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1)
30화 – 운석 분쟁
잘 부탁드립니다
일렌 성채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원정대는 운석을 향해 남하했다.
성주인 루다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종자와 병사들까지 합세하여 규모를 키운 원정대는 추출한 흑성철을 옮길 수레와 이를 끌 짐도마뱀을 포함했기에 그 속도가 매우 느려져 있었다.
거기다 하필이면 비가 내려, 땅은 물을 머금어 질척이며 가뜩이나 느려진 속도를 더더욱 느려지게 했다.
쏟아지는 비를 막고자 다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견디기엔 상당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아르센은 앞에 앉은 엘로이즈의 검은 로브를 타고 빗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로브가 천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빗방울은 조금도 스며들지 않고 그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법은 정말 편리하네.”
“너도 걸어줄까?”
“어차피 갑옷 안으로는 빗물 안 들어와. 그나저나 계속 비가 오면 곤란한데…”
습도가 높아진 탓인지 하얀 입김이 뿜어지는 것이 보였다.
겨울이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비까지 쏟아지는 만큼, 몇몇 병사들이 이빨을 따닥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기온이 낮아지고 있었다.
“춥진 않아?”
“난 괜찮아. 방한마법도 걸었거든. 센은?”
“나야 당연히 괜찮지. 아마 기사들은 문제가 없을걸…병사들이 문제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수가 전혀 꼬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몇 시간 정도를 이동한다면 마수 서너 마리는 만날 법도 하건만, 비가 시야와 소리, 냄새를 모두 가린 덕분인지 아무 충돌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다들 밖에서 활동하는 데 이력이 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탈자 없이 행군이 계속됐다.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났다 싶을 무렵, 선두에 있던 팔라토가 손을 들어 행렬을 정지시켰다.
팔라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중앙에 있던 라뮌이 그런 팔라토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팔라토.”
“아무래도 우리가 한발 늦은 거 같군, 라뮌.”
“뭐가 보이길래?”
“남쪽 놈들일세. 이미 채취를 시작한 거 같아.”
팔라토의 눈은 쏟아지는 장대비와 안개를 꿰뚫고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아주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바위와 그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은 식별할 수 있었다.
“적의 수는? 기사는 몇 명이지?”
“기사는 아마도…여덟 명. 유난히 키가 작은 기사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인 거 같군. 그 외에는 오십 명 정도 있는 거 같네. 굉장히 많이 데려왔군.”
“애매한데.”
이쪽은 기사가 아홉 명이긴 하지만 종자와 병사들의 수가 부족했다.
기사가 단독으로 종자들과 싸우는 경우에야 일방적으로 학살이 가능하지만, 기사끼리 싸우는 도중 옆에서 방해받는 것은 의외로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결국 기사도 머리 하나에 팔 두 개 달린 인간일 뿐이니까.
그냥 물러서기엔 아쉽고, 그렇다고 공격하기엔 상대가 너무 강했다.
라뮌이 고민하고 있을 때, 팔라토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런, 저쪽에서도 우릴 간파한 거 같네. 진형을 갖추고 있군.”
“너와 비슷한 특기를 가진 기사가 있는 건가?”
“아마도.”
거리가 꽤 멀었기에 기습의 이점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깊이 한숨을 내쉰 라뮌이 명령을 내렸다.
“좋아, 일단 전진한다. 어디 한 번 이야기나 해 보도록 하지.”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아르센은 진을 주저앉힘과 함께 엘로이즈의 등을 톡 쳤다.
“어, 왜?”
“이제 슬슬 내려가서 병사들 사이에 서 있어. 내 옆은 너무 눈에 띄니까.”
가뜩이나 진을 타고 있는 기사들은 원정대 내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인데, 그중 한 명이 검은 로브를 입은 소녀를 앞에 앉혀놓기까지 했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주목하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엘로이즈를 직접 주목한다면 누구나 그녀가 마법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아르센은 루덴의 충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엘로이즈는 순순히 답하며 진에서 내려 옆에 있는 병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병사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았지만, 엘로이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르센은 그 사이에서 유난히 키가 큰 병사 두 명을 지목했다.
“거기, 덩치 큰 금발, 그리고 주근깨. 너희 둘은 아가씨를 잘 가려서 저쪽 놈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지목받은 병사들이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르센이 혀를 한 번 차자 재빨리 자세를 고치며 엘로이즈의 앞에 섰다.
