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44)
43화 – 유혹
잘 부탁드립니다
상단주가 음식 접시 몇 개를 치우고 수정구를 올려놓자, 아르센은 호기심이 동해 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크고 투명한 수정구슬은 딱 보기에도 범상한 물건이 아니어서, 점쟁이들이 점을 칠 때 쓰는 마법의 수정구슬을 연상케 했다.
“이게 뭐죠?”
“사실 저는 마법 결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마법 결사?”
그 미묘한 울림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기심을 느낄 뿐이었던 아르센의 표정이 변했다.
“마법 결사라, 아쥬르 상단주. 당신은 분명 소속 없는 방랑 상단의 주인이란 신분으로 영지에 들어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 본인이 첩자라고 자백하는 겁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험담을 즐기는 소년 같았건만, 아르센의 날카로운 태도에 상단주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기사의 살의가 마력에 실려 은연중에 감각을 자극한 탓이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달달 떨리는 것을 느끼며, 상단주는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어 넘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 겁에 질린 모습을 본 아르센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탁자를 몇 번 두드렸다.
“좋아요, 조금 진정하고 말해봅시다. 그래서요?”
“···이건 그 결사에서 직접 만든 유물로, 한 쌍이 되는 수정구를 가진 사람과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전에 구매하셨던 귀걸이랑 비슷한 물건이지요. 쓸 수 있는 거리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멀지만 말입니다.”
상단주의 말에 아르센은 왼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살짝 쓰다듬으며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아르센을 향해 상단주가 간청하듯 말했다.
“부디 이 유물을 사용해 저희 조직의 장로님들과 대화를 나눠주십시오. 분명 아르센 경께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르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상단주를 노려보았다.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용하기 위해서일 텐데 본인이 마법사는 아니시고, 상단 내에 마법사가 있는 겁니까?”
“···투명 주문을 쓰고 짐칸에 숨어서 들어왔습니다. 밖에 나다닐 수가 없어서 여관에 숨어 있습니다.”
투명화 주문이라면 루덴과 엘로이즈도 쓸 수 있는 주문이었기에, 어떤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사용할 경우 보통 사람은 마법사를 볼 수 없게 되는 유용한 주문이지만, 냄새나 소리는 감출 수 없으며 결정적으로 사용한 뒤 일정 범위 이상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한 주문이었다.
거기다 기사들은 투명화 상태라고 해도 다른 감각으로 위치를 간파할 수 있기에, 기사에게서 숨는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물품 검사 시 막대기로 빈 곳을 휘저어보라고 해야겠군.’
“제가 이야기해야 할 상대가 그 마법사입니까, 아니면 상단주입니까?”
“그분은 마법으로 상행을 보조하고 유물을 사용하는 데 도움을 주시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고, 상단의 책임자는 접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일단 내게 바라는 게 뭔지부터 정확히 말해보시죠. 지금으로서는 지나치게 수상쩍은 집단이란 생각밖에 안 드니까요.”
상단주는 잠시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아르센 경은 마법사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결사는 오래전부터 아르센 경과 같은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장담컨대, 저희와 우호적으로 교류하시게 된다면 그동안 보여드린 것과 비교도 안 되는 많은 보물과 지식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특별히 위험하거나 힘든 일 없이요. 아르센 경은 경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특별한 존재이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쥬르의 말을 듣던 아르센은 잠시 턱을 괴며 고민에 빠졌다.
원칙적으로는 지금 즉시 아쥬르의 멱살을 잡아챈 뒤 영주관으로 끌고 가 고발하는 것이 옳지만, 그러기에는 그동안 아쥬르와 대화를 나누며 쌓은 친분이 다소 걸렸다.
거기다 아르센의 기본적인 가치관 자체가 단순히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적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아마 보통 기사였다면 마법 결사라는 이야기를 들은 시점에서 당장 아쥬르를 제압해 끌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많은 보물과 지식이라는 말이 아르센을 유혹했다. 아르센은 영웅담이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재물에 초탈한 성자가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호구가 아닌 이상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도 되지 않겠는가.
