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9)
38화 – 북쪽 사람들
잘 부탁드립니다
“으어어으아…날삼라언제나냐고…”
엘로이즈는 술에 잔뜩 취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업은 채, 아르센은 탑에서 영주관으로 가는 어두컴컴한 길을 걸었다.
영주관 정문에 도착하자 횃불 두 개가 밝혀져 있고, 그 뒤에 정문 담당 경비 두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경비병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모습에 놀라 슬쩍 무기를 들었다가, 다가온 이의 얼굴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며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아르센 경.”
“고생이 많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알겠습니다. 뒤에는…?”
“아가씨.”
아르센의 말을 듣고서 두 경비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도 잠시, 경비 한 명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아르센 경, 지난 전투에서 보이신 무용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아가씨께도, 일개 병사가 존경의 뜻을 밝힘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남부 전투에 참여했나?”
“제 동생이 참전했습니다. 아가씨의 마법 덕분에 목숨을 구했노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더군요. 물론 아르센 경이 적장을 물리치신 이야기도 했고요.”
“자네 동생 이름이?”
“라진입니다.”
“아, 종자 라진. 지나가면서 몇 번 본 거 같군.”
원정 도중 가끔 마주쳤던, 유난히 주근깨가 많은 종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인지, 병사의 용모는 그 종자의 얼굴을 몇 년 늙게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마법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아가씨께 전해 드리지.”
“.”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여 병사의 경례에 답한 뒤 영주관 안으로 들어섰다.
밤에 맞춰 은은한 불빛이 복도를 비추는 가운데, 계단 몇 개를 오르고 지나 엘로이즈의 방에 도착한 뒤 문을 두드렸다.
“이바 부인.”
문이 열리며 유난히 매서운 눈매를 한 중년 여인의 모습이 드러냈다.
기사 나메르의 여동생이자 어려서부터 엘로이즈를 키운 유모인 그녀는, 그 특별한 위치 덕분에 같은 기사들에게도 존중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르센 경? 아가씨는…”
“여기 있습니다. 침대에 올려놓을까요?”
“네.”
아르센은 등에 업고 있던 엘로이즈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바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움켜쥘 정도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아니, 아가씨가 이렇게 술을 드실 동안 말리지 않고 뭘 하신 건가요?”
“몇 잔 마시더니 자기는 하나도 안 취한다면서 병째로 마시더군요.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하…”
술을 처음 마시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이라, 이바 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감싸 쥘 뿐이었다.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세요.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니까, 이렇게 부주의하게 행동하시면 아르센 경이 옆에서 말려주셔야죠.”
“알겠습니다.”
이바 부인은 수건으로 엘로이즈의 얼굴을 닦고 매무새를 고쳤다.
그 모습이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거부감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여, 아르센은 내심 감탄했다.
오랜 세월을 딸을 키우듯 헌신하며 내성을 키웠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리라.
그때, 이바 부인이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려 아르센을 보았다.
“계속 거기 계실 건가요?”
“아, 아가씨에게 내일 점심 종이 치고 나서 탑에서 보자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약속은 했는데 기억을 하실지 몰라서요.”
“그러죠.”
사실 저렇게 술에 취해서 내일 제대로 일어나긴 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르센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방에서 나왔다.
만일을 대비해 뒤에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 한 명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 * *
해가 중천을 넘어선 시간, 아르센은 엘로이즈와 함께 마을 시장 구역으로 내려와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검 한 자루는 차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무장은 특별히 갖추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나왔다.
물론 커다란 흑청색 검을 차고 2m가 넘게 큰 키를 가진 사람은 기사뿐이기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아르센을 볼 때마다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옆에 있는 엘로이즈를 보면 뒷걸음질 치기 바빴지만.
물론 엘로이즈는 그런 반응에 면역이 된 지 꽤 오래 되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의 반응에 신경 쓸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난밤의 여파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분을 칠한 것이 아닌가 싶을 수준이라 안쓰럽기 짝이 없었고, 퀭한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아래로 창백한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은 수상쩍은 마녀 그 자체였다.
“그냥 쉬고 나중에 오는 게 낫지 않겠어?”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데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그 대단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며,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어제 돌아오던 길에 본, 북쪽에서 왔다는 상인들의 노점상이었다.
다행히 떠나진 않았는지, 오늘도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자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다시 돌아갑니다! 머나먼 북방에서 온 신비한 물건들! 돈으로만 받지 않습니다! 남쪽의 신비한 물건들과도 교환 가능합니다! 많이 찾아주세요!”
어제도 봤던, 아르센이 속으로 ‘금니’라고 이름 지은 상인이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주변에는 제법 힘깨나 쓸 것 같은 사내들 몇 명이 짐 주위에 포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기야, 다른 영지에서부터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독기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단련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리라.
호객행위를 하는 남자 역시 탄탄한 근육질 체격인 것이 수련이 얕지 않아 보였다.
노점상 주위에는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고자 많은 사람이 근처에 몰려들어 있었지만, 둘이 다가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얼른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열었다.
그게 기사를 존중해서인지, 아니면 마법사를 두려워해서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기에 아르센은 앞장서서 길을 넓히며 나아갔다.
당연히 호객행위를 하던 남자 역시 이 모습을 보고 있었기에, 그가 얼른 짐더미 위에서 뛰어내려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기사 나으리.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물건 좀 보려고 하는데.”
“아, 여기 보시죠!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굉장히 불편하면서도 기이하다는 듯한 태도에, 아르센은 살짝 인상을 쓰며 손으로 칼자루를 탁 쳐서 소리를 냈다.
그 서슬에 놀란 상인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물건.”
“죄, 죄송합니다! 그럼 보시죠. 여기 이 거울로 말씀드리자면…”
그가 소개하는 물건은 말 그대로 이 근방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방(異方)의 기물이었다.
