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3)
22화 – 추수 축제 (3)
잘 부탁드립니다
팔라토는 아껴두었던 투창 하나를 들어 눈앞의 기괴한 마수를 겨누었다.
본래 애용하는 마법으로 강화된 투창도 아니며, 주로 쓰는 손도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왼손으로 검은 능숙하게 다루지 못할지언정 투창은 능숙하게 던질 수 있도록 훈련한 기사가 그였기에.
“하압!”
팔라토의 투창이 꿈틀거리는 마수의 촉수를 꿰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힘찬 기세로 파고드는 것도 잠시, 몇 번 꿈틀거리는 것과 함께 파고들기를 멈춘 투창이 촉수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투창이 꽂혔던 구멍에서 그대로 다시 무언가가 쏘아졌다.
“끄아아아악!”
날아온 무언가는 팔라토의 바로 옆에 있던 병사 한 명에게 박혔다.
새카맣게 변색된 그것이 반쯤 녹아내린 투창의 파편임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파편이 꽂힌 곳부터 혈관이 검게 물들며, 병사는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 아파…너무 아파…살려주…”
옆에 있던 팔라토에게 손을 뻗으며 삶을 갈구하던 병사의 몸이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투사 무기를 날리면 독을 실어서 받아치는군!’
진을 타고 제대로 된 마법 투창을 던진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투사 무기로는 명확한 타격을 주기 어렵다는 계산이 섰다.
팔라토는 즉시 검을 고쳐잡고 날아오는 투창 파편 몇 개를 쳐냈다.
덩굴 마수는 투창 파편을 날리면서도 접근해, 마침내 방벽 밑에 도달해 천천히 방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죽어서 방벽 밑에 떨어진 마수의 시체가 검은 촉수에 닿을 때마다 쉭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에게 접근하지 마라! 독이 있다!”
그때, 옆에 있던 종자가 횃불 하나를 들어 기어 올라오는 마수를 향해 던졌다.
어둠으로 빚어진 듯한 형상을 가진 적에게 빛과 불이 상극임을 바란 행동이었겠지만, 그 바람과 달리 횃불은 허망하게 촉수 사이로 잡아먹히며 사라졌다.
불꽃은 마수를 위축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자극한 듯 촉수들이 한층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횃불을 던졌던 용맹한 종자는 촉수 공격에 몸통을 관통당한 채 이리저리 휘둘러지다 저 멀리 날아갔다.
순식간에 찔러들어오는 촉수의 속도는 어지간한 기사의 일격 못지않게 흉악했다.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선 팔라토의 옆에서, 다른 종자 하나가 경악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팔라토 경! 방벽이 녹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덩굴 마수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수는 방벽을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방벽을 통째로 녹이면서 건너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팔라토는 이를 빠득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대로 무장한 기사 여러 명이 협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마수, 그리고 그 마수에게 뚫린 방벽을 따라 들어오려는 다른 마수들.
더 이상 이쪽 방벽은 유지할 수 없었다.
후퇴 명령을 내리는 수밖에.
전원 후퇴 명령을 내리고자 팔라토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지,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온다!”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완전히 중무장한 종자와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진을 탄 기사 한 명이 지붕 몇 개를 연속으로 박찬 뒤 팔라토의 앞에 착지했다.
방벽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를 달려온 아르센이었다.
아르센은 팔라토에게 그의 전용 무기인 투창 묶음과 칼을 내밀었다.
“팔라토 경, 여기 있습니다.”
“고생했네.”
투창을 받아든 팔라토는 그것을 왼손으로 뽑을 수 있도록 고쳐 매었다.
“오면서 다른 기사에게도 무기를 전했습니다. 거기다 기사들의 갑주랑 진을 실은 수레가 따로 내려오고 있으니 곧 상황이 호전될 겁니다.”
“잘 됐군, 그럼 이제…”
팔라토의 시선이 완전히 방벽을 녹인 뒤 마을을 향해 기어 오고 있는 검은 형체에 닿았다.
주변의 다른 종자나 병사들 역시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위축되었는지 섣불리 덤비지 못해, 덩굴 마수는 느리긴 해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저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겠군.”
* * *
“어서 나와라!”
“마수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당장 나와!”
“잠깐만요! 이거만 좀 가지고…”
“닥치고 빨리 나와!”
병사들은 덩굴 마수가 오고 있는 방향의 집에 들어가 있던 주민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영주관 쪽으로 올려보냈다.
물건을 가지고 간다느니 시간을 잡아먹으려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병사의 우악스러운 손찌검 몇 방이면 진압되었다.
이미 많은 동료를 잃은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온다! 물러서!”
주거지역에 들어선 덩굴 마수가 사방으로 촉수를 뻗었다.