“그냥 결사라고만 하는데, 정확히 이름이 뭡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아쥬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복도에 누군가 훔쳐 듣는 사람이 있나 확인한 듯, 좌우를 휙휙 둘러본 그가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은 뒤 작게 속삭였다.
“단체의 이름은 ‘별부르미’입니다.”
별부르미, 아르센은 그 이름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수십 초 정도가 지나고, 마침내 결정을 내린 아르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결정은 이미 내렸고, 그저 너무 빨리 결정을 내리면 아쥬르가 쉽게 여길까 싶어 숙고하는 척했을 뿐이지만.
“좋습니다.”
대답과 달리, 아르센은 수정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품속에서 커다란 손수건을 꺼낸 뒤, 그것을 이용해 수정구가 손에 닿지 않게 감쌌을 뿐.
그냥 방랑 상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가 주는 유물을 크게 경계하지 않고 사용해 보곤 했지만, 상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 단체 소속임을 알게 된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상단주를 믿고 이걸 여기서 써 볼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죠?”
“물론입니다. 언제 쓰셔도 연락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아는 마법사에게 확인한 뒤 사용하겠습니다.”
“아, 네. 다만 아는 사람을 최대한 적게 해 주셨으면···.”
“당연한 말씀을. 일단 일어나시죠.”
“네?”
“설마 이런 얘기를 듣고 당신을 그냥 보내주리라고 생각한 겁니까? 이게 함정이고 상단주가 도망가면 혼자 물 먹는 건 나인데? 병사들을 시켜서 상단 전체를 구속하길 원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아···물론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아쥬르 상단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마법사의 탑 3층, 평상시에 잘 쓰지 않는 공간에서 세 사람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르센이 루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쥬르 상단주는 가끔 잘못된 이야기를 수정하거나 추가로 이야기를 보충하는 정도일 뿐이었지만.
“···그렇게 된 겁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별부르미라,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이네만.”
루덴의 대답을 들으며, 아르센은 안타까움에 들고 있던 철퇴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그리고 아쥬르는 그 사소한 행동에서 큰 위협을 느꼈다.
허튼짓을 벌이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행여나 일이 잘못되면 저 거대한 물건이 날아들어 머리통을 부술 것이라 상상하니 당장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일단 이 유물이 자네에게 위험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걸세. 여기 담긴 마력으로는 기사에게 유의미할 정도의 손상을 줄 수 없거든. 정말 재수가 없어야 머리카락이나 그을릴까.”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
루덴에게 안전을 확인받은 뒤, 아르센은 망설임 없이 수정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을 보던 루덴이 물었다.
“내가 나가주는 편이 낫겠나?”
“이야기가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르센의 말에 루덴은 아쥬르 상단주를 데리고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문이 닫힌 후, 수정구에 마력을 주입하자 수정구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조금씩 커져, 얼마 지나지 않아 보통 사람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 됐다.
[아, 아, 들리십니까?]“들립니다.”
[반갑습니다. 아르센 경. 저는 라티스 장로라고 합니다. 혹시 저희 쪽 사람에게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아마 라티스의 부드럽고 정중한 목소리를 아쥬르 상단주가 들었다면 우주적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평생 그런 목소리를 낼 거라 상상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당신들이 별부르미라는 마법사 조직이라는 것, 마법사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저에게 많은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세 가지군요.”
[교섭을 맡은 친구가 성실하게 일을 진행한 모양이군요. 기쁩니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별부르미의 장로인 라티스입니다.]“제 소개는 생략해도 될 거 같군요, 이미 아실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서,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추궁하는 듯한 아르센의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는 바로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들려온 대답에는 조금 당황한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아르센 경은···저희 생각보다 단호한 분이시군요.]“어떤 사람을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몇 달 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이 어떤 비밀 결사의 첩자라는 걸 알게 된 상황에선 사람이 달라질 수 있겠죠.”
[부디 제가 그 오해를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저 역시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단주를 교수대에 매달게 된다면 슬플 거 같으니까요.”
