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7)
36화 – 마법 노예
잘 부탁드립니다
다소 길고, 지루하고, 잔인하며, 일방적인 대화 끝에 유틴은 포로들로부터 꽤 많은 정보를 빼낼 수 있었다.
아타르 영지의 상황과 그들의 총 병력, 목적, 계획, 함정을 판 방식까지.
호랑흰독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기사 중 몇 명은 죽은 루다스의 시체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성채 인근을 순찰하며 주변의 환경과 위험을 파악하는 것은 성주로서 해야 할 가장 큰 업무 중 하나였다.
만약 루다스가 자신의 임무를 충실이 이행했다면 당연히 이런 치명적인 독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었을 터.
반역죄가 아니라면 기사의 목숨을 거두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지만, 이 정도 피해를 입힌 죄라면 그 불문율을 깨고 사형을 선고한다 한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으리라.
분통을 터트리는 기사들의 모습에 팔라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화내 봐야 의미 없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죄를 물어서 어쩌겠나? 가족에게 책임을 물을 것도 아니고.”
“…팔라토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기사들은 억울함과 분노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심문이 끝난 후, 벨루안의 군대는 상황을 정리하고 본래 목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피와 시체 냄새는 마수를 부르기에 시체를 처리해야 했다.
적의 시체는 구덩이에 던져넣고 묻어버렸으며, 아군의 시체는 별동대를 따로 분리해 일렌 성채 인근 묘지에 매장하도록 보냈다.
다행히 미리 보냈던 기사 아문드가 일렌 성채에서 데려온 지원병력 덕분에 일손은 모자라지 않았다.
거기다 호랑흰독풀의 독기를 씻어낼 수 있는 해독제를 전리품으로 얻었기에, 그것을 멀리서부터 뿌리며 접근하는 것으로 운석 주위에 남은 독을 해독한 뒤 다시 캠프를 설치하여 장기간 숙박할 준비를 마쳤다.
흑성철의 추출은 마법사 한 명이 추가로 합류한 덕에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그 마법사와 대화를 나누며 ‘그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룸은 자신이 이름이라는 것을 가지는 것에 다소 두려움과 거부감을 보이긴 했지만, 이전과 달리 친절한 태도에 조금 마음을 열었는지 표정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타고난 노예근성이 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 뒤 뽑아낸 흑성철의 양은 모두를 웃음 짓게 만들 정도였다.
미리 준비한 보관함을 거의 꽉 채울 정도여서, 전리품과 합치면 벨루안의 기사 모두가 갑옷 한 벌씩 더 마련해도 되지 않겠냐는 농담마저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 실린 전리품이 어마어마한 탓에 바퀴가 부서지는 사고가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엘로이즈에게도 새로운 소득이 하나 생겼다.
“이렇게?”
“맞습니다. 아가씨. 조금만 더 위쪽을 비트시면서…맞아요, 그겁니다.”
엘로이즈는 올 때처럼 아르센의 진에 함께 타서 오는 대신 수레에 탄 채 그롬으로부터 새로운 주문을 습득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법사 두 명을 태운 수레 옆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에, 이 수레는 행렬의 맨 뒤에 있었으며 아르센 혼자 주위를 돌며 호위했다.
본래 마법사는 각각 타고난 특성에 따라 주문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선천적으로 타고나 배우지 않아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주문, 두 번째는 타고나진 않되 배우면 쓸 수 있는 주문, 세 번째는 후천적으로도 습득할 수 없는 주문.
이는 그 마법사가 어느 분야에 적성을 가지느냐에 따라 갈렸다.
예를 들어 루덴은 선천적으로 능숙하게 환영을 다루고 공간을 비틀 수 있었으며, 엘로이즈 역시 배우지 않고도 식물을 생성하고 조작하거나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둘 다 정화, 화염술, 그 외의 여러 주문을 습득하여 다룰 수는 있었지만 이 주력 주문만은 못했으며, 이렇게 타고나거나 오랜 기간 수련한 종류의 마법은 일회용 유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엘로이즈가 폭발창이라는 강력한 일회용 유물을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 대신 루덴은 치유 주문을 아예 구사할 수 없고, 엘로이즈는 환영 주문을 전혀 구사할 수 없는 등 절대 배울 수 없는 분야도 있었다.
