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2)
21화 – 추수 축제 (2)
잘 부탁드립니다
경계 순찰병인 뤼카는 매우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아니, 1년에 한 번 있는 추수 축제에서 하필 야간 경비를 담당한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절대 기분이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다들 신나게 춤추고 먹고 떠드는 동안 춥고 어두컴컴한 경계지역을 순찰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사실 그들이 밤에 경비해야 할 것이라고 해 봐야 약탈자들이 고작이었다.
기본적으로 마수는 밤에 나타나지 않는 존재고, 벨루안 영지가 인근 영지와 특별히 적대적인 입장인 것도 아니니까.
그들이 신경 써야 할 문제라고 해 봐야 어두운 밤을 틈타 작물을 훔쳐 가는 약탈자 정도에 불과했다.
밤에는 도마뱀을 탈 수도 없기에 그냥 걸어 다니면서 순찰해야 한다는 점도 그들의 피로를 부추겼다.
피곤하기 짝이 없는 한밤, 녹색 달빛과 횃불에 의지하며 직접 두 발로 어두운 경계지역을 살펴야 하는 야간 순찰은 주간 순찰보다 훨씬 인기가 없었다.
“뤼카, 저게 뭐지?”
“뭐?”
동료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 이미 뤼카의 고개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빛나는 혜성.
너무나도 하얗고 밝게 빛나 지상의 모든 존재에게서 색깔을 빼앗는 강렬한 빛이 땅 위를 훑고 지나갔다.
뤼카의 서른 살 인생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렬한 광경이었다.
혜성이 지나간 뒤에도 빛은 한참 동안 남아 하늘을 밝히다가 사라졌다.
“대단하네.”
“그러고 보니 옛날에 할머니한테 비슷한 얘기 들어본 적 있는데…”
동료가 뭐라고 말하던 순간, 뤼카의 귀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 뭔가가 쉭쉭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 구르륵 끓는 듯한 소리.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 뤼카는 자기도 모르게 횃불을 떨어트릴 뻔했다.
수많은 푸른 안광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 마…”
옆에서 동료가 말을 더듬는 소리가 들렸다.
뤼카는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 달리며 품에 넣어놨던 뿔피리를 들었다.
뿌우—-우—–!
우렁찬 뿔피리 소리가 추수를 마친 밤의 평야 사이로 울려 퍼졌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뿔피리를 힘껏 불자 뤼카의 폐가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리며 숨이 차올랐다.
마침내 참을 수 없어 뿔피리를 입에서 뗀 순간이 뤼카의 마지막이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뤼카의 몸을 가볍게 반으로 나누었다.
걸리적거리는 것을 앞발 한 번 휘둘러 해치운 칼날 표범이 마을의 방벽을 향해 달렸다.
그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마수가 뒤따르고 있었다.
* * *
“대규모 마수 무리가 쳐들어온다! 무장하지 않은 모든 전투병력은 즉시 영주관으로 가서 무장해라! 경비병! 방벽 위로 올라가라!”
마수의 존재를 깨닫고 제일 먼저 진을 타고 달려온 기사 나메르의 외침에, 축제 중이던 마을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허둥지둥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며 다른 일부는 축제 중 흩어진 자신의 가족을 찾아 헤맸다.
한밤중에 마수가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는 본래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농담이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온갖 짐승들의 소음이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마을 외곽에서 시작된 혼란은 점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엄마아아아…”
“리체! 리체! 어디 있니! 리체! 대답해!”
“경비대 4조! 어딨나! 집합해라!”
이 혼란은 마침내 영주관으로 돌아가던 아르센과 엘로이즈에게까지 전해졌다.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을 따라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모습에 아르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축제를 즐기던 종자와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영주관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오다가 길에 서 있는 아르센을 본 종자 한 명이 외쳤다.
“아르센 경! 마수입니다! 마수 무리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황당한 소리에 아르센은 반문했다.
“지금은 밤이잖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소리를 들었습니다! 빨리 무장한 뒤 방벽으로 가야 합니다!”
