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3)
32화 – 결투 (2)
잘 부탁드립니다
가마에서 내린 마법사의 모습은 기괴했다.
대충 두른 로브는 허름하고 더러웠으며, 두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그를 대신해 구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두 팔을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딱 붙도록 수갑 같은 것으로 구속해 놓았는데, 채워놓고 얼마나 오랫동안 풀어주지 않은 것인지 어깨 골격이 뒤틀린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피부는 잘 씻지 않아서인지 버짐이 핀 것은 물론, 생긴 지 오래 된 것 같은 흉터가 지렁이처럼 이어져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이 나무 막대기로 마법사를 툭툭 밀며 마치 돼지를 몰듯 인도했다.
이에 따라 움직이는 마법사는 다리 힘줄을 잘리기라도 했는지,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비틀대며 나아갔다.
“이리로, 자.”
다친 기사의 앞에 서자 병사가 마법사의 무릎을 쿡 찍었다.
마법사는 훈련받은 개처럼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다친 기사의 몸에 손을 대었다.
바타얀이 윽박지르듯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빨리 치료해라.”
“아, 알겠습니다, 주인님…”
험악한 재촉에 마법사는 채찍에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하며 답했다.
이윽고 마법사의 두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와 다친 기사의 몸을 뒤덮었으며, 동시에 옆에 있던 기사가 다친 기사의 배에 꽂혀있던 투창을 뽑았다.
출혈이 심해지는 것도 잠시, 곧 잘려 나간 팔과 배에서 흐르던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건너편에 서 있던 벨루안 영지의 기사들 역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라뮌과 팔라토가 심각한 얼굴로 의견을 나눴다.
“치유마법이군.”
“저런 게 있으면 결투를 계속할수록 불리할 텐데.”
팔라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한 라뮌이 아르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그렇지…아르센 경. 아가씨는 치유마법엔 그다지 조예가 없으신 걸로 아는데, 맞나?”
아르센은 라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맞습니다. 아예 못 쓰시는 건 아니지만, 루덴 경이 치유마법을 못 쓰셔서 제대로 배우신 적이 없다 보니…”
“고민 좀 해 봐야겠군. 일단 조금 전 싸운 상대는 팔을 잘린데다 피도 많이 흘렸으니 전력에서 제외해도 되겠지만, 저 정도 치유능력이라면 가벼운 상처쯤은 간단히 회복할 수 있겠어.”
이후 벨루안 영지의 기사들은 작게 속삭이며 의견을 나눴다.
이대로 계속 결투를 이어나갈 경우,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지 못한다면 치유마법으로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치유능력을 쓸 새도 없이 난전으로 유도하는 쪽이 유리하다.
하지만 정면 대결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했다. 일단 기사로서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은 둘째치고서, 이들 모두 영지 내에서도 정예로 뽑힌 기사들이기에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거기다 지금 남은 기사 두 명은 모두 상대에게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줄 정도의 강자이기도 했고.
싸우게 된다면 일단 두 번의 결투를 마치며 상대의 수를 더 줄이고 싸우는 쪽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강세였다.
그 쪽이 실리는 물론, 명분 역시 챙길 수 있었다.
토론 끝에, 코를 한 번 씰룩인 라뮌이 아르센을 보며 말했다.
“아르센 경, 이길 거라 믿겠다.”
“이기겠습니다.”
“좋아, 가라. 그리고 가능하면 확실히 죽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아르센은 진을 몰고 나아갔다.
이를 본 상대 진영에서도 긴 대검을 든 기사 한 명이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레녹의 아들 아르센.”
“일멘의 딸 라시카다!”
처음에는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냥 다른 기사들에 비해 조금 호리호리한 체형인가 싶었지만, 가늘고 높은 목소리는 명백히 여성의 그것이었다.
벨루안의 십수 명이 넘는 기사 중 여기사는 단 두 명뿐이었기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자?”
“왜, 여자가 상대라서 불만이냐?”
“아니, 우리 영지에도 뛰어난 여기사가 있는데 여자라고 무시할 리가.”
