록.”
“아······알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투릭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 아이는······?”
“내 딸이다. 이름은 프리실라.”
그 말을 듣고 보니, 소녀의 생김새는 두 사람을 완전히 빼다 박은 모양새였다. 엘로이즈의 것과 같은 검은 머리에, 아르센의 혈족이 지닌 보랏빛 눈까지.
미남 미녀인 부모를 닮은 것인지, 소녀 역시 아직 어리지만 크면 미인이 될 것 같은 본바탕이 엿보였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마자, 프리실라는 아르센을 붙잡고 재빨리 떠들기 시작했다.
실수로 바크란의 다리를 부러트렸으며 그래서 어머니가 화를 냈고, 마침내 루덴 할아버지가 바크란의 다리를 녹여 붙이는 것까지 보았다는 등······.
그렇게 조잘대기를 한참, 소녀는 그제야 투릭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보라색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예요?”
이제 스무 살 젊은이에게 아저씨라니, 내심 씁쓸하게 웃으며 투릭은 친절한 어조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