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57)
어둠, 그것은 예로부터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였다.
죽음 앞에서도 겁먹지 않을 용맹한 용사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하고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듯이.
하물며 이 세계에서 어둠에 대해 가지는 공포는 지구인이 가진 막연한 그것보다 더 현실적이다.
어둠 속에 사는 존재들은, 밝은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따뜻한 고기와 피를 노리기에.
쉬르륵-
쇠가 마찰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팔뚝에서 몸통 크기쯤 될 법한 벌레들이 벽을 타고 접근했다.
마법의 빛으로 어슴푸레 비치는 그 모습은 흉측하기 짝이 없다.
사슴벌레처럼 쩍 벌어진 위턱에, 자유자재로 움직일 정도로 긴 목을 가진 놈.
수백 개의 발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가운데 다리 관절마다 입이 달려 따닥거리는 놈.
입 안에 입이 있고 그 안에 또 입이 있는, 그래서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뽐내며 쉭쉭 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과거의 상식을 들이미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1m가 넘는 뒤틀린 생김새의 곤충이란 지나치게 초현실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생김새가 제각각일지언정, 이런 벌레 형태 마수들의 약점은 대체로 비슷했다.
“엘리, 불!”
“알았어!”
아르센의 지시에 답하고자, 엘로이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마법을 시전했다.
두 손에서 빛이 한 번 번뜩인 후, 화염방사기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불길이 쏟아져 복도 전체를 뒤덮었다.
어중간한 마법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화력으로.
십여 초 정도 불길이 쏟아지며 벽을 핥은 뒤, 엘로이즈의 손에서 빛이 사라지며 화염 역시 힘을 다했다.
불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벽에 붙은 그을음만이 곤충들의 존재를 증명할 뿐.
당연히 순식간에 싹 타버린 것은 아니고, 아마 대부분 저 밑으로 떨어졌으리라.
그것을 입증하듯, 숯처럼 새카맣게 탄 곤충 잔해 몇 개가 계단 위에 널브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치워라.”
이곳에 온 이래, 짐이 실린 송곳새를 호위하기만 하던 병사들에게 처음으로 할 일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병사들은 창의 자루를 이용해 잔해를 밀어 계단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센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마수가 많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왔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만약 늘 이랬다면 보통 사냥꾼들은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바즈칼과 리노 역시 이에 동의했다.
이미 그들은 나선 계단을 내려오며 크게만 두 차례, 작게는 여섯 차례 공격을 받았다.
물론 일행의 절반 가까이가 마법사인 그들로서는 전혀 어렵지 않은 상대였지만, 대여섯 명 정도의 소규모 사냥꾼 패거리였다면 이미 전멸했을 것이다.
“어쨌든 계속 전진하지. 마룬 경, 아래로 빛을 더 밝혀 주십시오.”
“물론이죠! 이봐, 빛 만들어 봐.”
아르센은 별부리미의 마법사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 마룬을 통해 간접적인 지시를 내리는 방식을 취해야 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협조자로서 온 것이지 부하로 온 것이 아닌 탓이다.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아르센이 마룬의 병사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은, 반대로 마룬이 아르센의 병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
“도착했다!”
몇 분인지, 몇십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 마침내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한 병사가 괜히 소리를 질러 호들갑을 떨다 주위의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주위를 계속 경계해라.”
계단 밑에는 그들이 조금 전 위에서 걷어냈던 벌레 사체가 가득했다. 미처 모두 연소하지 못하고 남은 잿더미들이.
그것을 밟을 때마다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바삭한 소리에 저절로 귀가 가려워질 지경이었다.
계단 밑에 내려오고 보니 주변에 더 달려드는 벌레 무리는 없었다.
“밑에 벌레 놈들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놈들도 우리의 용맹에 겁을 먹은 거 아니겠습니까?”
마룬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아르센은 주위를 계속 관찰했다.
반쯤 망가진 문 너머로 쭉 뻗은 복도가 있었다.
지금까지 내려온 것만도 깊었건만, 복도는 수백 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길었다.
“이제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좌우에 있는 길은 가봐야 별거 없고요.”
바즈칼의 말에 따라 일행은 좌우에 난 통로를 무시하고 쭉 직진했다.
문을 몇 개 지나는 내내 생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간혹 찐득거리는 배설물 비슷한 무언가가 눈에 띄기는 했다.
