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46)
46화 – 사람
잘 부탁드립니다
대회의실. 두 후계자와 그들을 따르는 가신, 그리고 중립파라 할 수 있는 일부 가신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현재 두 파벌을 중재하고 있는 팔라토의 제안으로 열린 회의였기에, 이들 모두 팔라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에게 주목받는 가운데, 팔라토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여러분을 모은 것은,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가씨.”
팔라토의 호출에, 엘로이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뒤 걸어 나왔다.
언제나 공식적인 자리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해도 인형처럼 굴던 소녀가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주위에서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엘로이즈의 주변에 있던 사람 몇 명이 급히 몸을 젖히다 넘어지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본래 영주가 앉아야 할, 회의실에 있는 모두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선 뒤 엘로이즈는 선언했다.
“영주님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았습니다.”
엘로이즈의 선언에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초조해하고.
아르센은 사고속도를 가속해가면서, 그 모든 반응을 관찰하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아가씨?”
한 원로 기사의 질문에 엘로이즈는 정중하게 손바닥을 펴 루덴 쪽을 가리켰다.
“루덴 경께서 예전에 서쪽에 계시던 시절, 저 먼 남방에 아무리 큰 상처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마법의 샘에 대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것을 떠올 생각입니다.”
이 영지의 가신들은 모두 벨루안과 그 인근 성채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라온 토박이였다.
그들이 외부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는 가끔 북쪽 에이르 영지 쪽이나 더 위에서 오는 방랑 상단에서 듣는 정보 정도.
때문에 루덴이 알고 있다, 루덴이 그랬다, 이런 말 한 마디면 아는 것이 없으니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직접 세상을 돌아본 사람이 그렇다고 하는데 뭐라 말하겠는가.
“역시 벨루안 최고의 현자답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밝혀진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닙니다. 존재 자체는 확실하지만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찾아서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적어도 몇 달, 어쩌면 해가 넘어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어진 엘로이즈의 말에 잠시 가신들은 서로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남부로 몇 주 원정을 다녀오는 동안에도 기사나 종자들이 몇 명씩 죽고 다치지 않았던가.
좁은 세계에 사는 이들의 시각에서, 몇 달이나 몇 년이 걸릴 수 있는 원정이란 것은 저승으로 떠나는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걸 누가 찾으러 가겠습니까?”
“영주님을 구할 방법이 있다는데 죽더라도 가야죠, 용기 있는 자라면 당연히.”
“행정관이라 안 가도 된다고 속 편한 소리 하는 거 아닙니까?”
두 파벌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다투던 중, 마법의 힘으로 증폭된 박수 소리가 짝짝 울리며 소란을 끊어냈다.
모두가 놀라 말을 멈춘 가운데, 엘로이즈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제가 직접 갈 생각입니다.”
엘로이즈의 선언에 다시 한번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후계자는 재빨리 자기 부하들과 시선을 맞추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경쟁자라기엔 빈약하지만 치우고 싶던 대상. 그 대상이 스스로 영지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을지에 대해.
리다트가 한발 먼저 나서서 의견을 밝혔다.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일인 거 같은데, 가능성도 희박해 보이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누군가는 가야지. 오빠가 갈 건 아니잖아?”
한번 예의상 말려 봤을 뿐인지, 엘로이즈의 말에 리다트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물러섰다.
데로이를 돌아보자, 데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야 찬성이지. 아버지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에 감동했다, 동생아. 혹시 아르센 경은 같이 안 데려가나?”
“같이 갈 생각입니다. 아가씨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 아가씨와 함께 활동하기 가장 적합한 기사는 저니까 말입니다.”
아르센의 대답에 데로이가 감탄했다는 듯 짝짝 손뼉을 쳤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눈물겹군. 두 사람만 보낼 수는 없고, 지원 병력이 더 필요할 거 같은데. 라뮌 경은 어떤가? 우리 영지 최고의 기사라면 이럴 때 나서야···.”
“두 명이면 충분합니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위험한 임무에 영지의 귀한 전력을 투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수가 많아지면 기동력이 떨어지는 만큼, 종자나 병사들도 데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르센이 딱 잘라 말하자 데로이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서, 아르센은 데로이가 이번 원정의 의도를 얼추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과연, 입꼬리를 씩 올린 데로이가 리다트 쪽을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리다트 역시 이에 호응했다.
“좋아. 그렇다면 부디 행운을 빌지. 아르센 경, 그리고···엘로이즈.”
* * *
“생각보다 쉽게 결정됐네.”
“둘 다 눈치챘으니까. 우리가 영지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이 이야기를 꺼냈단 걸.”
마법사의 탑 1층,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함께 짐을 꾸리고 있었다.
무기부터 시작해서 식량, 옷, 유물까지 챙겨야 할 물건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식량을 많이 챙겨야 했다.
“눈치채서 보내줬다고?”
“너나 나를 죽이려면 정치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위험 부담을 져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알아서 사라져 준다고 한 거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믿겨, 데로이는 몰라도 리다트는 항상 내게 친절했는데. 조금 전만 해도 말렸고.”
“예의상 말려본 거지. 내가 봤는데, 그 자식 영주님이 회복될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얼굴 찌푸리더라. 아주 잠깐이었지만.”
리다트에게는 독살을 저지를 동기가 없었기에 혹시 라뮌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오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리다트는 적어도 라뮌과 공범이거나, 독살을 지시한 주범이라는 것을.
“녀석들에겐 이 벨루안 근처가 세상의 전부니까. 자기들의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이후에는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짐을 꾸리는 것도 잠시, 아르센은 위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루덴 경이 안 보이네. 바쁘신가?”
