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49)
다음 날 아침, 아르센은 밝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나무로 된 창은 완전히 맞물리지 않아 틈새로 햇빛을 흘렸고, 아르센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창문을 열자 이미 날이 밝은지 한참인지 해가 저 높이 뜬 것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죽은 듯이 잤나보네.’
기사로 각성한 이래,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 정도로 늦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래도 누워서 잠을 깊이 잔 덕분인지, 여행 내내 느껴졌던 두통과 피로가 상당히 가신 상태였다.
아직 평상시 컨디션으로 돌아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 같지만.
아르센은 잠시 밖으로 나갈지, 아니면 가만히 기다릴지 고민했다.
분명 어젯밤 ‘내일 얘기하자’라고 말해놨는데도 리노가 찾아오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야 했다.
어쩌면, 리노가 다른 기사 조직을 찾아가 ‘엄청난 무구를 가지고 진을 두 대나 탄 기사와 마법사가 영지에 왔다’고 정보를 팔아먹으러 갔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나가기 전 적이 있나 확인해보려 정문 쪽 창문을 열자마자,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정문 앞에 서 있던 리노가 아르센을 보고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아르센은 잠시 어이없는 듯 쳐다보다 창문을 닫고, 정문 쪽 빗장을 연 뒤 문을 열었다.
“들어와.”
“알겠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집에 들어온 리노는 그제야 아르센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장님, 제 생각보다 훨씬 어리···젊으셨군요.”
그 말을 듣고서야 아르센은 그가 어젯밤 내내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을 깨달았다.
일반인과 비교했을 때 훨씬 큰 체격 탓에 조금 나이 들어 보이긴 해도, 아르센은 아직 십 대 소년이었다.
“워낙 투구 쓰는 게 익숙해져서 잠시 잊었군.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은 사람을 믿고 부하가 되기로 한 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얼굴이 어떻든 존경받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게 중요한 거지요!”
의외로 지혜가 담긴 말을 하는 리노의 모습에 살짝 감탄하며, 아르센은 문을 닫았다.
“그나저나 꽤 늦게 왔군? 보니까 해가 중천에 떴던데.”
“새벽부터 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히 대장님의 수면을 깨울 수가 없다 보니···.”
“새벽부터 계속 문 앞에서 기다렸다고?”
“맞습니다!”
리노의 말에 아르센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 탄식했다. 분명 목숨을 구해주고 꽤 좋은 일자리를 제의하긴 했지만, 그걸로 이 정도의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하지만 부하가 충성을 보이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고, 이게 이쪽 영지의 기본 정서인가 싶었기에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충성하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제 듣기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지?”
“조금 과장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그리 여유 있지는 않습니다. 어제 사냥도 실패한지라···.”
새롭게 모신 보스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인지, 리노는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르센은 미리 준비한 물건을 내밀었다.
“이걸 팔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 거 같나?”
특이한 무늬가 그려진 작은 돌멩이를 받아든 리노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돌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숨어있는지 해석하기 위해.
“한번 아무 곳이나 꾹 눌러 봐.”
그 말을 듣고 리노가 돌멩이를 꾹 누르자, 갑자기 빛이 나기 시작했다.
빛은 꽤 밝은 편이어서, 작은 초가집 안을 환하게 밝히기 충분했다.
소음과 빛에 깨려는 것인지, 저쪽에서 엘로이즈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몇 분 정도 빛을 내지. 일회용이고. 이걸 판다면 어떨 거 같나?”
“이건···유물이군요. 신기하다는 것만으로도 살 사람이 꽤 있을 거 같습니다. 일회용인 게 아쉽긴 한데···잘 팔면 꽤 많은 식량이랑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활동비로 써라. 이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설득할 친구들에게도 적당히 베풀도록 해. 덤으로 나와 아가씨가 먹을 식사도 좀 챙겨주고.”
아르센이 작은 돌멩이를 한 움큼 쥐여주자, 리노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족히 열 개는 넘는 이 유물을 모두 팔았을 때가 상상도 가지 않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한가?”
