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8)
27화 – 운석 추락
잘 부탁드립니다
서임식 축제는 순식간에 막을 내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임식에 참여했던 행정관과 기사, 그리고 참여하지 않은 이들까지 모두가 호출을 받아 대회의실로 모였다.
최대한 빠르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집한 덕에 가신들은 순식간에 모였다.
“모두 모였나?”
“예, 영주님.”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찬 대회의실에서, 누트 영주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우선 이번에 서신을 가져온 일렌 성채의 친구에게서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지.”
영주의 바로 앞에는 조금 전 온몸을 피로 적셨던 남자가 서 있었다.
가신들이 모이는 동안 잠시 씻고 의복을 정제하고 왔는지, 갓 왔던 무렵에 비하면 훨씬 깔끔해진 상태였다.
“영주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라실의 아들 비즈타입니다. 일렌 성채에서 종자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설명해보도록 하게. 서신의 내용에 대해.”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 모두의 주목을 받는 종자는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침을 한번 삼켜 마른 목을 적신 그가 입을 열었다.
“9일 전, 성채 남쪽에 거대한 운석이 발견됐습니다. 성주께서 말씀하시길 색으로 보아 대량의 흑성철(黑星鐵)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습니다.”
종자의 말에 회의실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흑성철은 기사의 무기와 갑옷에 사용되는 검푸른 색의 금속으로, 그 강도나 항마력에 있어 따를 것이 없는 최고의 금속이었다.
영지에 있는 광산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으며, 오로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에서만 얻을 수 있기에 가장 희귀한 금속이기도 했다.
“일렌 성주…루다스 경이었지, 루다스 경은 운석을 성채 내로 회수했나?”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운석의 크기가 어지간한 집보다 큰 수준에다 땅에 깊게 박혀 있어서,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종자가 마른기침을 하자 옆에 있던 행정관이 물잔을 건네주었다.
물을 쭉 들이켜고 감사를 표한 종자가 말을 이었다.
“거기다 운석이 떨어진 위치가 남쪽 영지와의 경계선 사이여서, 일단 영주님께 보고부터 드려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져 저와 동료 네 명이 보고하고자 서신을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오던 도중 저 말고는 전부 마수에게 그만…”
“유감을 표하네.”
영주가 어깨를 탁탁 두드려주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종자의 두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영주는 턱수염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흑성철이란 영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력인 기사의 무장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군사자원.
현재 영지에 있는 기사들의 무장은 긴 세월 동안 흑성철을 모으고 모아 완성된 것이었으며, 안 그래도 벨루안 영지는 몇 년 전 기사 한 명의 전신갑주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다.
운반하기 힘들 정도로 큰 운석에서 나올 흑성철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이 친구 말대로라면 즉시 파견대를 보낼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마법사도.”
현 벨루안 영지의 기술력으로는 그렇게 거대한 운석을 꺼내고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
영지병 수백 명을 동원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가는 영지 내의 치안과 경계가 완전히 마비될 터.
거기다 영지 밖, 야생에서 수백 명이 모여있을 경우 몰려들 마수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흑성철을 정제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운석에서 흑성철을 따로 빼내는 것이 가능했다.
“일단 영지의 기사 중 사람과 싸우는 데 능한 여덟 명, 그리고 종자 서른 명을 모으도록 하겠다. 마법사는…루덴 경?”
“말씀하십시오, 영주님.”
“흑성철을 정제해 빼내는 것이 특별히 힘든 일인가? 엘로이즈는 불가능할 정도로?”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한 작업이라 크기가 크면 마력이 많이 들 뿐입니다. 아가씨는 경험과 기술이 조금 부족할 뿐, 마력 면에서는 이미 저보다 나은 마법사라 할 수 있고요.”
대회의실 구석, 검은 로브를 쓰고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루덴이 답했다.
그 대답에 영주가 잠시 고민하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흑성철을 뽑아내는 작업은 자네보다 엘로이즈가 더 나을 거란 의미인가?”
영지의 마법사 두 명 모두를 보내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도박이었다.
따라서 둘 중 한 명을 보낸다면 더 빠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터.
아버지로서 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만, 영지의 주인은 나약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됐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루덴의 대답에 아주 잠시 고뇌에 찬 표정을 짓던 영주가 표정을 고쳤다.
그 짧은 순간, 영주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계산이 오갔다.
루덴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 아직 젊은 엘로이즈의 가능성, 현재 상황, 미래…짧은 고민 끝에, 결론이 도출됐다.
“그럼 마법사는 엘로이즈를 파견하도록 하지. 지휘는 라뮌 경, 그대에게 맡기겠다. 내일 바로 출발하도록. 추후 일렌 성채로 보급대를 추가로 파견할 테니, 식량과 물은 그곳에서 보급받게.”
라뮌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이에 답한 후, 질문을 던졌다.
“아타르 영지에서도 회수를 위해 병력을 파견할 가능성이 높은데, 어떻게 처신하면 되겠습니까?”
아타르는 벨루안의 남쪽에 있는 영지의 이름이었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워 자주 교류하는 북쪽 영지와 달리, 아타르 영지는 도마뱀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보름 이상이 걸릴 정도로 거리가 멀어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일렌 성채는 벨루안 영지에 속한 성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곳이며 거기서 더 남쪽에 운석이 떨어진 만큼, 그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생길 여지는 충분했다.
“가능하면 충돌하지 않고 빠르게 회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지거나 큰 피해를 볼 것 같다면 물러서고, 이길 수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공격해서 격퇴하게. 외교적인 분쟁은 신경 쓸 필요 없네.”
