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1)
20화 – 추수 축제 (1)
잘 부탁드립니다
온 영지에서 화톳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싸우고 웃고 울며 즐겼다.
벨루안 영지의 가을 축제는 영지 전체가 즐기는 행사로, 몇몇 불쌍한 기사와 경비병들을 뺀 모두가 거리로 나와 신나게 노는 행사였다.
아르센 역시 오늘은 기사가 아닌 한 명의 영지민으로서 이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슬라! 우슬라! 우슬라!”
“사르마크! 지지 마라!”
두 명의 남자가 필사적으로 팔씨름을 하는 와중에 거기에 돈을 건 사람들이 뒤에서 응원하며 술을 마셨다.
잠시 후 간신히 승부가 갈리자 탄식과 환호로 엇갈린 반응이 쏟아졌다.
근육질의 대머리 남자가 두 팔을 높이 들며 승리의 포효를 질렀다.
“이런 썅! 야 이 약골 새끼야! 내 돈 내놔!”
“와우, 최고다! 사르마크!”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모습을 보던 아르센의 옷소매를 누군가가 탁탁 당겼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엘로이즈였다.
“센은 저 사람이랑 팔씨름하면 이길 수 있어?”
“하면 큰일 나지.”
아마 아르센이 일반인과 팔씨름을 했다간 힘 조절을 잘못할 경우 악력만으로 손이 부서질 것이다.
다음 팔씨름 선수들이 앉아 대결을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얼굴에 지루함이 감도는 것을 보고 물었다.
“가볼까? 또 보고 싶은 거 있어?”
“중앙 광장에서 춤추는 거.”
엘로이즈가 태어난 이래 열 번째로 열린 축제였지만, 그녀가 이것을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아르센과 손을 맞잡고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며 축제를 구경하는 엘로이즈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저기다!”
광장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이 어깨동무를 한 채 둥글게 원을 그려 화톳불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후! 하!’하고 호흡을 맞추며 두 다리를 번갈아 뻗는 춤을 췄다.
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원에는 일반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르센이 얼굴을 아는 종자도 몇 명 끼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기묘한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신기하다.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서 춤추는 건 처음 봐.”
아르센 역시 이번 생에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기에 수긍했다.
이후 둘은 한참 동안 이 기묘한 군무를 감상하는 데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르센은 자극적인 매체에 익숙했기에 이 축제가 엄청나게 재밌거나 하진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환경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치유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새삼 아르센은 자신이 지난번 전투에서 약탈자를 베어 죽이고, 마인과 생사를 다투는 싸움을 하며 마음이 황폐해져 있었음을 느꼈다.
싸움에서 입는 상처는 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가서 같이 해보고 싶은데, 안 되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엘로이즈가 입고 있는 로브의 마법적 효과는 그리 강하지 않아서, 그녀를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사 특유의 불쾌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기에 주의를 끌 정도로 가까이 가는 것은 금물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엘로이즈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센! 센! 저기 저거, 맛있지 않을까?”
“안 돼, 바깥 음식은 함부로 먹는 거 아니야.”
어떤 노점상이 올려놓은 꼬치구이를 본 엘로이즈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지만, 아르센은 단호히 제지했다.
식품위생법이 있는 지구에서도 노점상을 함부로 못 믿는 마당에 이 세계의 노점상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아르센은 저 꼬치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쥐든 마수든, 하다못해 벌레형 마수의 고기가 아니면 다행일 지경이다.
아쉬움에 발을 구르는 엘로이즈를 달래주고 있던 그때, 아르센을 부르는 중후한 목소리가 있었다.
“오, 자네도 축제를 즐기러 왔구먼.”
갑자기 등장한 팔라토 경은, 조금 전 아르센이 엘로이즈에게 먹지 말라 충고했던 꼬치구이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 팔라토 경. 근데 들고 계신 그건…”
“먹어볼 텐가? 돼지고기인 거 같은데 맛이 썩…헉!”