아르센은 취하기라도 했는지 반쯤 눈이 풀린 표정으로 소리치는 종자의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계속해서 영주관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아 거짓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누가 보면 반란이라도 일어난 줄 알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엘리, 일단 빨리 올라가자.”
“응? 꺅!”
아르센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로이즈를 들어 어깨 위에 얹었다.
그 상태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 앞서가던 기사와 종자들을 앞질러 영주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단 영주관보다는 탑으로 데려가는 쪽이 훨씬 안전하다는 판단에, 아르센은 마탑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두들겼다.
다행히 1층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는지, 루덴이 즉시 문을 열었다.
아르센은 즉시 엘로이즈를 내려놓고 탑 안으로 들어가도록 떠밀었다.
“자, 엘리. 안에 들어가 있어.”
“뭔가? 축제 벌써 끝…”
“마수가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엘리 좀 봐주세요. 무장해서 바로 내려가 봐야 하니까.”
“아니, 이 오밤중에 마수가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박식한 마법사인 루덴도 이 사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먼저 가 있게! 나도 곧 갈테니!”
아르센은 재빨리 문을 닫고 영주관을 향해 달렸다.
이미 영주관 앞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채, 종자, 병사들이 몰려들어 자신의 장비를 지급받고 있었다.
아르센의 장비는 방에 있었기에 영주관 내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검과 갑옷을 챙겨 나왔다.
평상시 보관소에 따로 보관되어 있던 기사들의 진은 모두 기사들이 타고 갈 수 있도록 나와 있었다.
종자 한 명이 아르센을 보고 외쳤다.
“아르센 경! 여기 타시면 됩니다!”
아르센은 본래 엔티르의 소유였던, 이제 자신에게 배정된 진에 탑승함과 동시에 등 부분에 위치한 진의 심장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감각이 동화되는 느낌과 함께 땅을 디디고 선 굳건한 네 발이 느껴졌다.
* * *
“크아악!”
병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마자 그 위에 양뿔늑대 세 마리가 몰려들어 병사의 팔과 다리를 잡아 찢었다.
바로 옆에 있던 위블이 달려가 양뿔늑대들을 칼로 베고 걷어차 쫓아냈지만, 이미 온몸이 찢겨나간 병사는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빌어먹을!”
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축제를 위해 거대하게 피운 화톳불이 영지 인근의 모든 마수를 끌어모았는지, 죽이고 죽여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인간에 대한 악의로 똘똘 뭉친 이 생명체들은 3m 높이의 방벽을 아득바득 기어오르거나 뛰어오르거나 다른 마수의 몸을 밟고 올라왔다.
한두 마리라면 위에서 창을 찌르는 것만으로 간단히 견제해서 떨어트릴 수 있지만, 창을 든 사람보다 더 많은 마수가 기어 올라오니 답이 없었다.
간혹가다 강력한 마수들이 올라오기라도 하면 기사들이 상대해야 하는데, 현재 방벽 위의 기사들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건 야간 경비 중이던 세 명뿐이었다.
축제를 즐기던 기사들은 근처에 있던 경비병들의 예비 장비를 받아 싸우고 있었지만 이런 무장으로는 그들의 기량을 살릴 수 없었다.
당장 영주관으로 돌아가 무장을 갖추고 오면 좋겠지만, 지금 이 전투는 빈약한 무장의 기사들이 합류함으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장을 제대로 갖추고자 돌아가는 순간 남은 소수의 기사와 병사들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마을의 일반인들이 습격당할 터.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잿나방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위를 올려다보니 한쪽만 4m에 달하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나방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방이란 누군가에게는 작은 크기로도 공포를 주는 생물일진대, 그 크기를 저렇게 키워놓으니 누구에게든 악몽이 될 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잿나방이 방벽 위의 사람들을 향해 날개를 털었다.
“얼굴을 막아!”
“아아아악!”
잿나방이 하늘을 날며 뿌린 인분에 몇몇 병사와 종자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마구 긁었다.
