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45)
45화 – 범인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센의 추궁에 상단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 무슨 말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영주님에 대한 거 말입니다.”
아르센은 나가기 전 1층에 가져다 두었던 철퇴를 슬쩍 들었다.
그 모습에 겁에 질린 상단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항변했다.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영주님께 유물을 바친 뒤에는 뵌 적도 없어요, 정말입니다.”
“그 판 물건 중에서, 독도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그런 걸 가지고 있어 봐야 어디 쓰겠습니까? 누구에게 팔려고 했다가 의심받기라도 하면 바로 교수대로 갈 텐데요.”
“당신이 데려온 마법사는요? 그가 독 같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건넸을 가능성은?”
“그···그분이 뭔가를 하겠다고 어디 나가셨다가는 당장 상단에 마법사가 있다고 소문이 났을 겁니다. 제 부하들은 조직원이 아니라서, 마법사님이 뭘 시켰다면 제게 먼저 보고했을 것이고요. 애초에 그분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분입니다.”
“방금 한 말, 모두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한 맹세의 말을 흘려넘기며, 아르센은 상단주의 얼굴과 몸짓에 의식을 기울였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는 이를 옛사람들의 허황된 미신으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말 눈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눈 주변 근육과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제스처.
아르센은 발달한 감각과 반사신경을 통해 대화 내내 상단주의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을 하면서 어디를 쳐다보고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분석했다.
잠시 후,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단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겠습니다, 상단주. 일단 상단주를 믿도록 하죠.”
“정말 , 그런데 영주님과 독이라는 건 혹시···?”
“그래요. 영주님이 중독되어 쓰러지셨습니다.”
이미 병사들과 하인들에게까지 퍼진 이야기였기에, 아르센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이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이들이 저지르지 않은 일이라면 알아야 할 일이 될 테니까.
애초에 별부르미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아르센과 접촉하기 전이나 후에 일을 저지르지, 딱 접촉하는 순간 일을 저질러 봐야 괜히 의심만 받지 않겠는가.
물론 이를 역이용했을 수도 있으니 일부러 겁을 주며 추궁하고 떠봤지만, 일단 상단주는 전형적인 억울한 사람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모르는 일이라면 모르는 일인 대로, 윽박질러 잡아놓은 주도권을 써먹어야 했다.
덤으로 이들이 믿을만한 집단인지도 확인할 겸.
“하지만 아직 상단주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어요. 날 좀 도와줘야 제대로 믿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네? 어떤···?”
“누가 영주님을 중독시켰는지, 그리고 영주님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유물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있다면 제공할 수 있습니까?”
“그게, 그런 걸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허락을 구해보죠.”
* * *
[···그래서, 가능하십니까?]“잠시, 몇 분 정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상의 후 빠르게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죠.]연결이 끊어진 수정구를 보며, 라티스는 폐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탄식을 길게 토했다.
그리고 좌우에 앉은 네 명의 장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벨루안 영지에 있는 조직원에게 명령을 내리신 분 있습니까?”
“아니.”
“절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장로들을 보며, 라티스 역시 당연히 그러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지금 이들이 벨루안 영지 쪽에 연락할 방법은 이 수정구 하나뿐이고, 수정구는 쭉 라티스가 관리하고 있었다.
즉 이 일은 정말로 그들과 관계없이, 벨루안 영지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딱 오해받기 좋은 상황에서.
“일단 생각해보죠. 일단 암살범을 찾을 방법부터.”
“그냥 내버려 두는 쪽이 낫지 않나? 일단 상황만 보면 우리에게 유리하게 된 것 같은데? 영주가 죽으면 혼란스러워질 거고, 어쩌면 계승자가 영지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지.”
우만이 툭 던지듯 내뱉자, 라티스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을 표했다.
“상황이 긍정적으로만 돌아간다면 그렇겠죠. 암살범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영주가 죽었다가 내전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요? 계승자가 내전 도중 죽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우리에게는 가장 끔찍한 비극이죠. 암살범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고요. 행여나 잘 해결된다고 해도, 계승자는 우리를 무능한 놈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쥬르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보고한 덕에, 이들도 벨루안 영지의 정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깊이 있는 정보는 아니고, 두 아들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거나 아르센이 애매한 위치에 있다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차라리 암살범을 찾을 수 있게 도우면서 신뢰를 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리하다?”