팔라토가 평소의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신음과 함께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가렸다.
어찌나 황급했는지 꼬치를 들고 있던 손으로 머리를 가리느라 앞머리가 기름으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나 고민하던 아르센은 팔라토가 옆에 있던 엘로이즈를 발견한 것임을 깨달았다.
팔라토 역시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는지,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올바르게 했다.
“으흠, 실례했습니다…엘로이즈 아가씨. 오랜만이군요.”
“…네.”
엘로이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팔라토의 말을 받으며 아르센의 뒤로 슬쩍 몸을 숨겼다.
아르센은 조금 전 팔라토의 태도를 보고 그가 이전에 말했던, 엘로이즈가 머리카락을 뽑아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히 팔라토는 마인을 만났을 때조차 이 정도로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아, 여기는 내 딸이네. 전에 얘기했었지. 아이리.”
팔라토의 옆에 있던 어린 소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아르센보다도 몇 살 어려 보였다.
잠깐 침묵의 시간이 지나간 후, 팔라토가 갑자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말했다.
“음, 그럼 나는 먼저 가보겠네. 그러고 보니 저쪽에 우리 젊은 친구들이 꽤 재밌게 놀고 있더군. 볼 게 없거든 한 번 가보시게나.”
재빠르게 사라지는 팔라토의 뒷모습을 잠시 흘겨보던 아르센은, 눈에 띄게 우울해진 기색인 엘로이즈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 엘리. 팔라토 경이 널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단지, 음…좀 중요한 게 걸려있어서 그러실 뿐이지.”
“…알았어.”
솔직히 아직 어린 아르센도 머리카락이 날아갈 위험이 있다면 아예 담담할 자신이 없는데, 머리가 한참 중요한 나이인 팔라토가 직접 그런 일을 겪었다면 어떻겠는가.
어린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해는 갔다.
침울해진 엘로이즈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아르센은 먼저 말을 걸었다.
“더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니면 아까 팔라토 경이 말한 대로 다른 기사들이랑 인사나 하려는데. 재밌는 거도 있다고 하니까.”
“응. 사실 이제 뭐가 있는지 더 모르겠어.”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팔라토가 말했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과 비교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확연히 젊어졌다. 아까 전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장년층이라면 지금은 청년층 정도일까.
앞에서 떠들썩한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
“결혼해라! 결혼해!”
그 곳에서는 기사 몇 명과 종자들이 모여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고, 가운데에서 카민이 제노비아를 공주님처럼 안은 채 빙빙 돌고 있었다.
“야! 놔! 놓으라니까! 이런 썅! 안 놔!?”
제노비아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막상 카민을 떨쳐내지 않는 모습이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카민은 평상시의 포커페이스는 내다 버린 채, 흥분한 얼굴로 환호하고 있었다.
마침 가장 열성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위블이 보여 아르센은 다가가 물었다.
“…위블 경,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꼬마!”
위블은 얼마나 웃었는지 눈꼬리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을 정도였다.
“제노비아가 갑자기 카민을 붙들더니 ‘야! 나랑 결혼하자!’이러더라니까? 카민은 그걸 듣더니 갑자기 미쳐서 저 꼴이야! 저 녀석이 저러는 건 진짜 처음 본다!”
설마 진짜로 그런 식으로 청혼하고 그게 통하다니, 아르센은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환상의 커플 아닌가.
적어도 카민의 저 모습을 보고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옆에서 다시 또 웃음이 터져 나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이번엔 반대로 제노비아가 카민을 아예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휘두르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남자가 자기와 비슷한 키의 여자에게 붙들려 허우적대는 모습은 가히 초현실적이라 할 만했다.
“으아아아아아아!”
“더 돌려라! 더!”
“카민 경! 그렇게 웃으니 보기 좋습니다그려!”
종자들은 자기들의 목표이자 우상이던 기사들이 유쾌하게 망가지는 모습에 열광하고 즐거워했다.