이 흉악한 마수의 날개에서 분비되는 가루는 점막에 들어갈 경우 끔찍한 통증과 가려움을 유발했다.
기사라고 해서 이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에 위블 역시 얼굴을 옷으로 가리며 나방의 공격 범위 밖으로 달아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잿나방의 공격이 피아를 가리지는 않는다는 것.
잿나방이 날아온 방면부터 성벽 위에 있던 마수들까지도 고통을 호소했기에 무너진 틈으로 마수들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누군가 가서…”
“조금만 더 버텨 봐! 이미 간 놈들이 있으니까 곧 오겠지!”
옆에 있던 동료 기사의 말에 위블이 소리쳐 대답하며 눈앞에 다가오던 마수, 송곳사슴과 맞섰다.
끝부분이 송곳처럼 뾰족한 뿔을 들이미는 마수의 공격에, 위블은 날카로운 부분을 피해 뿔을 붙잡은 뒤 마수와 힘 싸움에 들어갔다.
250cm에 달하는 이 거구의 기사가 온 힘을 다해 손을 잡아 비틀자 송곳사슴의 목이 우두둑 부러졌다.
“그아아아앗!”
피로를 쫓아내고자 기합을 지른 뒤 주변을 살짝 훑었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저 멀리서 불원숭이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불원숭이다!”
“빌어먹을, 종자들은 모두 물러나라! 내가 상대하겠다!”
위블은 호쾌하게 외쳤지만 내심 낭패라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평상시 완전무장 상태인 위블이라면 그대로 들이받아 해치웠겠지만, 무장이 빈약한 지금 상황에서는 위협적인 상대였다.
무기가 없으니 일격에 해치울지 장담할 수 없고, 갑옷 없이 불을 뒤집어쓰기라도 했다간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블 경!”
위블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아르센의 진에는 여러 기사의 무기가 실려 있었다.
위블의 대검, 카민의 검과 방패, 제노비아의 창, 팔라토의 투창 등.
아르센은 가장 먼저 만난 위블을 향해 대검을 던졌다.
위블은 자신의 발치에 날아와 꽂힌 대검을 뽑아, 바로 앞에 있던 마수 하나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불원숭이를 향해 돌진하며 외쳤다.
“고생했다, 꼬마!”
그 대답을 채 듣기도 전, 아르센은 벽을 따라 달리며 만나는 기사들을 향해 그들이 애용하는 무기를 던지고 있었다.
전장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현재 싸우고 있는 기사 중 제일 활약이 저조한 이는 팔라토였다.
오른팔의 부상은 제법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 무기를 쥐고 휘두르기엔 힘든 수준이라, 그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검을 들어야 했다.
명색이 기사인 만큼 자기 한 몸 지키고 주변을 지키기엔 충분했지만, 다른 기사들에 비해 훨씬 빠르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팔라토 경, 조금만 물러서시지요. 안색이 나쁘십니다.”
옆의 있던 종자의 말에 팔라토는 불편한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끈적한 피가 만져졌다.
“그래야겠군, 그럼 잠시…”
그렇게 대답하던 팔라토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방벽 너머, 어둠 속을 쏘아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겠지만 기사인 팔라토의 눈에는 흐릿하게나마 그 윤곽이 보였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터무니없이 불길한 무언가가.
“빨리, 근처에 다른 기사를 불러오게. 가능하면 무장하고 있는 친구로. 엄청난 녀석이 하나 있어.”
“아, 알겠습니다!”
종자는 그렇게 대답하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근처에 있는 기사 중 이곳을 지원할 여유가 있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쁜 지경이라, 그나마 무장하고 있는 기사가 한 명 있었지만 그 역시 위험한 동료들을 구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를 반복하고 있어 다가가 말을 거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종자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팔라토는 어둠 속을 향해 칼을 겨눴다.
“나와라-!”
그에 대답하듯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을 빚어 만든 촉수가 이리저리 뒤엉킨, 대충 자란 덩굴을 크기만 키운 것 같은 거대한 마수.
그것이 방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