아르센의 냉담한 태도에, 라티스 장로는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아르센 경이 있는 벨루안은 이 세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 동쪽 끝 변두리입니다. 고대 마법사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은 극히 드물죠.]“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루덴에게 그런 이야기를 익히 들은 적이 있었기에, 아르센은 라티스의 말에 수긍했다.
[벨루안에서 서쪽으로 가면, 고대 마법사들이 남긴 유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잠겨있죠. 강력한 수호자들이 지키고 있거나 위험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어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라티스는 마치 어린아이를 구슬리는 이야기꾼처럼, 잔잔한 어조로 아르센을 끌어들였다.
처음 이야기할 때와 달리,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라티스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안을 뚫을 방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아르센 경, 당신입니다. 경과 같은···마법사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를 우리는 계승자라 부릅니다. 유적의 수호자도, 설치된 방어 주문도 계승자에게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열 수 없지만, 계승자가 손만 가져다 대면 열리는 문도 있죠.]라티스의 말에 아르센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체질이 평범한 것이 아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이곳 벨루안 근처에는 고대의 유적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게 우리가 무례한 방법으로나마 경과 접촉하려는 이유입니다.]“유적 발굴단의 일원이 되란 말이군요.”
[그렇게 사소하게 표현할 일은 아닙니다. 불쾌하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지금 아르센 경은 변방 영지의 기사 중 한 명에 불과하잖습니까. 하지만 유적 몇 개만 발굴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은 그 자체로 엄청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 영지를 다스려, 거대한 나라를 세우실 수도 있죠. 실제로 남쪽에는 유물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가 있습니다.]라티스는 꿀처럼 달콤한 말로 아르센을 유혹했다.
권력, 힘, 보물, 무엇 하나 사람이라면 이끌리지 않을 수 없기에 격한 흥분을 느꼈지만, 아르센은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들이 천하의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그렇게 남 좋은 일만 해줄 리 없잖은가.
“그래서 당신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고 제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아르센 경이 발굴할 수 있는 유적의 위치를 알려드리고, 발굴을 지원해 드리죠. 대가는 유적에서 얻는 모든 유물의 절반을 저희에게 양도하시는 겁니다.]“조금 전 얘기하신 것만 듣자면, 저는 그냥 유적에 걸어 들어가서 유물을 꺼내오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사실상 위치를 알려주는 대가로 유물의 절반을 받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게 일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을 겁니다. 명성 높은 유적은 찾는 사람도 많고, 공략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모르는 유적은 방해물이 없는 대신 찾기 힘들죠. 알려지지 않은 유적의 위치를 알려드리고, 알려진 유적을 공략할 때는 저희 쪽에서 마법사와 유물을 지원해 도와드릴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유물의 절반은 절대 큰 대가가 아닐 겁니다.]라티스의 논리정연한 말에 아르센은 자리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일단 안정된 영지에서 벗어나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누트 영주와 맺은 맹세를 파기해야 했고, 이것부터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미 안정된 생활을 하는 지금 굳이 여기서 나가 위험한 모험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아르센을 사로잡았다.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은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보물과 영광, 안주와 평안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에 대한 번뇌가 아르센을 괴롭혔다.
“저는···.”
“이보게, 아르센! 빨리 내려와 보게!”
계단 저 밑에서 들려오는 루덴의 다급한 목소리에 아르센은 하려던 말을 끊었다.
“미안하지만 이쪽에 일이 생긴 것 같군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알겠습니다. 저희는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즉시 마력을 거둔 아르센은 수정구를 구석에 올려놓은 뒤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내려오자 루덴과 몹시 침통한 기색인 팔라토가 서 있었다.
팔라토가 마법사의 탑에 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팔라토 경. 무슨 일이십니까?”
“반갑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군.”
팔라토는 평상시의 온화하고 느긋한 표정이 아닌, 얼굴에 어울리는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팔라토의 말로, 아르센은 왜 그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주님이 쓰러지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