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5)
34화 – 결판
잘 부탁드립니다
팔라토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벨루안 진영에서 일어난 혼란은 전혀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여덟 명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고 있으니 싸움을 준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마수인 도마뱀에겐 먹히지 않는 독인 듯 기승수들은 멀쩡했지만, 기수의 상태가 이래서야 전투는커녕 도주조차 불가능했다.
아르센은 급히 엘로이즈에게 물었다.
“엘리, 다른 사람들도 해독시켜줄 수 있겠어?”
“응. 하지만 일일이 직접 만져가면서 정화해야 해.”
“알았어. 라뮌 경! 아가씨가 독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아르센의 외침에 라뮌이 크게 한 번 도약해 아르센의 옆에 착지했다.
그는 늘 침착했던 평상시와 달리, 다급한 기색으로 추궁하듯 질문을 던졌다.
“모든 병사를 치유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한 명당 십 초 정도.”
엘로이즈의 단호한 답변에, 라뮌은 몇 초간 짧게 고민한 뒤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치유하도록 해주십시오. 전 병력, 전투준비!”
기사들만이라면 지금도 후퇴할 수 있지만, 서른일곱 명의 종자와 다섯 명의 병사를 모두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결정이었다.
라뮌은 어떻게든 병사들을 회복시키며 맞서 싸우기로 했다.
진에서 내린 엘로이즈가 얼른 주변에 있는 사람을 해독시키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는 터무니없이 느렸다.
한 명을 붙잡은 채 거의 10초 가까이 정신집중을 해야 해독을 시킬 수 있으니, 지금 중독되어 괴로워하는 사십여 명을 해독시키는 데는 몇 분 이상이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게 고작 열 명 정도를 회복시킬 무렵, 이미 적은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기승수를 탄 다른 병력이 오려면 시간이 있었지만, 적 기사들이 호위병력을 떼놓고 먼저 달려온 것이다.
이를 본 라뮌은 팔이 부러진 기사 아문드를 불렀다.
“아문드 경, 성채로 돌아가서 증원군을 데려와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데려와.”
“저도 거드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팔로는 방해만 된다. 차라리 병력을 더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냉정한 라뮌의 말에 아문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진영을 이탈해 북쪽으로 달려갔다.
아타르 진영에서, 그 모습을 보던 기사 한 명이 바타얀에게 물었다.
“도망치는 놈이 있는데, 쫓아가서 죽일까요?”
“신경 쓰지 마. 여기서 본대를 격파하기만 하면 저 녀석이 어떤 수작을 부리건 상관없다.”
그렇게 부하를 타이르던 중, 바타얀은 정화주문으로 병사들을 해독시키고 있는 엘로이즈를 보았다.
손에서 빛이 한참 나다가 기운을 차리며 벌떡 일어나니, 바보가 아닌 이상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젠장, 치유 주문을 쓸 줄 알았나? 마법사가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다! 마법사부터 죽여! 투창!”
* * *
“병사들은 아가씨를 지켜라!”
아르센이 명령하자 병사들이 얼른 엘로이즈의 앞에 서서 인간 장벽을 형성했다.
다행히 엘로이즈의 근처에 있는 종자와 병사들은 모두 정화주문을 받아 독이 치유된 상태였기에 대응은 신속했다.
즉시 방패병 두 명이 큼지막한 방패를 겹쳐 들어 엘로이즈를 가렸다.
달려오는 아타르의 기사들이 투창을 꺼내 들자, 벨루안 진영 쪽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듯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투창 공격이다!”
그 말과 함께, 아타르 쪽 기사들이 일제히 투창을 던졌다.
그들이 노린 타깃은 같은 기사가 아닌 중독되어 골골거리는 종자와 병사들, 그리고 정화 주문으로 병사들을 회복시키고 있던 엘로이즈였다.
매섭게 날아든 투창이 텅텅 소리를 내며 방패에 박혔고, 그 중 두어 개는 미처 막지 못한 종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아르센 역시 엘로이즈를 지키는 방패 앞에 버티고 서서 유난히 위협적으로 보이는 투창 한 개를 쳐냈다.
아타르의 기사들은 반격을 경계한 것인지, 한 번 투창을 던진 뒤 바로 물러났다.
‘기사의 숫자는 정확히 칠 대 칠…’
팔라토에게 팔이 잘렸던 기사 역시 완전히 회복하고 전투에 참여한 상태이기에, 기사의 숫자는 동일했다.
벨루안 진영의 약점은 아직 독에서 회복하지 못한 병력이 다수라는 것.
이들이 독에서 회복한다 쳐도 아타르 쪽 병력이 숫자가 많은 상황이건만, 벨루안의 병사 사십여 명 중 절반이 아직도 중독된 상태였다.
대치하던 것도 잠시,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아타르 영지의 일반 병력이 합류하며 돌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엘리, 보조 부탁할게!”
“알았어!”