“내려오기 싫대. 울고 있는 거 아닌지 몰라.”
엘로이즈의 말에 아르센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덴이 보기엔 퉁명스러워도 나름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설마 울고 있기까지 하겠냐 싶어서.
그래서 잠시 후 내려온 루덴의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아르센은 살짝 감동했다.
“이거도 가져가게.”
루덴이 내민 물건은 붉게 칠해진 매끈한 배낭으로, 위에는 푸른 수실이 묶여 있었다.
몸통에는 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루덴 경이 직접 만드신 겁니까?”
“내가 직접 마법을 걸긴 했지. 안쪽 공간을 넓힌 배낭일세. 젊은 시절에 간신히 한 개 만든 물건이니 절대 잃어버리지 말게.”
그 말 안에 담긴, 꼭 살아 돌아오라는 의미를 읽은 아르센은 웃으며 배낭을 받아들었다.
“꼭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미리 준비한 짐을 차곡차곡 마법 배낭 안에 넣자, 짐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여행에 있어 많은 짐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루덴은 ‘그럼 출발하게, 나는 바빠서 못 내려갈 거 같으니.’하고 말을 남기더니 다시 탑 위로 올라가버렸다.
루덴과 일별을 마치고 마지막 짐을 실을 무렵, 팔라토가 탑에 방문했다.
“준비는 잘 되어가나?”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한 팔라토를 보며, 아르센은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거의 다 됐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팔라토 경.”
“아닐세. 이 정도밖에 해줄 수 없어서 유감일 뿐이지.”
현재 영지에서 중립파의 수장 역할을 하는 팔라토가 돕지 않았더라면, 두 파벌을 모두 소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팔라토는 안타깝다는 듯 아르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른 기사나 종자들은 안 데려가도 되겠나? 제노비아 경이나 카민 경이라도.”
“어린아이에게서 부모를 뺏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기다···팔라토 경에게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지금 영주님을 지킬 수 있는 건 팔라토 경뿐입니다.”
팔라토는 아르센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오늘 아침, 아르센은 팔라토를 은밀히 불러 영지 회의를 열 것을 요청함과 함께 두 명의 후계자 모두 독살을 시도한 정황이 있음을 밝혔다.
그들이 엘로이즈 역시 노리고 있었다는 것 역시.
당연히 증명할 방법은 없었지만, 두 후계자 중 누구도 영주를 노릴 수 있으니 철저히 방비해야 함을 알리는 데는 충분했다.
‘증거만 있었다면.’
증거. 빌어먹을 증거가 없다는 것이 팔라토를 괴롭게 했다. 증거만 있었다면, 팔라토는 망설임 없이 중립파를 이끌고 엘로이즈를 영주로 세우고자 하는 세력에 섰으리라.
몇 년간 아들처럼 가르친 아르센을 믿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다른 기사들을 설득하는 것은 아무리 팔라토라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한숨을 쉬던 팔라토가 아르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만약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힘들다면···차라리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네.”
팔라토 역시 아르센과 엘로이즈가 다시 영지로 돌아오기 힘든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충성을 다해야 할 영주의 목숨 대신 자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라는 말은, 어려서부터 많은 것을 가르치며 키워 온 젊은 기사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돌아오겠습니다.”
아르센은 그렇게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 * *
“기분이 묘하네.”
점점 멀어지는 영지를 돌아보며 엘로이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각각 한 대씩 진을 타고 있었다.
아르센이 탄 것은 그가 늘 이용하던 파충류 형태의 진이고, 엘로이즈가 탄 것은 아타르 영지에서 얻은 뱀 머리에 늑대 몸통을 가진 진이었다.
물론 마법사인 엘로이즈가 탁월한 반사신경으로 마수의 공격을 피하거나 급속도로 기동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직선으로 달리거나 도약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진에 탄 게?”
“아니, 영지를 떠나는 거. 평생 여기서만 살 줄 알았는데. 뭔가···이상한 기분이야.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게 너무 이상해.”
“그렇게 느낄 수 있지. 충분히.”
아르센은 대답하며 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그들은 북쪽도 남쪽도 아닌,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 남쪽 아타르 영지와 분쟁을 일으킨 탓에 그쪽으로 가는 것은 자살행위고, 북쪽 에이르 영지는 목적지와는 정반대.
따라서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은 서쪽, 해가 저무는 방향이었다.
벨루안의 서쪽에는 잿빛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나마 아린과 파라스, 두 개의 성채가 있는 곳까지는 산과 나무, 물 같은 것이 존재하지만 이를 지나면 존재하는 것은 정말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대지뿐.
마치 잿빛 사막을 연상시키는 그곳에서는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평범한 벨루안 주민들의 세계관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다른 영지’는 비교적 가까운 북쪽 에이르나 한참 멀리 있는 남쪽 아타르, 두 개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아르센은 별부르미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저 벨루안 사람들은 멀리 갈 용기가 부족했거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뿐, 서쪽으로 진을 몰아 달리다 보면 새로운 영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 영지의 이름과 주변 환경, 정치체제까지 어느 정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비록 정치체제는 거의 십 년 전 기준이니 믿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슬슬 속도 내자. 적어도 사흘 안에는 파라스 성채 너머로 가야 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데로이나 리다트가 수작을 부리려고 들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아르센은 앞장서서 천천히, 잠시 후에는 조금 더 빠르게 속도를 냈다.
전력으로 달릴 경우 반사신경이 떨어지고 조종이 미숙한 엘로이즈가 다칠 수 있기에, 도마뱀이 달리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가르는 가운데, 아르센의 귀에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르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