* * *
기사들끼리 남아 누구를 파견할지, 그리고 어떻게 조직을 짤지 한참 상의하고 나오니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유난히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아르센은 마법사의 탑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접니다, 루덴 경.”
여느 때처럼 문이 열리고, 안에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기색인 루덴과 열심히 짐을 싸고 있는 엘로이즈의 모습이 보였다.
“들어오게.”
“아, 왔어? 잠깐만. 이거도 챙기고, 그리고…”
루덴은 문을 열어주고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읽고 있던 책을 펼쳤다.
그 덕분에 엘로이즈가 짐을 챙긴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되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이 챙겨서 들고 다닐 수는 있겠어?”
마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자루는 어른 몸통보다도 큰 사이즈였음에도 불구하고, 터지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물건이 꽉 들어찬 상태였다.
아르센의 지극히 합당한 지적에, 엘로이즈는 슬쩍 자루에 집어넣었던 물건을 꺼냈다.
“아니, 그래도 이건 필요하지 않을까?”
엘로이즈가 들어 올린 물건은 금속으로 된 동그란 통이었다.
아르센은 그것을 보며 잠시 군대에서 쓰던 옛날 수통을 떠올렸다.
“그게 뭔데?”
“물을 정화해주는 물통. 혹시 낙오되면 이게 있어야 물을 마실 수 있잖아.”
“도대체 왜 낙오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르센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엘로이즈는 다시 그 물건을 넣고 낑낑거리며 끈을 묶어 입구를 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덴이 말했다.
“어차피 무게를 가볍게 하는 마법을 걸면 들고 다니긴 어렵지 않을 걸세.”
그렇게 말하는 루덴은 묘하게 피곤한 기색이었다.
“루덴 경. 잠시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왜?”
옆에 있던 엘로이즈가 반문하자 아르센은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쳤다.
“아, 하지 말라니까.”
“잠깐 남자끼리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가씨는 잠시만 빠져 주라.”
“뭐라는 거야?”
투덜대듯 말하면서도 엘로이즈는 더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고 여행용 자루를 정돈하는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생각에 잠긴 듯, 혹은 조는 듯 묘하게 활기 없는 태도를 취하던 루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엘로이즈를 안에 두고 탑 밖으로 나왔다.
“그래, 하고 싶은 얘기가 뭔가?”
“제가 착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회의 때 루덴 경이 유난히 엘리를 대신 내보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이 느껴져서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루덴이 슬쩍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느꼈나?”
“네.”
그냥 ‘엘로이즈도 흑성철을 추출할 수 있다’까지만 대답했으면 모를까, ‘더 빠르다’고 언급한 루덴의 태도는 일견 노골적이기까지 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
영주 역시 루덴의 말에서 그런 느낌을 읽었는지 재차 질문하지 않았던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네. 저 아이는 이제 진짜로 나보다 뛰어난 마법사야. 물론 내가 좀 더 능숙하고 경험이 많긴 하지만, 그걸 빼면 마력이나 기술이나 뒤처지지 않지.”
“그 이유만으로 엘로이즈를 대신 보내겠다는 건 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아르센은 슬쩍 입가를 비틀며 루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잠시 눈을 마주친 채 정적이 흐르고, 마침내 루덴이 압박을 이기지 못한 듯 슬쩍 눈을 피했다.
“그래, 젠장. 솔직히 말하지. 한때 그 영지에 정착하려고 했었네. 그놈들이 꽤 친절한 태도로 접근했었거든. 하지만 안에 들어가서는 바로 약을 탄 음료를 대접하더군. 도망치는 과정에서 영지에 피해를 좀 많이 줬어. 아마 내가 거기 갔다가 놈들과 마주친다면 운석 문제보다 훨씬 큰 외교적 문제가 될걸세.”
“왜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겁니까?”
“내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영지에 큰 피해를 줄 능력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법사는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지식 있는 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상식으로 통했다.
상당히 수준 높은 마법사라 해도 기사의 갑주와 항마력을 뚫을 정도의 주문은 꽤 오랜 시간 집중해서 시전해야 하고, 그 시전한 주문을 정확히 맞추기까지 해야 한다.
그 시간이면 기사는 마법사를 열 번은 죽이고도 남았다.
이는 인근 영지를 통틀어 최고 수준의 마법사라 자칭하는 루덴조차 예외가 아니었고, 루덴이 활동하는 데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혹시 루덴이 날뛰거나 사악한 술수를 부려도 기사 중 아무나 나서서 제압하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이.
“환영과 현혹, 공간 왜곡 주문으로 기사들을 피하면서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겠다고 영지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지. 아마 못해도 영지의 일 할은 넘게 태웠을걸세.”
그 정도면 몇 년 전 영지를 습격했던 덩굴 마수가 끼친 피해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타르 영지의 규모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백 명 이상이 죽거나 집을 잃었으리라.
그 정도면 아타르 영지 쪽에서 루덴을 보자마자 죽이겠다고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눈을 뽑는 이유는 공격마법을 쓰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지.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접촉형 마법밖에 쓸 수 없으니까. 마법은 써먹어야 하니 손목 중 하나는 남겨놓거나 둘 다 남겨놓고, 걸어다니게 둘 필요는 없으니 발목은 자르고.”
루덴이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염병할 놈들이 먼저 내 눈을 뽑으려 들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쪽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네.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던 일반인들에게 불을 뒤집어씌운 건 나니까.”
아르센은 루덴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유를 듣고 나니 더 이상 추궁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아마 놈들은 마법사에게 적지 않은 원한이 있을 테니, 절대 엘로이즈를 놈들과 함께 두지 말게. 가능하면 아예 드러나지 않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산 너머로 노을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늙은 마법사와 젊은 기사는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기다리던 엘로이즈가 안에서 부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