엘로이즈의 두 손 사이로 빛의 구체가 생겨나더니, 곧장 진녹색 가시덩굴이 솟아났다.
바닥에 깔린 덩굴은 꿈틀거리며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을 피해 나아가, 돌진하던 아타르 군대 앞에서 벽처럼 솟아나 길을 막았다.
갑자기 생겨난 이 덩굴의 벽은 기사들에게는 별문제 없이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에 불과했지만, 기승수를 탄 일반 종자나 병사들에게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종자와 병사들이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날카로운 가시덩굴에 들이받은 덕분에, 가속도를 이용해 밀어버리려던 계획은 깨졌다.
그 모습에 덩굴을 뛰어넘었던 아타르 쪽 기사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이 빌어먹을 마법사 같으니!”
그가 노성과 함께 투창을 매섭게 던졌지만, 엘로이즈는 병사들의 방패와 아르센이라는 두 겹의 방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아르센은 날아오는 투창을 아예 맨손으로 잡아챈 뒤 다시 상대 쪽을 향해 투척했다.
당연히 기사가 아닌 다른 상대를 노렸기에, 옆에 따라오던 종자 한 명이 가슴을 꿰뚫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네 이노오오오옴-!”
그 공격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투창을 던진 기사가 대검을 들고 돌진해 들어왔다.
“싸워라! 물러설 곳은 없다!”
라뮌과 다른 기사들 역시 진을 몰아 상대 기사와 맞붙고, 이를 보조하며 종자와 병사들이 서로 창칼을 교환했다.
교전은 금방 벨루안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칼을 맞대고 겨루려던 병사 하나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하다 창에 꿰이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발탄의 아들-”
아르센의 앞으로 도달해 온 상대 기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려던 순간, 아르센은 그 틈을 노려 돌진하며 검을 찔렀다.
실전 상황에서까지 허례허식에 어울려줄 마음은 없었으니까.
아르센이 찌른 검이 방어하고자 하는 상대 기사의 대검과 얽힌 순간, 바로 옆에서 창 한 자루가 찔러들어왔다.
기승수에 탄 종자의 공격이었다.
‘젠장!’
조금만 더 싸운다면 죽일 수 있을 것 같건만, 아르센은 빈틈을 노려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아르센의 흉갑 위를 창이 긁고 지나가며 불똥이 튀었다.
그때, 창을 찔러 공격하던 종자가 비명을 지르며 창을 떨어트렸다.
땅에서 솟아오른 가시덩굴이 종자의 두 다리를 칭칭 감은 채 보아뱀처럼 죄어들고 있었다.
곧장 상대의 목을 베어버린 아르센은, 시끄러운 전장의 소음 탓에 전해지지 못할 감사를 외쳤다.
“고마워, 엘리!”
엘로이즈는 아르센 한 명만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마법의 눈을 하나 띄워 시야를 확보한 뒤, 온 사방으로 가시덩굴을 뻗어 적을 방해하며 전장을 통제했다.
항마력 때문에 기사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는 없지만, 종자나 병사들에게 있어 엘로이즈의 마법은 엄청난 위협이었다.
결과적으로, 벨루안 영지의 모자란 병력 수십 명분의 역할을 엘로이즈 한 명이 대체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타얀은 전투 중이던 라뮌을 떨쳐내고 엘로이즈를 향해 돌진했다.
전투 중 빈틈을 드러내며 돌격한 만큼, 이를 뒤쫓은 라뮌이 등을 크게 베었지만 바타얀은 재생능력을 믿고 이를 버티며 그대로 엘로이즈를 향해 도약했다.
이는 엘로이즈를 뒤에 둔 채 적 기사 한 명과 겨루던 아르센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멈춰, 이 새끼야!”
다급해진 나머지 욕을 내뱉으며 아르센은 투창을 뽑아 던졌다.
특별히 투창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닌만큼 기사를 상대로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즉시 엘로이즈에게 달려들려던 것을 저지할 정도는 되었다.
투창에 몸이 밀려 주춤한 사이 아르센이 앞을 가로막자, 이를 보는 바타얀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그래, 아르센! 안 그래도 우린 서로 해결할 게 남았지!”
바타얀의 어깨 너머로, 그를 쫓아오던 라뮌이 기사 두 명에게 협공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속된 사고로 재빨리 시선을 돌려보니 벨루안 쪽 기사 한 명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 죽어있었다.
갑옷의 양식이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루다스가 분명했다.
벨루안과 아타르, 양쪽 모두 정예끼리 격돌하는 이 현장이 술이나 퍼먹고 한량 생활을 하던 기사에겐 너무 가혹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그는 성채의 기사였던 탓에 진을 타고 있지도 않았으니 더더욱.
어쨌든 루다스를 죽인 기사와 아르센과 싸우던 기사, 이렇게 두 명에게 협공당하는 라뮌이 당장 이쪽을 도와줄 수 없음은 분명했다.
“덤벼!”