따라서 엘로이즈는 치유 주문을 습득할 수는 있되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독학으로 방법을 터득해야 했고, 그녀의 회복 주문은 한참 시간을 들여서야 생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천적으로 치유 주문을 습득한 치유자를 만나 주문을 전수받자, 엘로이즈의 실력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그룸 역시 눈이 보이지 않되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같은 마법사이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인 이 아가씨에게 최선을 다해 주문을 전수했다.
다행히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법 전수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엘로이즈가 치유 주문을 펼치면 그룸이 주문 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보통 사람은 알아듣기 힘든 조언을 했고, 그에 따라 빛의 색이 이리저리 뒤바뀌곤 했다.
‘위쪽을 비틀어라’ 라던가, ‘아래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흐름을 두 바퀴 꼬아라’같은 조언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루덴이 가르치던 방식도 비슷했고 엘로이즈가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면 나름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저녁 식사를 할 시간에도 이리저리 손을 휘저으며 마법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 아르센은,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라고 타박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 집중을 끊었다.
“진도는 좀 나가?”
“응. 이제 어지간한 상처는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을 거 같아. 직접 써보진 않았지만.”
“잘됐네. 나중에 다치면 엘리에게 달려가면 되겠어.”
“안 다칠 생각을 해야지!”
짐짓 꾸중하듯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엘로이즈를 보며 아르센은 대답 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에 엘로이즈 역시 표정을 풀고 히힛 웃더니 두 손을 마주 보게 펼쳤다.
“이거도 배웠어, 봐.”
엘로이즈의 두 손 사이에서 파지직 소리가 나더니 전기가 튀기 시작했다.
전격계 주문은 태어나서 처음 봤기에, 아르센 역시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대단한데? 위력은 어느 정도야?”
“써보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은데,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면 보통 사람 정도는 바로 죽이거나 기절시킬 수 있대.”
태연한 얼굴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엘로이즈는 손에서 일어나던 전기를 없앴다.
“나중에 무기에다 이런 마법도 부여할 수 있게 되면 좋겠는데, 이 마법을 타고난 사람은 이미 죽었대. 안타깝게도. 그 사람도 같이 데려올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래, 그룸?”
엘로이즈의 말에 그룸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격앙된 목소리로 아첨했다.
“맞습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 겁니다! 저는 지금처럼 만족스럽게 산 적이 없습니다. 정말로요! 아마 기사님과 아가씨는 신께서 보내신 사도이실 겁니다!”
사실 아르센과 엘로이즈가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룸에게 대단한 대접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룸의 마력은 엘로이즈에 비해 한참 떨어져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든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팔에 찬 족쇄를 풀어주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 냄새가 나지 않게 씻기고 남들이 먹는 것과 비슷한 음식을 먹였을 뿐.
그것만으로도 그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자비로운 기사와 아가씨를 몇 번이고 찬양했다.
그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그는 평상시에 늘 남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했으며, 보이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대소변을 볼 때 외에는 가마 밖으로 나올 수도 없다고 했다.
거기다 얼마나 오랫동안 두 팔이 묶여 있었는지, 수갑을 풀어주고도 뒤틀린 어깨 탓에 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아마 흑인 노예들도 이 정도로 가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영구적인 장애를 치유 주문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 편리한 주문은 아니었다.
신체 손실의 경우 잘린 부위를 다시 맞대고 회복하여 붙일 수 있지만, 뽑힌 눈은 이미 썩어 없어진 지 오래인데다 다리 힘줄 역시 오그라든 채로 아물어 버린 탓에 그냥 치유 주문을 퍼붓는 방식으로는 고칠 수 없었다.
혹시 사형수의 눈 같은 것을 이식하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타인의 신체를 이식할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식한 부위가 썩게 된다고 했다.
그나마 현대의학에 대한 지식을 겉핥기 수준으로라도 가진 아르센으로서는, 아마 면역체계의 거부반응 때문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치유 주문으로 눈이나 팔도 고쳐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네.”
“감히 그렇게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영원히 충성할 겁니다!”
아르센의 말을 시험이라 생각했는지, 그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한번 자신의 충성심을 어필했다.
물론 아르센은 그룸의 그런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기껏해야 며칠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해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은 얄팍하지 않으니까.