“네? 아, 네···물론입니다. 대장님. 목숨을 걸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믿겠다. 부하로 들어오겠다는 사람 외에는 절대 여기로 데려오지 말고.”
어깨를 탁탁 두드려주자 리노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낸 후 아르센은 다시 문을 닫고 빛나는 돌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방 안을 빛내던 돌은 아르센이 살짝 힘을 주자 으스러지며 빛을 잃었다.
‘어차피 그리 귀한 것도 아니니까.’
영지에서 나오기 전, 아르센은 별부르미에게 선금을 요청했다. 당시 영지에 머물고 있던 아쥬르의 상단이 가진 물건 중, 보관이 쉬우면서 귀하게 여겨질 만한 것들을 넘겨 달라고.
대가는 나중에 유적을 공략해 얻는 유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별부르미 쪽에서도 난색을 보였지만, 아무 기반 없이 영지에서 나갔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협박 섞인 설득에 결국 동의했다.
다행히 루덴이 준 배낭 덕분에 많은 짐을 챙길 수 있어 온갖 물건을 쓸어 담았고, 그중에는 조금 전 리노에게 준 빛나는 돌멩이보다 귀한 물건도 많았다.
행여나 배신하거나 물건을 뺏길까 싶어, 일부러 잃어도 아쉽지 않을 물건을 넘긴 것이다.
아르센은 이제 막 생긴 하루짜리 충성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행여나 밖에서 누가 들여다 볼까 싶어, 아르센은 햇빛을 받고자 열어놨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두워지자마자 방 한가운데에 마법의 빛이 생겨나며 엘로이즈가 일어났다.
“갔어?”
“갔어. 일부러 안 일어났던 거야?”
“불편해서.”
엘로이즈가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꺼림을 알기에,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뒤졌다.
“배신하면 어떡해?”
“배신해봐야 근처에 있는 조직 하나쯤 불러오는 정도가 고작이겠지.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어차피 우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문은 나게 되어 있기도 하고.”
간단히 대답한 뒤, 아르센이 배낭에서 꺼낸 물건은 수정구였다.
이제 또 다른 일을 처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제 슬슬 저쪽 친구들에게 연락해보자.”
[오랜만입니다. 아르센 경, 아직 황야에 계십니까?]“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나르비크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영지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수정구 너머에서 후우, 하고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황야를 가로지르는 동안, 아르센은 라티스 장로에게 수정구로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행여나 적이 나타났을 때 진동이나 소리로 위치를 노출할까 염려한 탓이었다.
오는 도중에도 간간이 몇 번 소통하긴 했지만, 정작 아르센이 언제나 피곤한 상태였기에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냥 가고 있다, 가는 중이다라는 말만 계속 듣고 있었으니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안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보내기로 한 별동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며칠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만, 저희라고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며칠이라···알겠습니다. 몇 명입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수정구 너머에서 잠시 대답이 끊겼다.
잠깐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나 싶었지만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니 그냥 대화 상대이던 라티스 장로가 별동대의 숫자를 물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자신감에 찬 대답이 들려왔다.
[기사 한 명에 잘 단련된 정예 열 명입니다. 모두 강력한 유물로 무장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도착하게 되면 미리 외부에서 연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영지 내에서 만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으니. 저희 쪽에서 나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도착하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럼, 여기까지.”
아르센은 통신구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앉아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엘로이즈가 말했다.
“기사 한 명에 병사 열 명···생각보다 적네.”
“차라리 그게 낫지. 너무 많이 보냈으면 도망갔을지도 몰라.”
어쩌면 별부르미에서도 그걸 의도하고 적당한 수의 별동대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별동대에 많은 수의 기사나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다면 아르센은 그들과의 만남을 심각하게 재고했을 테니까.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것만 믿고 상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근데 별부르미에도 기사가 있네? 그 기사는 센처럼 마법사랑 있어도 괜찮은 것도 아닐 텐데.”