아르센의 도발과 함께 바타얀이 창을 찌르며 공격을 가했다. 앞서 싸웠던 라시카에 비해 가진 마력도, 신체능력도, 기술도 모두 우위였다.
마력량 자체는 아르센도 거의 동급이라 할 수 있었지만, 바타얀의 일격에서는 긴 세월 다져진 근력과 기량이 묻어나왔다.
거기다 경험이 풍부한 덕인지, 반사신경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상태에서 반격을 가했음에도 바타얀은 마치 비슷한 수준의 사고속도를 가진 것처럼 이를 받아냈다.
그렇게 몇 차례, 아르센의 장검과 바타얀의 창은 서로의 살점을 헤집지 못한 채 불꽃을 튀기며 서로 얽혔다.
“어설프다, 애송아! 십 년만 더 단련했으면 좋았을 것을!”
호기롭게 외친 바타얀이 완력의 우위를 이용해 아르센의 검을 밀어치려던 순간, 저 뒤에서 일그러진 주황색 구체가 날아와 바타얀의 투구를 직격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날아오는 그것을 정확히 포착한 아르센은 즉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질량이 없는 그림자처럼 투구에 내려앉은 구체는 접촉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충격과 소음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감각을 잃은 바타얀은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이는 엘로이즈의 특기 중 하나인 폭발 주문으로, 기사를 일격에 죽이거나 무력화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타격을 주기엔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센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자 바타얀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재생능력이란 특기를 가진 바타얀은 아르센의 예상보다 더 빨리 충격에서 회복했기에, 즉시 몸을 뒤로 빼며 검격을 피했다.
가볍게 스친 탓에 목 부분을 긁어내긴 했지만 치명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다.
피 흐르는 목을 감싸 쥐고 물러선 바타얀은 몇 초 뒤 피가 멎자 손을 떼며 빈정댔다.
“혼자 힘으론 자신 없어서 마법사의 도움을 받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결투에 승복하지 않고 독이나 뿌리는 주제에 그런 소리를 한다고? 태어날 때 양심을 안 챙기고 나왔나 보지?”
아르센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정곡을 찔려 화가 났는지, 바타얀은 대꾸하지 않고 창을 밑에서부터 올려쳤다.
두 사람의 진 역시 앞발과 이빨을 사용해 치열하게 주도권을 쥐고자 싸웠다.
승부는 쉽게 갈리지 않았다.
몇 번 아르센 쪽이 열세에 몰릴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엘로이즈가 덩굴을 이용해 견제하거나 폭발 주문을 쏘는 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렇게 겨루던 중, 잠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던 바타얀의 등 뒤로 무언가가 날아와 꽂혔다.
날부터 자루까지 흑성철로 만들어진 투창. 벨루안에서 이것을 쓰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투창이 날아온 쪽을 둘러보니, 상대하던 기사 한 명을 제압하고 지원사격을 날린 팔라토가 있었다.
“크윽, 컥…”
바타얀은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출혈이 심한 탓인지 순식간에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팔라토가 날린 이 일격으로 바타얀은 내장 몇 개가 찢겨나가는 상처를 입었다.
이는 아무리 재생 능력이 있어도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다못해 치유주문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모를까, 마법사는 습격에 방해가 되기에 뒤쪽 숲속에 몰래 숨겨놓았다.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다니.’
흐려진 시야로 앞을 보자 확실하게 목숨을 끊고자 달려오는 젊은 기사가 보였다.
여동생에게 네 복수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노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어도 나오는 것은 핏물뿐.
잠시 후, 시큰한 느낌과 함께 그의 의식은 영원히 끊어졌다.
바타얀의 목숨을 거둔 아르센은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영지에서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기사, 라뮌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력한 기사가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단순 기량으로 따지자면 아직 아르센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데다 조력자의 힘을 빌려 꺾은 것이기에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간신히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해방감만이 있을 뿐.
그리고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협공당하거나 허를 찔린다면 허무하게 죽게 된다는 교훈 또한 얻었다.
그도 잠시,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기에 아르센은 전장을 확인하고자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라뮌이 자신을 협공하던 기사 중 남은 한 명마저 해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외에도, 엘로이즈가 계속해서 전장을 지원하고 틈틈이 해독주문을 시전한 덕에 전장의 형세는 이미 뒤집히고 있었다.
이미 두 진영의 전력비는 역전된 상태였다.
바타얀의 죽음을 알아챈 아타르 쪽 기사 한 명이 즉시 뒤로 훌쩍 도약해 물러선 뒤 외쳤다.
“퇴각한다! 모두 산개! 흩어진 다음 루다 성채에서 모이자!”
그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자 아타르 영지의 기사들과 종자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승수를 잃은 종자와 병사 몇 명은 무기를 버리며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듯, 몇몇 기사와 종자가 라뮌을 돌아보았다.
“항복은 받지 않는다. 모조리 죽이고 추격해라!”
라뮌의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명령과 함께, 전쟁의 승패와 패자에 대한 처우가 결정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