뻗어나간 촉수는 나무로 만들어졌든 돌로 만들어졌든 가리지 않고 닿는 건물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한 호흡만 들이켜도 속이 미식거리는 역한 악취가 감돌며 건물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팔라토는 병사들이 수레로 끌고 온 자신의 진에 탑승한 채, 다른 기사 한 명과 지붕 위에 서서 마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저런 끔찍한 건 처음 보는구먼.”
“약점이 뭐지? 생긴 건 불에 약해 보이는데?”
“아니. 방금 시도하는 걸 봤는데 횃불 정도는 그냥 잡아먹듯이 없애버리더군. 오히려 자극할 뿐이네.”
“투창은?”
“받아서 독을 담아 도로 쏘더군. 마법 무기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까다로운 상대인데.”
그렇게 대답한 기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투구를 툭툭 쳤다.
“일단 정면으로 싸운다면, 나 혼자서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팔라토와 대화하고 있는 남자는 영지 최고의 기사로 여겨지는 라뮌이었다.
오늘 밤 영주의 호위 담당인 그였지만, 비상사태인 만큼 영주의 명령을 받아 조금 전 마을로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 마수는 그로서도 딱히 대책이 서지 않았다.
“자네가 힘들다면 정말 한두 명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의미겠군.”
라뮌의 직감은 단순한 감으로 치부할 수 없었기에, 팔라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민에 찬 신음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덩굴 마수는 지나치는 모든 건물을 정체불명의 부식독으로 침식시키며 전진하고 있었다.
가고 있는 방향대로라면 영주관이 나온다는 점은 둘째치고, 건축자재가 그리 흔하지 않은 벨루안 영지에서 건물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금속을 녹이니 사슬 같은 것으로 묶는 것도 방법이 안 될 거고, 난감한데.”
“테두리부터 깎아내는 식으로 공격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네.”
“그럼 바로 시작하지. 기사들!”
라뮌이 큰소리로 외치자 근처 건물의 지붕 여기저기에 올라가 있던 기사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지원군이 직접 수레로 실어 온 갑옷과 진으로 무장한 그들은, 무력했던 조금 전과 달리 용기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포위해서 공격한다! 파고들지 말고 촉수만 잘라내라!”
라뮌의 지시와 함께 기사들은 일제히 진을 몰아 덩굴 마수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마수는 눈도 귀도 보이지 않건만, 근처에 기사가 접근한 것을 감지한 것처럼 촉수를 날카롭게 뻗어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무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종자나 병사들과 달리, 기사란 그런 공격을 충분히 인식하고 반격할 수 있는 존재였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촉수가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덩굴 마수에게 있어 촉수를 잃는 것은 그리 치명적인 부상이 아닌지, 계속해서 안에서 촉수가 나타나며 재생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다 그렇게 잘린 촉수에서 뿜어진 피인지 뭔지 모를 체액조차 강력한 독을 머금고 있어 기사들은 기겁하며 몸을 피해야 했다.
다행히 이 독은 기사의 갑옷을 뚫을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라뮌은 영지 최고의 기사라는 명성이 허명이 아닌 듯, 가장 위험한 장소인 덩굴 마수의 정면에서 상대와 맞서고 있었다.
마수가 압도적인 질량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서서히 뒤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마치 앞을 내다보기라도 하는 듯 능숙하게 날아드는 촉수를 모조리 쳐내고 잘랐다.
하지만 모든 기사가 그렇게 능숙하게 마수와 맞설 수는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부주의했던 기사 한 명이 촉수에 얻어맞아 저 멀리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크윽!’
촉수 하나를 베어낸 순간 체액이 눈 쪽으로 확 튄 탓에, 아르센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간신히 체액이 눈에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갑옷에는 막힌다고 하지만 건물을 부식시킬 정도의 독이 눈에 들어간다면 기사라도 실명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어지간한 기사 수준의 공격을 연이어 뻗는 촉수와 공방전을 나누는 것은, 언제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서커스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아르센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뭐야?’
잘려 나가 떨어진 촉수 하나가 검보랏빛 액체에 닿아 버르적대며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액체가 어디서 흘러나왔나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나무로 된 통 하나가 널브러진 채 액체를 꿀렁꿀렁 토해내고 있었다.
“…포도주!”
아르센은 재빨리 통을 들어 포도주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은 뒤, 바로 옆에 있던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 올라선 뒤 마수의 머리 부분을 향해 있는 힘껏 포도주 통을 던졌다.
마수가 자신에게 날아온 정체불명의 물건을 촉수로 쳐낸 순간, 통이 박살 나며 안에 들어있던 포도주가 마수의 촉수를 적셨다.
포도주는 매서운 기세로 마수의 촉수를 녹이기 시작했다.
■■■■■■■■■■■■■—!