둘 다 180cm가 훨씬 넘는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근육질 체구라, 엘로이즈도 여자치고 제법 큰 키지만 그 뒤에 있으니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침 덩치가 큰 덕인지 둘 다 대형 방패를 든 방패병이라서 유사시 경호원 역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찜찜한 표정으로 버티고 선 두 병사를 보며 아르센은 흡족하게 웃었다.
“좋아. 계속 그러고 있어.”
* * *
빗방울 사이를 뚫고 수십 미터 거리에 접근해서야, 아르센은 아타르 영지의 병력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벨루안 영지처럼 종자들은 가죽 갑옷을 입었지만 주로 어두운 계통 색상의 가죽을 입는 벨루안 영지와 달리 밝고 옅은 색상의 가죽을 많이 사용했다.
종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타고 있는 기승수는 벨루안의 기름도마뱀과 달리 늑대 비슷한 종류였다.
다리 관절 앞에 스파이크 같은 것이 박혀있고 꼬리가 얇고 긴 것이 특징이었다.
기사의 갑옷과 진 역시 생김새가 조금 달랐다.
벨루안의 기사가 갑옷 전체를 흑성철로 통일한 데 비해, 아타르는 마수의 뼈를 부분적으로 배치해 금속을 아낀 듯한 양식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또한 벨루안의 진이 네 발로 걸어 다니는 랩터를 연상시킨다면, 아타르의 진은 늑대의 몸에 뱀의 머리가 달린 것 같은 기묘한 형태였다.
‘저건 뭐라고 불러야 하지? 늑대뱀?’
벨루안 영지의 병력이 접근하자 아타르 진영에서 투구를 벗은 기사 한 명이 진을 타고 걸어 나왔다.
서른 살 정도 되었을까, 짙은 갈색 머리를 말총머리처럼 묶은 각진 인상의 남자였다.
기사는 정중한, 그러면서도 조롱하는 것 같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벨루안 사람들에 비해 거칠고 억센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에서 온 형제들이로군! 나는 아타르의 기사, 일멘의 아들 바타얀이다.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나?”
“언제부터 이곳이 아타르 영지의 영역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뭘 믿고 당당하게 우리 영지에 떨어진 운석을 도둑질하고 있는지, 그 이유부터 해명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라뮌의 차가운 대꾸에 바타얀이라 자신을 소개한 기사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 무례한 태도에 다른 기사들이 발끈해 무기에 손을 얹었지만 라뮌은 마치 등 뒤가 보이는 사람처럼 바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한참 웃음을 터트리던 바타얀이 이를 멈출 때까지, 라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릿발 같은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우습지?”
“누가 봐도 여기엔 우리가 먼저 와 있지 않았나. 도둑질하러 온 사람이 오히려 주인을 도둑으로 매도하니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부터 당신들이 성채 남쪽을 자신의 영역이라 주장했지? 이곳 성주에게 듣기로는 이 근처에서 지난 십 년간 당신들 얼굴을 본 적이 없다던데. 일 년에 한 번은 얼굴을 비춰놓고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게 맞지 않나?”
바타얀의 말에 라뮌은 고개를 돌려 루다스를 보았다.
본래 이 구역 역시 일렌 성채의 성주가 정기적으로 순찰해야 하는 구역 중 하나였고, 그랬다면 마주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에 맞춰 루다스가 재빨리 소리쳤다.
“저, 저도 이 근방으로 매번 순찰을 나왔지만 저 놈들을 본 적 없습니다! 놈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루다스의 말에 바타얀이 코웃음을 치며 뒤쪽을 향해 턱짓하자 다른 기사 한 명이 천천히 진을 몰아 걸어 나왔다.
앞으로 나온 기사가 비아냥대는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이 근처에서 가장 잘 잡히는 마수가 뭐지? 이곳에서 목격되는 마수가 아닌 동물을 본 적 있나? 인근에 약탈자 소굴은 몇 개 있지?”
“어? 어…아니, 잠깐.”
난처한 표정으로 어물거리는 루다스의 얼굴을 본 라뮌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계속 우기기에는 루다스가 너무 얼빠진 태도를 보여 명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벨루안과 아타르의 합의 내용에 따르면 남쪽 엑센 협곡까지는 우리의 영토다. 60년 전 너희 영주인 에센타가 직접 이에 서명하기까지 했지.”
“유감스럽게도 우리 영지의 영주 가문은 15년 전에 바뀌었는데. 당신 거짓말이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혹시 진짜더라도 지킬 의리는 없는 거 같군.”