아마 아타르 영지와 다시 싸움이 나서 그들에게 붙들린다면, 그룸은 망설임없이 예전의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 것이다.
아르센은 엘로이즈에게 건빵을 불린 죽을 건네준 뒤, 그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타르의 마법사 이야기나 좀 더 들었으면 하는데. 거기는 원래 모든 마법사를 이렇게 학대하나?”
“그게, 전부 그렇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좀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격앙된 목소리로 찬양하던 조금 전과 달리, 그룸은 마치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듯 고개를 휙휙 돌렸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누가 들을까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는 성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버려지다시피 해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모르고 이름도 없었죠. 그런데 열 살쯤에 갑자기 기사 한 명이 나타나서는 저를 영지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바로…눈을 뽑고 다리 힘줄을 잘랐습니다. 끔찍했죠.”
그룸의 얼굴은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는 듯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흉터와 버짐, 고생으로 생긴 주름 탓에 처음에는 그룸이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이십 대 초반 정도라고 했다.
눈을 잃은 뒤로는 낮과 밤을 제대로 헤아리지도, 달력을 보지도 못하기에 정확한 나이는 본인도 모르지만.
“그러고 나서야 마법사들을 따로 가둬두는 곳에서 살게 했는데, 제가 처음 갔을 때는 마법사가 저까지 세 명 있었습니다. 한 명은 ‘벼락’이라는 늙은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화로’라고 불리는 젊은 남자였죠.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 둘도 저랑 마찬가지로 눈을 뽑혔다고 하더군요. 벼락은 제가 오고 몇 년 뒤에 죽었습니다.”
아르센은 엘로이즈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슬쩍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만약 아타르 영지에 엘로이즈가 잡혀서 그런 꼴을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잠깐 상상하던 아르센은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아타르 영지 전체를 불살라서라도 복수하려 들 거라는 결론을 내고 쓰게 웃었다.
연애 감정이라기엔 부족하지만 조카, 혹은 나이 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처럼 여기며 긴 시간을 함께 지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친구나 동료라면, 엘로이즈는 그보다 한 발 더 안에 들어와 가족처럼 느껴지는 존재였다.
“벼락이 저희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줬습니다. 어떤 기사가 영주님을 몰아내려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 벼락이 영주님 편에 서서 반란군과 싸웠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반란이 성공해서 영주님이 돌아가셨고, 벼락도 그 때 붙잡혀서 눈을 뽑혔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어느 정도 차별은 받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그래서 저와 화로에게 늘 미안하다는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자기가 더 열심히 싸워서 이겼다면 저희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룸의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아르센은 그룸이 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잠시 목이 메는 듯 숨을 삼키던 그룸이 말을 이었다.
“거기다 반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사 한 명이 영지를 불태우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역시 마법사는 파멸을 가져오는 저주받은 존재라 육체의 고통으로 속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군요.”
그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사가 누군지 짐작이 간 아르센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엘로이즈는 그게 누구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언제나…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항상 저의 조상신을 원망했지만 이렇게 벗어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젖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룸을 보며, 아르센은 말없이 물에 불린 육포를 그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룸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한 뒤에야 야금야금 육포를 갉아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 * *
올 때는 며칠이면 충분했지만, 무거운 화물을 수레로 옮기는 탓에 돌아가는 데는 몇 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벨루안 영지의 남쪽 방벽을 넘고서야 원정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관으로 가는 대로를 오르던 도중, 유난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었다.
“보십쇼!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에이르보다도 더 북쪽, 머나먼 땅에서 온 신비한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자, 한 번만 보러 오십쇼!”
유난히 이국적인 차림새를 한 사람들 몇 명이 시장 구역 한쪽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쌓아놓은 짐 위에 올라서서 소리치고 있는, 한쪽 앞니가 금색으로 빛나는 사내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아르센은 잠시 호기심을 느꼈지만, 일단 영주관으로 올라가 보고를 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엘로이즈가 물었다.
“왜? 뭐 이상한 거 있어?”
“아니, 먼 곳에서 온 상인들이 있다길래 신기해서. 나중에 한 번 구경이라도 해야겠네.”
언덕 위를 보자 저 멀리 햇빛을 받아 빛나는 영주관의 새하얀 벽이 보였다.
집에 돌아온 기분에 마음이 놓여, 아르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