지금까지 소리를 낼 수 없는 생물인 듯, 기계적으로 전진하고 죽이기를 반복하던 덩굴 마수가 처음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촉수를 뒤틀었다.
바로 옆에 있던 건물 하나에 포도주를 닦으려는 듯 몸을 비비적댄 끝에 건물을 무너트릴 정도로, 마수가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방금 그건 뭐지!?”
“무슨 일인가!”
“포도주가 약점입니다! 포도주를 가져와서 뿌려야 합니다!”
“뭐? 포도주? 아니 그게 무슨…”
기사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냐는 듯 아르센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마수의 약점이야 이것저것 있지만, 술이 약점이라는 이야기 따위는 베테랑인 그들도 들어본 적 없었다.
“방금 직접 보셨잖습니까! 저 녀석의 약점은…”
“종자와 병사들은 빨리 포도주 통을 모아와라! 어서!”
아르센을 충분히 신뢰하고 있는 팔라토가 즉시 주변에 있던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축제현장이었던 만큼 아직 먹지 않은 술이 담긴 통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술통을 받아든 기사들은 반신반의하며 지붕 위로 올라가 덩굴 마수를 향해 그것을 던졌다.
종자나 병사들은 술로 꽉 찬 통을 멀리서 던질 완력이 없고, 가까이서 던지려고 했다간 촉수에 공격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마수에게 술통을 던질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이 방법이 마수를 공략하는 데 있어 어이없을 정도로 효과적인 방법임이 입증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날아드는 것을 받아칠 때마다 유해한 액체가 쏟아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건만, 마수는 본능적으로 날아오는 액체를 계속해서 쳐내며 포도주를 뒤집어쓰기를 반복했다.
마수는 비명, 포효, 절규, 무엇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괴성을 내지르며 근처에 있는 건물에 미친 듯이 몸을 들이박고 비벼댔다.
건물이 몇 채나 무너지며 가끔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음을 확신한 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계속 술통을 던졌다.
그렇게 인근에 있는 술통을 모조리 동원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마침내 마수는 꺼질 듯한 신음과 함께 대지에 몸을 눕혔다.
“해치웠다!”
“마무리 지어!”
대형 마수를 사냥하는 데 쓰는 4m짜리 장창을 가져온 기사들이 녹아 문드러진 촉수 안쪽을 푹 찔렀다.
움직임을 멈춘 마수의 촉수를 칼과 도끼 같은 물건으로 쳐내고 나니, 안에는 거대한 뇌 같은 본체가 회백색 액체를 흘리며 반쯤 문드러진 상태였다.
술을 뒤집어쓰기 전까지만 해도 절대 막을 수 없을 듯한 기세로 영지를 휘젓던 마수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
죽은 마수의 시체 위에서 기사 둘이 푸념했다.
“세상에, 내 태어나서 이렇게 끔찍한 괴물은 처음이야.”
“영지 내에서 싸워서 다행이지, 밖에서 만났으면 도망치는 것밖에 답이 없었겠군.”
“방벽 쪽은 어떤가?”
“그쪽은 끝난 지 꽤 됐네. 우리 쪽이 문제였지.”
가장 열성적으로 술통을 던져댄 탓일까, 아르센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에 진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엎드려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진을 몰고 다가온 다른 기사가 말을 걸었다.
투구를 벗자 가느다란 눈에 매부리코를 한 30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라뮌이었다.
“대단히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아르센 경.”
라뮌의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칭찬에 아르센은 간신히 몸을 들어 올린 뒤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평상시라면 좀 더 예의를 갖춰 대하련만, 정말 탈진 직전에 몰린 탓에 그러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라뮌 역시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편은 아닌지 이를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전투에 있어 단순한 강함이란 건 시시한 문제야. 그대처럼 항상 참신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적을 찌를 수 있는 이가 진짜 강자지.”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어조였지만, 그 내용은 평소의 라뮌을 아는 이라면 깜짝 놀랄 정도의 극찬이었다.
라뮌은 칭찬에 매우 인색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아르센은 바싹 마른 목을 억지로 침을 넘겨 적셔 입을 열었다.
“…칭찬 . 라뮌 경.”
“그대를 눈여겨보도록 하지.”
마냥 호의만 담긴 것 같지는 않은, 의미심장한 말투로 여운을 남긴 라뮌이 지나가자 다른 사람들이 아르센을 보며 말했다.
기사와 종자들 역시 이 방법을 처음 제의한 자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네! 이 마수는 반쯤 자네가 잡은 거나 마찬가지야!”
“경의를 표합니다. 아르센 경.”
쏟아지는 칭찬과 환호 속에 아르센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맥 너머로, 희미하게 햇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강대한 마수의 약점을 찌른 ‘술통 기사’에 대한 찬가가 무너진 마을 한복판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