“네. 덤으로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입증할 수 있겠죠.”
티아와 라티스의 문답에 다른 장로 두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방법이 있나?”
“얘기를 듣자 하니, ‘되새기는 자’정도가 적당해 보이는걸.”
‘되새기는 자’는 사물에 대고 사용할 경우 그 사물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일회용 유물이었다.
당연히 조건이 있었는데, 볼 수 있는 사물도 제한되는 데다 볼 수 있는 시간도 길어야 하루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다 사용한 사람에게만 기억을 보여주는 것이니 증거로 써먹을 수도 없고.
물론 용도가 제한적이라고 해서 귀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걸로 만족할까?”
“충분해. 무언가를 엿보거나 엿듣는 유물 같은 건 우리 쪽에서도 귀한데, 그런 걸 바로 줄 순 없지.”
“여기서 벨루안까지 빠르게 달려도 몇 주는 걸릴 텐데, 그 정도면 쓸모없어지지 않나?”
“그쪽에 마법사가 세 명이나 있다며? 제대로 된 공간 마법사가 한 명만 있다면 전송 주문으로 넘겨받을 수 있겠지. 작은 물건 한 개 정도는 옮기기 쉽잖나.”
“가능한지 물어보겠습니다.”
라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아르만 장로가 물었다.
“그런데 영주를 고치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전문 치유사가 고칠 수 없다면 우리 쪽도 딱히 방법은 없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 * *
“포도주 통 안에는 독이 없다고 하셨죠.”
“맞네. 주치의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바닥에 쏟아진 포도주에는 독이 있지만 통 안에 든 것은 멀쩡한 포도주라지. 그런데 독이 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더군.”
늦은 오후, 아르센은 루덴과 함께 다과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곳에는 낮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행여나 치우다가 증거를 인멸하려는 행위로 몰릴까 두려웠던 탓에 그 누구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엎어진 테이블과 대리석 바닥에 눌어붙은 포도주 자국, 잔이 깨진 파편이 흩어진 모습이 당시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르센은 주머니에서 ‘되새기는 자’를 꺼냈다.
루덴의 장기가 공간 마법인 덕에, 아르센은 전송 주문을 통해 곧장 별부르미로부터 유물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알겠네.”
바닥에 뿌려진 수정 조각에 종이를 가져다 대고 마력을 주입한 순간, 몸이 어딘가로 빨려가듯 사라지는 기분과 함께 아르센의 의식이 끊어졌다.
아르센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수정으로 된 잔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잔은 아직 어딘가 어두운 곳에 보관된 상태였다.
정신을 집중해 시간을 빠르게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가 밝아졌다.
아르센은 누군가가 잔을 꺼낸 뒤, 테두리에 투명한 액체를 바르는 모습을 보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하인 한 명이 잔을 들고 걷고 있었다.
다과실에 도착한 뒤, 하인은 나무로 된 작은 포도주 통과 잔을 배치했다.
그리고 영주와 엘로이즈가 함께 자리에 앉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듯한 웅얼거림이 들리고, 영주가 먼저 포도주를 한 잔 마신 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테이블이 엎어지고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과 함께, 아르센의 의식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손에 쥐고 있던 ‘되새기는 자’는 완전히 삭아버린 상태였다.
“후우···.”
“어떤가, 뭔가 찾았나?”
루덴의 말에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탑으로 돌아가죠.”
* * *
탑으로 돌아온 뒤, 아르센과 루덴은 의자를 하나씩 놓고 마주 앉았다.
탑 안에 소리를 막는 주문까지 깔고 나서야 아르센은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을 밝혔다.
“아문드 경, 라뮌 경, 이 두 사람이 잔에 독을 발랐습니다. 각각 따로요. 데로이나 리다트나, 자기 심복을 내세운 걸 보면 하인에게 맡기긴 불안했나 봅니다.”
아문드는 이전 남부 원정에 참여했던 기사 중 하나로, 데로이의 외조부인 코르트 경과 인연이 깊어 데로이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이 말은, 데로이와 리다트 두 명 모두 독살을 시도했다는 의미였다.
“둘이 협력했다는 건가?”