약간 발끈한 목소리로 말하던 여성 기사였지만, 아르센의 담담한 대꾸에 괜히 과민반응한 것이 겸연쩍어졌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도 잠시, 기선을 제압하고자 괜히 아르센의 목소리를 트집 잡으려 들었다.
“목소리를 듣자니 아직 나이가 어린 거 같은데, 너희 영지는 너 같은 애송이를 내세울 정도로 인재가 없…!”
도발을 하려던 여성 기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드는 아르센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르센은 굳이 멍하니 서서 상대의 말을 들어줄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에, 즉시 진을 몰아 돌진하며 상대의 목을 노리고 검을 찔러넣었다.
괜히 말을 하느라 한 호흡을 빼앗긴 여성 기사는 이를 악물며 찔러오는 검을 막았다.
마력을 머금어 강도가 높아진 두 검이 마주침과 함께, 불꽃이 느릿하게 튀어 올라오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아르센은 그대로 달리던 가속력을 이용, 상대를 왼쪽으로 지나치며 진의 오른쪽 앞발로 옆구리를 길게 긁었다.
상대가 불의의 공격에 몸을 주춤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려 가로로 검을 휘둘렀다.
여성 기사 역시 네 번째 순번으로 나올 정도의 실력자답게 검을 휘둘러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그 느릿한 과정을 모두 목격하고 있는 아르센으로선 당해줄 이유가 없었다.
두 검이 닿기 직전, 아르센의 대검은 마치 뱀이 기듯 상대의 검을 타고 올라가 투구를 가볍게 그었다.
투구가 쪼개지며 짧게 친 갈색 단발머리가 흘러나옴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크윽!”
여성 기사가 재빨리 허리 어딘가에 수납되어 있던 단검을 뽑아 던졌지만 아르센은 살짝 고개를 꺾는 것으로 간단히 공격을 피해냈다.
초월적인 반사신경을 활성화할 수 있는 그에게 있어, 투사체 공격이란 것은 음속 이상으로 날아오거나 한 번에 수백 개가 날아오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단검을 던지느라 생긴 빈틈을 노려 아르센은 한 번 더 칼을 휘둘렀다.
여성 기사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 피한 덕분에, 이번 공격은 왼쪽 옆구리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조금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린 그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설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조금 전, 아르센은 얼굴을 깊게 긁어내거나 왼쪽 옆구리를 베어낼 수 있었지만 일부러 공격을 조금 절제했다.
승부가 확실하게 갈렸다고 느낀 상대가 항복을 선언한다면 죽일 수 없으니까.
현 상황상 아르센이 그냥 이기는 것만으로는 큰 이득이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상대를 재기불능 수준으로 무력화하거나 죽이는, 확실한 일격을 날릴 수 있을 때까지 상대를 끌어들여야 했다.
“큰소리치던 거에 비하면 솔직히 별 거 아닌데?”
아르센은 비아냥대는 기색도 없이, 마치 사실을 이야기하는 듯한 어조로 도발을 날렸다.
이 태도는 뜻밖에도 대놓고 도발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상대를 자극했다.
대놓고 이죽거린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냐 싶겠지만, 오히려 감정을 절제한 투로 말하니 진심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아르센에게도 들릴 정도로 이가 뿌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이번에도 큰소리칠 수 있나 보자-!”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거칠게 포효한 여성 기사가 대검을 높이 들어 내려찍는 자세로 달려왔다.
차분히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이 찌르기로 반격하려던 순간, 여성 기사가 타고 있던 진이 몸을 옆으로 휙 날리며 찌르기의 궤도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뱀 머리 부분이 쭉 뻗으며 다가왔다.
‘또 개싸움 작전으로 가시겠다?’
첫 전투 때처럼, 진끼리 엉켜 넘어지게 하는 수법을 쓰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흥분하여 시야가 좁아진 탓에 맥없이 당했던 아문드와 달리, 아르센은 가속된 세상 속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아르센의 진이 몸을 옆으로 기울여 몸통을 감으려는 상대의 목을 피했고, 그와 함께 아르센은 자신의 발로 뻗어오는 상대 진의 목을 걷어참으로서 공격을 해결했다.