“영주 자리는 계승하면서 계약은 파기하겠다? 어린아이 소꿉놀이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텐데, 명예란 걸 알긴 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야.”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을 때 빚도 함께 빼앗아 갚아야 하나? 현 영주님은 영주 자리를 물려받으신 게 아냐, 나약한 전 영주로부터 쟁취하신 거지. 그리고 우리 영주님께선 이 곳을 우리 영지의 영역이라 선포하셨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바타얀의 태도에 라뮌의 얼굴에 핏대가 솟아났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가 노여워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뒤에 있던 팔라토가 라뮌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고개를 젓자, 라뮌이 한숨을 쉬며 몇 걸음 물러섰다.
팔라토는 침착하고 고요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솔직하게 말해보세. 원하는 게 뭔가? 이대로 충돌하는 건 자네들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을 텐데.”
“지금 내가 겁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군?”
“자네를 모욕할 의도는 없네. 자네는 충분히 용맹하고 강력한 기사처럼 보이거든. 그런 만큼 우리가 서로 맞붙는다면 양쪽 모두 큰 피해가 생길 터. 우리는 같은 사람 아닌가? 기사의 힘은 마수와 약탈자에게 써야 할 것이지, 같은 인간에게 힘을 휘두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면서 합의점을 찾는 게 좋지 않겠는가.”
“뭐, 그야…”
라뮌을 상대로는 강경하게 나왔던 바타얀이지만, 팔라토가 전혀 발끈하지 않고 친절한 어조로 일관하자 다소 김이 샌 것 같은 기색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팔라토는 아이를 달래듯 사근사근한 투로 제안했다.
“일단 진에서 내리지. 앉아서 좀 더 차분히 대화를 나누자고. 괜찮겠나?”
“음…뭐, 좋아. 그러자고.”
머뭇거리던 바타얀은 팔라토가 먼저 진에서 내리자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진에서 내렸다.
바로 뒤에는 라뮌과 아타르 쪽 기사 한 명이 각각 진을 탄 채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버티고 선 상태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경하게 소유권을 주장했던 라뮌과 달리, 팔라토는 아타르 영지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현재 상황상 벨루안에선 절대 물러설 수 없음을 밝히고 극단적인 충돌이 아닌 적당한 합의점을 도출하자는 식으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끌었다.
설명, 요구, 협상이 끝난 뒤 팔라토가 돌아오자마자, 라뮌은 매서운 어조로 루다스를 추궁했다.
“말 좀 해보지, 루다스 경. 아타르 놈들을 본 적이 없다더니 놈들은 이미 와서 광석을 캐가려는 중이고, 이 근처에 어떤 마수가 사는지도 모른단 건 그냥 남쪽 순찰을 안 했단 의미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그게…죄송합니다. 다른 곳을 도느라 시간이 없다 보니.”
“술 퍼먹고 자느라 시간이 없었겠지. 굳이 변명할 필요 없네.”
평상시에는 순찰 따위 제껴두고 놀다가, 어쩌다 운석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가 운석을 찾은 뒤 보고한 것이 뻔했다.
루다스의 어설픈 변명을 차갑게 끊은 라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던 기사 한 명이 팔라토와 라뮌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물러나겠다고 합니까?”
“결투를 제안하더군. 양쪽의 기사가 각각 다섯 명씩 나와서 일대일 결투를 벌여서, 더 많이 이긴 쪽이 운석을 차지하자는 걸로.”
“놈들이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그냥 충돌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일단 결투를 통해서 우리 쪽 기사가 적 기사를 무력화하거나 죽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우위를 차지하는 셈이니.”
팔라토의 말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기사의 수가 더 많으니 일견 불리한 제안일 수도 있지만, 벨루안 영지의 기사는 모두 대인전에 능한 달인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충돌 없이 운석을 차지할 수 있으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팔라토의 말대로 결투에서 이겨 상대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이득일 터.
라뮌이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다른 기사들의 의견도 들어보지.”
“동의합니다.”
“저 역시.”
“절 내보내 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나서는 가운데, 아르센은 한 걸음 물러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뮌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좋아. 결투를 받아들이지. 일단 첫 번째는 아문드 경, 두 번째는 라티아 경, 세 번째는 팔라토 경, 네 번째는 아르센 경, 다섯 번째는 내가 맡는 걸로 하겠다.”
“저 말씀이십니까?”
“우리 영지에서 나 다음으로 잘 싸우는 기사 아닌가.”
라뮌의 덤덤한 칭찬에 아르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한 시간 후 결투를 시작하니 준비하라는 지시에, 결투에 참여하는 기사들은 물론 참여하지 않는 기사들 역시 자신의 무기를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