“지금 죽일 듯이 으르렁대는 걸로 봐서 그건 아닐 거 같습니다. 애초에 협력했다면 독을 두 번씩 바를 필요가 없었겠죠. 그래 봐야 들킬 위험만 두 배로 올라갈 텐데요.”
“데로이 도련님···아니, 데로이는 이해가 간다만, 리다트는 왜?”
“글쎄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죠. 그리고 둘 다 목표가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아르센은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잔에 든 게 섞여 아무도 몰랐겠지만, 엘리의 잔에도 독을 발랐습니다.”
“빌어먹을 패륜아들 같으니.”
루덴의 욕설을 배경음악 삼으며, 아르센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 그는 범인을 알아낸 후 범인이 아닌 쪽 후계자에게 가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 명 모두 자기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려 드는 개자식으로 밝혀진 지금,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영지에서 떠나야겠습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위험해요. 이미 한 번 노렸는데 두 번 노리지 않는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엘로이즈는 정화 주문을 쓸 수 있었지만 마법이란 집중이 필요한 법, 본인이 독을 먹고 피를 토하는 상태에서 주문을 시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두 놈을 고발하는 건?”
“증거도 없고, 제가 그래 봐야 엘리를 내세워서 영주 자리를 노린다는 소리나 들을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자살행위죠.”
일찍이 누트 영주가 아르센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르센이 엘로이즈를 내세워 영주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아르센이 계승 구도에 끼어들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경계했을 뿐.
영주 본인이 일어나서 엘로이즈를 후계자로 선언하지 않는 한, 마법사에다 어머니 쪽 인맥도 부실한 엘로이즈가 계승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이미 두 진영이 완성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중립파에는 아르센과 친한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명분과 증거 없이 친분만으로 아르센과 엘로이즈를 지지할 정도로 허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기를 떠나 어디로 갈 생각인가? 마법사가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영지는 드문데.”
“평생 떠나겠단 게 아닙니다. 엘리는 물론이고, 제게도 벨루안은 고향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영주님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을 생각입니다.”
“어떻게?”
루덴의 질문에 아르센은 조금 전 라티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반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영주를 되살릴 방법에 대해서.
“별부르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듣자 하니 먼 남서쪽에 어마어마한 유물이 잠든 유적이 있어, 죽은 사람조차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과장이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영주님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게 아니더라도 밖에서 많은 유물을 확보해 두 개자식을 물리칠 정도의 세력을 만들 수도 있고요.”
이미 계승자에 대한 이야기를 밝혔기에, 루덴 역시 아르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별부르미···믿을 수 있는 친구들인지 모르겠군. 이번 일에는 큰 도움을 줬지만. 차라리 내가···.”
루덴이 말을 살짝 끌자, 아르센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깨달았다.
“루덴 경은 여기 계셔야죠. 둘 다 루덴 경이 동행하시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루덴은 영지에서 가장 유능한 마법사였고, 동시에 박학다식한 현자로 유명했다.
그가 떠나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맹인에다 몸도 불편한 그룸이니만큼, 데로이나 리다트 둘 다 루덴의 동행을 허락할 리 없었다.
“기사 중에는 데려갈 사람이 없나?”
“데로이와 리다트를 따르는 사람은 믿을 수 없으니 데려갈 수 없고,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영주님을 지켜야죠. 아마 저들도 영주님을 쉽게 해치진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영주가 쓰러진 지금, 두 후계자의 진영은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영주의 회복이 불가능에 가까움이 알려진 상황에서, 굳이 영주를 죽여봐야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었다.
반대로 상대가 영주를 죽였다는 증거를 잡는 순간 명분에서 큰 우위를 점하는 것은 물론, 중립파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을 터,
둘은 상대가 영주를 죽이려 했다는 증거를 잡고자 혈안이 되어 서로를 감시할 게 분명했다.
패륜아 두 명의 경쟁 때문에 영주의 안전이 보장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일단···내일 엘리가 일어나면 물어보죠.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데 억지로 끌고 나가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멍청한 애는 아니니까. 말하면 알아듣겠지.”
퉁명스럽게 말하는 루덴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어려있어, 아르센은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단 그 별부르미란 친구들을 너무 맹목적으로 믿진 말게. 좀 수상쩍어.”
“당연하죠. 걱정해주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