벨루안의 원시적인 거울과 달리 진짜 모래와 수은으로 만든 것 같은 매끈한 거울, 몇 번 두드리면 저절로 불을 밝히는 돌, 매끄럽기 짝이 없어 비단을 연상시키는 옷감 등.
인근 지역에 나타나지 않은 마수의 부산물을 이용한 듯한 물건도 보였다.
“와, 센! 이거 봐, 내 모습이 그대로 보여!”
“그래? 어디 한번 볼까?”
아르센은 몸을 숙여 엘로이즈가 들고 있는 거울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현대에서 이미 이런 종류의 거울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나서는 이 정도로 깔끔한 거울을 처음 보았기에 제법 신기했다.
벨루안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청동 거울이나 물에 비춰보는 정도가 고작이었기에, 아르센 역시 자신의 얼굴을 또렷하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금발에 보라색 눈, 제법 준수한 얼굴을 한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그 밑에서는 엘로이즈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진짜 신기하네.”
“그치? 아, 몰랐는데 나 여기에 점 있다.”
얼굴 한쪽을 찍으며 투덜대는 엘로이즈의 모습에 아르센이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 모습을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던 상인이 짐짓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예쁜 거울이지요? 사실 그보다 더 큰 거울도 가져왔었지만 오는 도중에 깨져버렸지 뭡니까. 이거도 한번 보시죠.”
상인이 그다음으로 보여준 물건은 거울보다 훨씬 신기한 물건이었기에, 이번에는 아르센조차 진심으로 놀라 탄성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사람의 몸에 덮으면 투명해지는 천이었다.
큰 것은 아니고 손을 간신히 덮을 정도지만, 그 천을 손 위에 덮으면 마치 손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천을 넘겨받은 엘로이즈가 그것을 손 위에 덮은 뒤 아르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손가락에 찔리는 기분은 기묘했다.
“이게 더 신기하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러게. 만약 이 천이 더 크면 아예 천 안에 숨을 수도 있겠는데. 이봐, 혹시 그런 물건은 없나?”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이게 손을 덮을 정도의 크기도 자주 나오는 물건이 아닌지라…이 물건이 나는 지방에 그런 물건이 나온 적 있다는 전설이 있긴 합니다. 전설의 투명 망토라고 하더군요. 말 그대로 전설이라 진짜 그런 게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상인의 말에 아르센은 조금 실망했지만, 엘로이즈는 그와 상관없이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물건의 실용성을 따지는 아르센과 그냥 새롭고 신기한 것을 즐기는 엘로이즈의 차이일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숙취로 죽어가는 듯한 기색이었건만, 어느새 완전히 활기를 되찾은 엘로이즈의 모습에 아르센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맞장구를 쳤다.
몇 가지 물건을 구경하며 신나게 떠들던 도중, 상인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아르센을 불렀다.
“아, 기사님?”
“뭐지?”
“귀한 손님에게 어울릴 만한 물건이 따로 있습니다만, 그게 아무래도 귀한 거다 보니까 도둑맞을까봐 여관 안에 따로 보관해놨든요. 한번 보시렵니까?”
“그런 물건을 살 정도로 돈을 많이 가져오진 않았는데.”
아르센은 기사로서 꽤 오래 복무하며 많은 봉급을 받았고, 엘로이즈 역시 영주에게서 선물 명목으로 받은 장신구 등을 생각하면 제법 부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건을 사러 내려오면서 엄청 비싼 무언가를 살 계획이 아니었기에, 그리 큰돈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금화 몇 닢 정도를 가져왔을 뿐인데, 이게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귀한 손님’에게 대접할 물건을 구매할 정도로 큰돈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일단 한번 구경만 해 주시면 됩니다. 돈은 나중에 다녀와서 주시거나 다른 동료 기사분들께 소개해주셔도 좋고요.”
“어쩔래, 엘리?”
“괜찮을 거 같은데?”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엘로이즈를 보며 아르센은 잠시 주위를 훑었다.
이 금니를 한 남자와 다른 덩치들 모두, 제법 단련은 되어 있었지만 기사는 아니었다.
애용하는 검을 차고 있는 만큼, 무장한 병사 수백 명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고서야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거기다 이들의 본거지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묵어가는 곳에 불과한 여관에 어마어마한 함정이 있을 리도 없고.
위험하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기에, 아르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 구경이나 해보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힘! 나 대신에 여기 좀 보고 있어라!”
“알았수, 형님.”
주변에 있던 덩치 중 한 명에게 노점상 판매를 떠맡긴 금니가 손을 비비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아쥬르라고 합니다. 저 북쪽 미테아 영지에서부터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죠.”
“상단주라고?”
소리 높여 호객행위 하는 모습에 기껏해야 호객꾼 아니면 호위병 수준인 줄 알았기에, 아르센은 내심 놀라며 그를 다시 보았다.
벨루안에서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제법 나이도 많은데다 영지를 오갈 정도로 큰 규모의 상단을 이끄는 지휘자라면 어느 정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하인을 대하듯, 칼자루를 치며 위협하거나 을러대도 좋을 정도인 상대는 아니었다.
“이거,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너무 무례하게 대한 것 같은데.”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같은 일개 떠돌이 장사꾼이 어찌 감히 영지를 수호하시는 분들과 맞먹겠습니까.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도 않았고요.”
너무 정중해서 잠깐 빈정대는 말이 아닌가 싶었지만, 아쥬르의 표정에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정말 진지하게 공경하는 태도를 보인 것인지, 비아냥 섞인 아첨인지 잠시 가늠하던 아르센은 아무렴 어떠냐 싶어 탐색하는 시선을 거뒀다.
“그럼 물건 한번 보도록 하죠. 상단주.”
“알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상단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