그와 동시에 아르센은 여성 기사가 휘두른 내려찍기 역시 적절히 경사를 이용해 받아내며 반격했다.
여성 기사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거의 우격다짐으로 검을 휘둘러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이에 집중한 탓에 아르센의 진이 두 앞발을 이용해 자신이 타고 있는 진의 목 부분을 찍어누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보통 기사들이 무기와 진을 동시에 이용해 싸운다지만 둘 중 한쪽에 집중하면 다른 한쪽은 소홀해지는 것이 정상.
하지만 월등히 빠른 사고속도를 유지하는 아르센은 다른 기사들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었고, 당연히 신경이 분산되는 정도 역시 훨씬 덜했다.
베테랑 기사 중에서도 이 정도로 무기와 진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아니,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아르센의 초월적인 반사신경을 알 수 없는 상대로서는, 그저 괴물 같은 기량이라고밖에 느낄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뇌가 두 개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여성 기사는 터져 나올 것 같은 경악을 삼키며 아르센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타고 있는 진이 완전히 제압당한 탓에 공격 자체가 무게중심이 어긋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런 어설픈 공격은 피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아르센은 날아오는 검을 정확히 손등 부분으로 받아쳐 튕겨냈다. 일정 수준 이하의 힘과 속도가 담긴 공격이라면 이렇게 맨손으로도 처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펼쳐진 말도 안 되는 기예에 순간 여성 기사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어렸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이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 아르센의 대검이 그녀의 목을 파고들어 혈관과 척추, 살점과 근육을 모조리 가르며 뚫고 나왔다.
여성 기사의 머리가 허무하게 허공을 날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머리를 잃은 육체가 힘없이 진에서 떨어져 진흙탕 위를 나뒹굴며, 흐르는 피가 빗물에 섞여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르센은 잠시 넋을 잃고 이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이군, 보통 사람을 죽이는 건.’
그동안 약탈자나 마수는 많이 죽였지만, 진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처음 약탈자를 죽였을 때 괴로워했던 것이 예방 주사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죽인 약탈자들로 인해 무뎌진 것인지.
아르센은 제대로 된 첫 살인이 생각보다 충격이나 불쾌감이 없는 것을 인간성의 상실로 보고 슬퍼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 무의미한 상념은 뒤쪽에서 터져 나온 환호에 의해 끊겼다.
“좋았어, 최고다! 아르센 경!”
“대단하십니다!”
벨루안 진영에서의 이런 목소리와 별개로, 아타르 진영에서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 무거운 침묵만이 깔렸다.
이내 한 명의 기사가 천천히 진을 몰아 걸어 나왔다.
아타르 진영의 대표 역할을 하던 기사, 바타얀이었다.
바타얀은 진에서 내려, 나뒹구는 여성 기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탄식했다.
“라시카…가여운 녀석.”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조금 전 죽인 기사가 자신을 일멘의 딸이라 소개했음을 떠올렸다.
눈앞의 이 기사 역시, 자신을 일멘의 아들 바타얀이라 소개했었다.
“동생이었습니까?”
“그래. 내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함께 기사가 된 녀석이었지. 라시카는 괜찮은 상대였나?”
“강했습니다.”
이는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어중간한 수준의 기사였다면 좀 더 간단히, 몇 번의 공격만으로 팔을 자르거나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을 것이다.
여성 기사, 라시카는 신체능력과 기량 등, 모든 면에서 평범한 기사를 상회하는 뛰어난 인재였다.
적어도 이전에 나왔던 기사 세 명보다는 강했다.
“그래, 그렇다면 된 거겠지. 아르센이라고 했나? 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보는 바타얀의 얼굴은 표정 없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지만, 충혈된 두 눈에서는 명백한 살의가 비쳤다.
아르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진영으로 복귀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동료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