다른 평민들 역시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었다.
“영주님께 한 소리 듣겠네. 체통 좀 지키라고 말이야.”
즐거운 듯이 얘기하던 위블이 아르센의 옆에 몸을 숨긴 엘로이즈를 보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위블은 엘로이즈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든 다음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긴 했지만, 저 정도면 마법사를 대하는 데 있어 굉장히 훌륭한 태도였다.
아르센은 위블의 주의를 돌릴 겸, 이제는 발목을 잡혀 빙빙 돌아가고 있는 카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러다 카민 경이 다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뭐 어때? 어디 부러지지만 않으면 금방 나을 텐데. 그나저나 정말 잘 됐어! 저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애는 엄청나겠지.”
위블의 말투는 친한 친구의 사랑을 축복한다기보다 가축의 교배를 말하는 듯해 듣기 조금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관점이었다.
보통 부모 중 한쪽이나 두 명 모두가 기사라면 각성할 확률도, 각성했을 때의 마력량도 늘어나니까.
“일단 순수하게 사랑을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 그야 뭐.”
위블 역시 수긍하며 큰 소리로 손뼉을 짝짝 치기 시작했다.
카민과 제노비아는 부둥켜안은 채 다시 입을 맞추고 있었다.
* * *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아직 축제의 열기가 한창인 마을을 뒤로 하고 영주관으로 걷고 있었다.
이미 어두운 밤이라 깜깜했던 탓에 아르센이 앞에서 엘로이즈를 인도했다.
“와, 진짜 눈이 빛나네. 고양이 같아.”
“고양이는 너무 귀여운 비유인데.”
아르센은 원정 당시, 야밤에 습격해 온 소규모 약탈자들을 처리하던 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새파란 안광을 흘리며 숲을 누비는 그들의 모습은 고양이라기보단 호랑이 같은 대형 맹수에 가까웠다.
따지자면 둘 다 고양잇과긴 하지만.
“아까 그 두 사람은 행복하게 결혼하겠지?”
“모르지. 막상 사귀었는데 생각보다 잘 안풀릴 수도 있고…”
그렇게 대답하던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을 보고 슬쩍 말을 바꿨다.
“그래도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니까, 잘 될 거라고 믿어.”
“그렇지!?”
엘로이즈는 조금 전의 그 로맨틱하다기엔 애매한 상황에 심취한 듯, 콩콩 뛰며 발을 굴렀다.
그 모습을 보니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엘로이즈가 혼자서 ‘나도 언젠가는…’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뒤로한 채, 아르센은 고개를 돌려 따뜻한 주황색으로 빛나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좋은 곳이야.’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 친절하고 즐거운 사람들.
이 세계에 태어난 이래 항상 굶주리고 비굴하게 살아야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곳.
물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르센이 기사였기 때문이며, 이곳에서도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마수들과 싸우며 죽고 희생되는 자들이 있긴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아픔도, 슬픔도 존재했다.
이렇게 위험하고 잔인한 세상에서, 아니 그렇지 않은 곳에서라도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엘로이즈만 해도 그런 안타까운 현실의 희생자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이 땅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찬란해 영원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벨루안 영지를 내려다보며 아르센은 두 손을 모아 기원했다.
부디 이 평온한 일상이 깨지지 않기를.
그렇게 기도하던 아르센의 머리 위로 밝게 빛나는 무언가가 지나갔다.
어찌나 밝은지 잠시나마 온 세상이 낮으로 변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한 별.
흔히 혜성이라 부를만한 것이겠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밝았다.
“엄청나다!”
“저게 도대체 뭐지?”
축제를 즐기던 모든 영지민들이 이 정체불명의 별빛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별빛을 받아 깨어나는 존재들이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비쳐오는 불빛과 코를 찌르는 매캐한 악취.
영지 주변의 무수히 많은 마수가 자기들을 자극하는 근원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