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53)
“···뭐?”
“자세한 건 여기 이 친구들 좀 물리고 얘기하지. 다들 저리 가 봐.”
아르센이 당연하다는 듯 명령하자 조직원들은 잠시 아르센과 바즈칼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이내 바즈칼 역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 태도를 보며 아르센은 바즈칼이 제법 부하들로부터 인망이 있음을 짐작했다.
만약 힘으로 찍어누르는 폭군이었다면, 조금 전처럼 얻어터진 상황에서 이미 바즈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테니까.
뒤에 선 리노를 빼고 다른 조직원들이 저만치 물러서자, 아르센이 다시 제안을 꺼냈다.
“난 여기 영지에 머무를 마음이 없다. 당연히 네 조직이나 부하들을 책임질 수도 없고.”
“그래서?”
“지금 고대 유적 발굴을 위한 군대를 꾸리고 있다. 내 군대에 합류하겠다고 하면 무술을 가르쳐주지. 도중에 괜찮은 무기를 발굴한다면 그것도 주고, 어때?”
아르센의 말에 바즈칼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이 있지, 기사가 되어서 남 밑에 들어가서 살 마음은 없어.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어.”
나르비크에서 기사가 다른 기사의 부하로 들어간다는 것은 굴욕적인 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어떤 기사를 따르던 조직원이라도 각성하고 나면 거기서 나와 자신의 조직을 만들거나 원래 수장이던 기사에게 하극상을 일으켜 조직을 찬탈하려 들었다.
그나마 예외라면 두 기사가 부모와 자식 간이거나 형제자매인 경우 정도일까.
기사끼리 싸워 한쪽이 이길 경우, 승자는 패자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 추방하지 부하로 삼지는 않았다.
이는 나르비크가 통일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기사 한두 명이 통제하기에는 너무 넓고 큰 땅이라는 것.
“너희 문화는 나도 대충 알고 있다. 평생 부하가 되라는 게 아니야. 딱 5년, 그 뒤에는 알아서 갈 길 가는 걸로.”
다시 한번 들어온 제안에 바즈칼은 턱수염을 꼬며 고민에 잠겼다.
5년간 계약관계라면 들어볼 만한 얘기였다. 강함에 집착하는 그였기에 더더욱.
아르센은 그런 바즈칼에게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보탰다.
“애초에 네 문제는 수행을 떠난다고 고쳐질 게 아니야. 기사랑 싸우는 법을 몰라서 진 거지. 수행을 떠난다고 대련 상대가 생기나? 마수랑 백날 싸워봐야 마수 잡는 실력이 늘지 무술 실력이 늘진 않아. 그 실력으로 다른 기사랑 싸워 봐야 제대로 싸우는 법을 배우기 전에 목이 떨어질 거다.”
그 사실을 조금 전 몸으로 뼈저리게 체감했기에 바즈칼은 항변하지 못했다.
그가 기사로 각성한 후 승승장구하며 얻은 자신감은, 이미 눈앞의 기사와 싸우며 박살 난 상태였기에.
잠시 후, 바즈칼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배우면···너처럼 강해질 수 있겠냐?”
“노력하기 나름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어려운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굳이 그렇게 말해 의욕을 꺾을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아르센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실제로도 틀린 말이 아니긴 했고. 아주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아니면 그만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
이런 아르센의 속마음을 바즈칼이 알아차렸다면 멱살을 잡아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좋아.”
그렇게 대답한 바즈칼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주위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형님?”
“저희 쪽 문화상 기사가 다른 기사에게 부하로 들어갈 수는 없고,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이라는 말을 들으니 진짜 깡패가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아르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잠시, 대장인들 형님인들 크게 상관이 있겠느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부하로 쓸 수 있다면, 호칭 정도는 취향 문제로 넘겨줄 수 있으니.
자기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형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소한 문제만 제외하면 괜찮아 보였다.
딱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한다면 말이다.
“난 자기 내키는 말만 들으려는 의동생이 필요한 게 아냐.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정말 부하가 아니라 동생처럼 굴면 곤란해. 내 말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거지. 가능하겠나?”
“물론이죠. 다만 5년이란 기간은 확실히 지켜주셔야 합니다. 무술도 제대로 가르쳐 주시고요.”
“좋아.”
아르센은 눈을 부리부리 뜬 바즈칼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르비크 사람들은 죄다 이상한 놈들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고개를 돌려 리노를 보며 물었다.
“저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네?”
“어쨌든 저놈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은 건 너니까, 어떻게 생각하지? 저 녀석이 네 동료가 된다 해도 괜찮겠나?”