밑에서 기어 올라왔던 벌레들이 남긴 것으로 보였다.
“크으, 냄새가 아주 그냥.”
“다 태워버리죠! 모두 화염 주문을···.”
“잠깐.”
아르센은 배설물을 태워버리려는 마룬을 제지했다.
마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아르센은 천천히 그 이유를 설명했다.
“조금 전처럼 넓은 공간이면 몰라도 여긴 천장이 낮잖습니까. 연기가 차게 되면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요!”
천장은 4m 정도로 그리 높다 볼 수 없었다.
기사라면 그 자리에서 도약해 가볍게 천장을 찍을 수 있는 수준이니.
저 배설물이 불타며 유독한 물질을 뿜기라도 한다면 이 자리가 그들의 무덤이 될 터였다.
마침내 복도의 끝에서, 그들은 기묘한 문과 마주했다.
오는 길에 몇 번 지난, 세월의 흔적을 받아 망가진 문과는 전혀 다른 재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다.
묘하게 온기까지 느껴질 듯한 질감은 차라리 살아 숨 쉬는 생물에 가까웠다.
“이겁니다. 이게 바로 저주의 문입니다.”
일행은 문을 앞에 두고 둥그렇게 둘러섰다.
아르센의 시선이 문의 양옆에 위치한 벽에 닿았다.
그곳에는 곡괭이로 찍은 듯 돌벽이 부서진 흔적이 있었고, 안쪽에는 실금조차 가지 않은 금속 재질의 벽이 보였다.
문을 열 수 없어 좌절한 누군가가 옆으로 돌아 들어가려 파낸 흔적으로 보였다.
“이런 방어조치를 취해놓는 경우 대부분 사방의 벽도 막아놓죠.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우회로를 뚫을 수 없노라고, 마룬이 즐겁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르센 역시 내심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기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때, 리노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일단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대장님.”
“···그래. 가라, 리노.”
한 번도 ‘저주의 문’을 만져본 적 없는 탓인지 리노는 다소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문 앞으로 다가가 손을 들이댔다.
리노가 문에 손을 댄 순간, 문이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탉뷜로훌므메난달라수크토라-]마치 망가진 라디오에서 들리는 듯한 일그러진 소리는 차라리 소음에 가까웠다.
그저 시끄러운 노이즈를 결합한 것으로만 들리는 소리.
아르센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주위를 슬쩍 둘러봐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기색인 사람은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 있나?”
“···아뇨, 모르겠습니다.”
“마룬 경은요?”
“저도 모릅니다.”
“저게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모른다···리노, 일단 손 떼라.”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최대한 감정의 동요를 감추고자 노력했다.
그는 조금 전 문이 한 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해 문에서 나오는 언어 자체는 인식할 수 없었고, 말의 의미 자체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엘로이즈와 귀걸이로 대화할 때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이질적인 느낌으로, 따지자면 텔레파시에 가까웠다.
-경고, 당신은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종족입니다. 접근 시도를 중지해 주십시오. 30초 후, 자기방어 조치가 실행됩니다. 경고, 당신은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종족이라고?’
당연하지만 리노는 귀가 길지도 않고, 난쟁이도 아니었으며 몸에 비늘이 달려 있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 세상에 엘프나 드워프 같은,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이종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종족’으로 여겨진단 말인가?
“바즈칼, 여기 왔던 게 기사로 각성하기 전이랬나?”
“맞습니다, 형님. 거의 십 년 전쯤이었죠.”
“한번 문에 손을 대 봐.”
바즈칼은 반발 없이 순순히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찬가지로 ‘허가되지 않은 종족’이라는 신호가 아르센의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그만. 마룬 경, 한번 시험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말입니까? 뭐···알겠습니다.”
마룬 역시 손을 댔지만 똑같은 반응이었고, 일반 마법사 한 명을 시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일반인, 기사, 마법사, 심지어 보기 드문 마법 기사까지. 네 부류의 사람이 모두 있음에도 문은 ‘허가되지 않은 종족’에게는 문을 열어줄 수 없노라 주장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르센은 진에서 내린 뒤 문에 손을 얹었다.
[뮐랍돟래휄이돯람살랁수드-]똑같이 깨진 듯한 음성이긴 해도, 몇 번 반복되던 이전의 소리와는 다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르센의 머릿속에서 전해지는 의미 역시 전과 달라졌다.