“나름 방법이 있겠지. 이 악물고 참자면 못 참을 것도 아닌 거 같고.”
“어차피 센은 어떤 느낌인지 모르잖아.”
“그건 그렇지만.”
별부르미가 굳이 별동대를 먼저 보낸 이유는 기동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람 숫자도 제법 많고 가진 것도 많은 조직이다 보니, 저 먼 북쪽에서 나르비크까지 내려오는 데 적어도 몇 달은 걸린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오는 동안 아르센이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별부르미의 입장에서도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터.
따라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별동대를 먼저 파견해 아르센과 합류, 유적 공략을 시작하자는 것이 그들의 제안이었다.
아르센 역시 이 제안에 수락했고.
“아, 죽겠네···.”
잠시 머리를 써서 그런지, 아르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수정구를 배낭에 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엘로이즈가 말했다.
“좀 더 자는 게 어때? 오는 동안에 한숨도 제대로 못 잤잖아.”
마치 명절에 운전하느라 고생한 아버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아르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냐. 하긴···이 안에서 달리 할 것도 없긴 하지.”
* * *
나르비크 인근 숲, 기사 한 명이 이끄는 무리가 기승수에 탄 채 행군하고 있었다.
특정한 무늬를 옷에 박아넣은 이들은 나르비크 내에서 ‘조직’으로 분류되는 이들이기도 했다.
다들 외부 지역에 익숙한지,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긴장감 없는 태도를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부하 중 한 명이 기사를 불렀다.
“대장님, 마수 사체입니다.”
“뭔데?”
“철갑박쥐입니다.”
“어떤 놈이 잡았는지 몰라도 무기 다 작살 났겠군. 쓸데없는 짓을···.”
비웃듯이 기사가 말하던 그때, 부하의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게···한 방에 잡은 거 같습니다. 그것도 날붙이로요.”
“뭐?”
기사는 즉시 자신이 타고 있던, 거대한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기승수의 몸을 돌렸다.
보고한 부하가 있는 곳으로 가보니 죽은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은 철갑박쥐의 모습이 보였다.
기승수에서 내려 시체를 뒤적여 보니 철갑박쥐의 사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날붙이, 그중에서도 검 종류가 두개골을 뚫고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머리에 남은 상처는 창에 다쳤다기엔 너무 넓고, 도끼에 다쳤다기엔 너무 깊었다.
주위의 다른 비늘은 상하지 않고 상처가 깔끔한 것으로 보아 한 방에 죽인 것이 확실했다.
“옆구리도 조금 파여 있는데요. 무슨 손으로 쥐어뜯은 것처럼···.”
“그건 죽은 다음에 한 거겠지. 맨손으로 살아있는 철갑박쥐 비늘을 뜯는 괴물이 어딨냐. 죽은 놈 옆구리쯤은 나도 뜯어낼 수 있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비늘을 한 줌 뜯어내 부하를 타박한 뒤, 기사는 다시 기승수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두목, 조금 전까지 그가 타박하던 이를 보며 물었다.
“우리 영지에서 철갑박쥐 대가리를 뚫을 정도의 검을 가진 놈이 누구 있지?”
“글쎄요? 이시엔의 창이나 올도 님의 도끼 정도가 제일 유명한 무기인데···검 종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철갑박쥐는 때려서 잡는 거잖습니까. 굳이 귀한 무기를 저기다 시험해보진 않죠.”
“그렇지? 그게 맞단 말이지.”
기사는 실실 웃으며 점점 대열의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처럼.
기사는 두 눈을 영지가 있는 전방에 고정한 채로, 황급히 옆에 따라붙는 부두목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 구역으로 돌아간 다음에 애들 풀어서 수소문해. 본 적 없는 물건을 가져오는 놈이나 처음 보는 놈이 나오면 무조건 알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의 얼굴에 진한 웃음이 어렸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멋진 칼을 들고 왔는데 안 뺏을 수가 있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