아르센의 물음에 리노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상관없습니다! 어디 잘린 것도 아닌데요! 아니, 어딜 잘렸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아르센으로서는 부하가 얻어맞아 복수해 주겠다고 해놓고 어정쩡하게 끝나는 상황이라 예의상 물은 것에 불과했다. 솔직히 리노가 ‘안 됩니다!’라고 말할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기사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휘하에 들어오려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하찮은 사냥꾼을 배려했다는 것만으로도 리노가 감격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대답을 듣고 나서, 아르센은 바즈칼에게 선언했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바즈칼.”
“예, 형님!”
바즈칼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린 뒤 집에 들어오자, 엘로이즈가 한쪽 손을 쫙 편 채 높이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잠시 고민하던 아르센은 그것이 그가 가르쳐 준 하이파이브 제스처임을 깨닫고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맨손과 장갑이 마주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
아르센이 나가서 싸우는 동안, 엘로이즈는 집 안에 숨어서 마법의 눈을 몰래 띄워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마 바즈칼이 아르센을 압도하거나 많은 수의 부하들을 데려와 덮쳤다면, 당장 엘로이즈의 폭발 주문이 날아들었으리라.
다행히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이 순조롭게 풀렸지만.
“그러게 말이야. 이제 숨어 있기는 글렀지만···어쩔 수 없지.”
아르센은 한숨을 쉬며 다시 갑옷을 벗었다.
이래저래 일이 꼬이고 괴상하게 풀려, 결과적으로 기사 한 명을 얻게 되었다.
원래 계획보다 훨씬 빠른 진도였다.
“그런데 방금 그 기사, 너무 이상할 정도로 쉽게 진 거 아냐? 전에 동기들이랑 대련할 때도 그 정도는 아니던데. 걔들보다 못해 보였어.”
“환경 때문이지. 조금만 다듬어주면 금방 발전할 거야. 기량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잠시 갑옷을 닦고 있자,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대장님! 모두 데려왔습니다!]문을 열고 나서니 리노의 뒤에 여섯 사람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다.
그들은 아르센을 보더니 일제히 무릎 꿇고 엎드려 복종의 뜻을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장님!”
처음 리노의 설득에 다소 떨떠름하게 응했던 것과 달리, 아르센이 바즈칼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이들은 꽤 적극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같은 기사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보인 것만으로도 리더십을 입증한 것이다.
“리노에게 이야기는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네! 들었습니다!”
아르센은 힘차게 대답하는 여섯 명을 자세히 관찰했다.
못 먹고 자란 탓인지 다소 작은 키에 마른 체격,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지만 묘하게 생긴 것이 다들 비슷해 보였다.
거기다 다들 비슷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더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아르센은 우선 간단한 면접을 진행했다. 그의 부하가 되어서 해야 할 일, 목적의식, 의무, 보상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지, 책임져야 할 가족은 있는지 등.
나름 리노가 신중히 뽑아온 이들이라 그런지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인원은 없었다.
아르센은 그들 모두를 자신의 병사로 임명했다.
“일단 오늘부터 이 근처에서 묵도록 해라. 바로 훈련을 시작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은 리노와 아르센의 집 사이에 간단한 움막을 만들었다.
때때로 집이 없어져 노숙하는 이들이라 그런지 이런 것을 설치하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다.
잠시 후, 바즈칼의 부하들이 음식을 가져왔기에 아르센과 병사들은 음식을 펼쳐놓고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리노가 사 온 육포와 검은 빵은 비상식량으로 밀려났다.
푹 삶은 신선한 고기에 하얀 빵, 채소는 물론 ‘라티’라는 나르비크의 전통 향신료까지 있어 제법 호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향신료는 이제 거의 잊어가던 음식인 카레와 비슷한 맛을 냈다.
그것도 인도식이 아니라 한국에서 먹는, 은근한 강황 향이 담긴 달짝지근한 카레 맛.
얼굴도 익히고 친해질 겸, 아르센과 엘로이즈 역시 집에서 나와 이들과 함께 식사를 즐겼다.
물론 엘로이즈는 서로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아르센의 뒤에 몸을 숨기긴 했지만.
병사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장과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통한 권위는 이미 충분히 증명했기에, 아르센은 격의 없이 말을 걸고 농담을 던지며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제법 유쾌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르센은 자신이 지휘하게 될 부하들의 성격과 행동을 관찰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첫 번째 부하인데다 이들을 아르센에게 소개했기 때문인지 리노가 은연중에 병사들 사이에서 리더 취급을 받는다는 것.