-출입 허가,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인님-
마치 자동문처럼 좌우로 부드럽게 열리는 문.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간 침입자를 용납하지 않았을 신비한 공간이 간단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진짜 열렸네.”
“이럴 수가.”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니, 실로 신화에서나 나올 이야기가 아닌가.
모두가 그렇게 감탄하고 놀라는 가운데, 아르센은 가장 앞서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차이점은 공기였다.
지하 특유의 텁텁하니 먼지 낀 그것이 아닌, 에어컨이라도 튼 것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폐를 채웠다.
벽에는 온갖 색이 입혀진 화려한 장식품이 방을 수놓았다.
“오오, 굉장히 보존이 잘 된 공간이군요! 이런 곳은 드물다고 들었는데!”
마룬의 호들갑을 뒤로 한 채, 아르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식품, 펜, 책상, 의자···많은 물건이 있었지만, 그는 고고학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을 주워다 수집가에게 팔겠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대장님, 여기 보십시오!”
옆방으로 들어간 리노의 부름에 다가가 보니 병사 두 명이 어떤 방의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문은 잠금장치로 잠겨있기라도 한 것인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저주의 문’처럼 마법적으로 막힌 것은 아니고, 덜걱거리는 모양새로 보아 뒤에 빗장 같은 것이 걸린 듯했다.
두드리고 당기고 무기로 문틈을 찌르는 등, 애쓰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다 못한 바즈칼이 직접 나섰다.
“비켜봐, 새끼들아!”
병사들을 물러나게 한 뒤, 바즈칼은 두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겼다.
끄응, 하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고 있자니 문 너머에서 빠직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후, 애먹이고 있어. 열었습니다, 형님!”
“고생했다. 마법을 썼으면 더 편했겠지만.”
“아.”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바즈칼을 뒤로 하고 아르센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무기고 아닐까?”
뒤따라 들어오던 엘로이즈의 말에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한쪽에는 잘 제련된 한손검이, 다른 한쪽에는 상반신을 가리기 충분할 정도로 큰 방패가 걸려 있었다.
“여기가 진짜로군.”
검과 방패의 재질은 고대 유물답게 훌륭했다.
아르센의 흑성철 무구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르비크 출신 병사들이 가진 조야한 마수 부산물로 만들어진 무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심지어 벨루안의 일반 병사나 종자들이 쓰던 무구와 비교해도 훨씬 질이 좋아 보였다.
“경비병들에게 지급하는 무구인 모양이군요! 예술적이네요, 이 방패의 무늬하며···.”
검과 방패는 삼십 개가 넘었다.
계약에 따라 그중 절반은 마룬에게 분배됐고, 나머지 절반은 아르센의 소유가 되었다.
아르센은 곧장 무구로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추레하기까지 한 마수 가죽 갑옷을 입고 멋들어진 무기와 방패를 든 병사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도둑질한 물건을 든 도적의 모습이어서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안쪽에는 또 다른 기물(奇物)이 있었다.
투구와 방패, 그리고 지팡이 두 개.
조금 전 얻은 검과 방패가 양산형이라면, 이것은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느낌이 풍겼다.
엘로이즈가 귀걸이를 통해 몰래 신호를 보내왔다.
[센, 저 물건들은 아까 전 유물이랑은 차원이 달라. 훨씬 강력한 마법이 걸려있어.]“일단 이 물건은 가지고 나가서 분배하죠. 기능을 확인해야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옮기는 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마법 배낭에 유물을 보관한 뒤 주변을 좀 더 뒤졌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무기나 방어구 외의 다른 물건 중에는 특별히 강력한 마법이 걸린 유물이 없었고, 그나마 챙길만한 거라면 끊임없이 잉크가 나오는 깃펜같은 물건 정도.
모두가 출구 앞에 선 뒤, 아르센은 다시 한번 문에 손을 얹었다.
-출입 허가, 안녕히 가십시오. 주인님-
다시 자동문처럼 스르륵 열리는 문.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아르센의 얼굴이 굳었다.
“모두 정지, 뒤로 물러서라!”
문의 방음 효과가 완벽했던 탓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했건만, 문밖은 이미 기묘한 소음에 점령당해 있었다.
끊임없이 따닥거리고, 마찰하고, 쥐어짜는 듯한 소리.
그것이 셀 수 없이 많은 벌레 마수들이 내는 소리임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