리노는 아르센에게 가장 충성하는 인물인 만큼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를 부관 삼아 병사들을 지휘하고 통제하게 한다면 아르센이 해야 할 일을 상당히 덜 수 있을 테니까.
* * *
바즈칼은 조직을 정리한 뒤, 끝까지 자신을 따르기로 한 부하 다섯 명만을 데려왔다.
모두 바즈칼의 조직에서 가장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정예였기에, 그들이 합류하자 사냥꾼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군대의 질이 확 올라갔다.
거기다 내기는 내기였기에 바즈칼은 자신의 재산 역시 모두 바쳤는데, 거기에는 마수의 부산물을 이용한 무구나 기승수, 꽤 많은 양의 재물까지 있었다.
“생각보다 부자였군.”
솔직히 차림새는 별로 부자 같지 않았다고 속으로 되뇌고 있자니, 바즈칼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유서 깊은 조직을 물려받은 놈들은 이거보다 훨씬 재산이 많을 텐데요.”
바즈칼이 가져온 기승수는 모두 여섯 마리로, 유난히 부리가 날카로운 타조같이 생긴 동물이었다.
날개 대신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로 사족보행을 한다는 점이 달랐지만.
마수라는 존재는 언제나 기괴했지만, 네 발로 걷는 새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뭐라고 하지?”
“송곳새라고 합니다. 대장님. 가장 많이 쓰이는 기승수입니다. 겁이 많은 것만 빼면 쓸만합니다. 덤으로 고기도 맛있고요.”
리노의 설명에 아르센은 송곳새의 머리를 쓰다듬다 훌쩍 뛰어 탑승했다.
갑옷을 입지 않아도 큰 키 덕분에 제법 체중이 나가는 아르센이 올라탔음에도, 송곳새는 전혀 비틀거리지 않고 부동상태를 유지했다.
크기도 큰 편인 데다 다리가 굵고 힘이 강해, 사람 한 명 태우는 정도로는 거의 속도가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괜찮군, 이 정도라면···.”
“저, 실례합니다. 소문을 듣고 왔는데요···.”
아르센이 만족스럽다 평가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어물거리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누군가 보니 외부 지역의 사냥꾼 중 하나였다.
무슨 용무인지 뻔했기에, 아르센이 나서기도 전 옆에 있던 리노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조직원 모집 안 받아. 돌아가!”
“아···.”
바로 옆에 아르센이 쳐다보고 있는 탓인지, 사냥꾼은 망설이는 태도로 고개를 몇 번 돌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사라졌다.
그 방향을 한참 노려보던 리노가 아르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조심스럽게 얘기한다고 했는데 소문이 너무 난 거 같습니다.”
“아니, 아마 바즈칼이랑 싸운 게 원인이겠지. 어쩔 수 없다.”
강한 기사가 사냥꾼 사이에서 조직원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아, 아르센의 부하가 되길 원하는 사냥꾼이나 빈민들이 몇 번씩 찾아왔다.
하지만, 아르센은 당장 부하를 더 받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이미 지금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부하가 열 명이 넘게 있는데, 거기서 숫자만 늘려봐야 먹일 입만 늘어날 테니까.
인원이 늘어날수록 보급이 힘들어지는 것은 상식인 바, 기반도 재산도 충분하지 않은 지금 무작정 숫자를 늘려봐야 부하들을 굶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내실을 다질 때였다.
***
그로부터 며칠, 아르센은 몸이 두 개가 되었으면 싶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영지에서 배운 방식대로 병사들을 조련하는 한편, 바즈칼과는 일대일 지도 대련 시간을 가졌다.
당연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런 과정도 나름 비전이라, 수련 시간에는 엘로이즈가 작은 장막을 펼쳐 이들을 가렸다.
아르센과 리노의 집 사이에 있는 공터는 아르센이 군대를 육성하는 연병장이 되었다.
“쿨럭, 컥.”
13번째 대련 중, 목젖 앞을 가볍게 얻어맞은 바즈칼이 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힘겹게 숨을 고르는 그를 보며 아르센은 격려를 보냈다.
“많이 늘었어. 이제 제법 싸울 줄 알게 됐는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형님!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정도 간단한 요령을 알려줬을 뿐인데도, 바즈칼의 실력은 빠르게 늘어났다.
이미 힘과 속도가 충분하고 혼자 무기를 휘두르며 수련한 기간이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못된 버릇 몇 개는 고쳐지지 않고 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벨루안 기준으로 갓 서임받은 초보 기사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줄 만했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배울 건···.”
[센, 무장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어!]갑자기 귀걸이를 통해 들려온 엘로이즈의 다급한 목소리.
아르센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오리라 예상했던 것이 왔을 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