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59)
적막한 복도에는 오로지 발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에 있던 모든 벌레 마수들이 다 덤벼들었던 것인지, 천천히 전진하는 일행을 막아서는 적은 없었다.
아르센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 선을 따라 앞장서서 일행을 인도했다.
우측으로 한번 돌고, 앞으로 쭉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고.
가면 갈수록 점점 벌레의 배설물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가 심해졌다.
이제 바닥은 물론, 좌우에 있는 벽까지 모두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걷던 가운데, 병사 하나가 힉 하고 숨죽여 비명을 질렀다.
“뭐지?”
“대, 대장님···여기, 이게.”
병사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덜 소화된 듯한 팔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소화액에 피부가 벗겨졌는지 분홍색 속살을 드러낸 그것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과 납작한 손톱이 달려있어, 누가 보아도 인간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위에서 땅 파던 놈들이 어디 갔는지 이제 알겠군요.”
리노가 허탈하다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인간을 먹다 흘린 부스러기처럼 취급한 모양으로 보아, 이 앞에 있는 것이 인간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팔을 놓고 조금 더 걷자니, 눈앞에 꽉 닫힌 문이 나타났다.
금속으로 된 문과 살점이 뒤섞여 만들어진.
“문이군요.”
“열어볼까요?”
바즈칼은 조금 전 학습한 것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다짜고짜 다가가 문을 열려고 들지 않았다.
애초에 정체 모를 살점으로 된 문에 손을 대기 싫었던 것 뿐일 수도 있겠지만.
“부탁할게, 엘리. 큰 걸로 한 방 부탁해.”
“응.”
진을 움직여 앞으로 나선 엘로이즈가 주특기 중 하나인 폭발 주문을 시전했다.
생물이 아닌, 물체를 파괴하는 데 가장 뛰어난 주문.
잠시 후, 굉음과 함께 문이 산산이 조각나며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바람!”
마룬의 외침에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연기를 쓸어냈다.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왼쪽 팔을 들어 내밀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팔찌가 하나 감겨 있었다.
마법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아르센은 그 팔찌가 유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게 바람을 일으키는 유물이군. 모두 같은 걸 가진 걸 보면 흔한 물건인가?’
“이야, 한 방이네요. 역시 대단합니다. 우리 중에서도 아가씨 정도의 마법사는 거의 없는데···.”
엘로이즈가 대답하지 않자 마룬이 조금 무안한지 웃었지만, 지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부서진 문 너머에 쏠려 있었기에.
부서진 문 너머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아르센을 비롯한 기사들은 그 너머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법사 중 한 명이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자 마법의 빛을 앞으로 보냈다.
■■■■■■■■■■—-!
마치 빛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안에서 끔찍한 포효가 들려왔다.
새된 고음이 귀를 찌르는 듯했기에, 몇몇 병사들이 무기를 놓치고 귀를 막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쪽의 내용물을 보았기에, 아르센은 상대가 내지른 포효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도, 먹잇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포식자를 앞에 둔 겁먹은 개의 울부짖음에 불과했다.
“겁먹지 말고 따라와라.”
그렇게 말하며, 아르센은 가장 먼저 앞장서서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배.
배가 어찌나 큰지, 몸을 굴리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외관은 그것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무수히 많은 다리는 배로 인해 붕 떠 있어 땅을 밟을 수조차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상반신과 머리는 몸통 위에 얹힌 부속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아르센은 저 작은 머리에서 그렇게 큰 포효가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이건 도대체···뭡니까?”
“글쎄, 여왕개미?”
방 안 여기저기에는 죽은 무언가의 시체가 꽤 많이 있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털 달린 동물 같은 무언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여왕’은 다른 벌레 마수, 즉 자기 자식들을 동원해 바깥에서 먹잇감을 사냥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체 사이로, 사람의 머리 크기에서 상반신 크기쯤 되는 알 수백 개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이 지하 유적을 거점으로 삼아 서서히 세력을 불려 나가고 있었을 터.
아르센의 군대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조만간 나르비크는 엄청난 재앙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싸웠던 것의 열 배, 백 배쯤 되는 수의 벌레 마수들이 몰려들었다면 나르비크의 모든 기사가 합세해도 승산이 없었을 테니까.
‘그놈들에게 이득이 됐다니 좀 불쾌하긴 하군.’
그래도 나르비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셈이니, 나름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지배력의 한계가 없었다면 모든 인류에 대한 위협이 되었을지도 모를 놈이니 결국 죽여야 했을 것이기도 하고.
끼이이-
주변에 있던 알 하나가 퍽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안에서 작은 벌레 마수 하나가 질척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모양새를 보자니 조금 전 그들을 습격했던 마수 중 하나와 똑 닮아 있었다.
확실히, 그들을 습격한 벌레 마수들은 모두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존재들인 모양이었다.
이제 갓 태어난 마수들 역시 눈앞의 모체와 반투명한 실로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이건···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아르센은 자신을 향해 기어오는 작은 벌레 하나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짓밟았다.
와드득하고 짓이겨지는 소리가 난 뒤, 벌레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전부 다 터트려.”
병사들은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듯 환호하며 주위에 있는 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죽을 뻔한 고비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상당했던 것인지, 알을 터트린 뒤 그 안의 시체까지 꼼꼼히 짓이기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파괴적인 쾌감이 엿보였다.
마법사들 역시 마법 주문까지 펼쳐가며 처리하는 모습이 꽤 분이 쌓여있던 듯했다.
이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는 행각에 여왕은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며 사악한 인간들을 제지하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아르센이 그것을 용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진을 탄 채 다가서자 여왕은 입에서 걸쭉한 녹색 액체를 뱉었다.
“오.”
이를 맞아줘야 할 의무는 없는 만큼, 아르센은 왼손에 든 방패를 내밀어 독액을 막아냈다.
미리 가열 주문을 발동시킨 상태였기에, 날아오던 독액은 방패에 닿자마자 치익 하고 증발하는 소리를 내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아르센은 혹시 숨을 쉬면 중독될까 싶어 잠시 숨을 참은 채, 방패를 붕붕 휘둘러 연기를 밀어냈다.
그때, 갑자기 여왕이 몸을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자 아르센은 이를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키이이이···
놀랍게도, 여왕은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음을 알아채자 애원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무거운 몸뚱이를 기울여 앞으로 눕힌 뒤 머리를 조아리는 그 모습은, 굴종 외의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 어려운 동작이었다.
보통 지능이 높지 않은, 그리고 극도로 공격적인 개체가 대부분인 마수로서는 기이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옆에 서 있던 바즈칼이 기가 찬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허, 이놈 지금 살려달라고 비는 겁니까?”
“아마도.”
“웃기는 놈이네요. 설마 저러면 진짜 자기를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나?”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바즈칼의 말과 달리, 아르센은 잠시 고민했다. 이 녀석을 살려주면 써먹을 수 있을까? 벌레 마수로 된 군대라던가···.
그렇게 잠시 유혹을 느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꼭 이런 헛된 야망을 꿈꾸던 이들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던가.
정서적으로도 마수를 부린다는 행위에 거부감이 들었으며, 무엇보다 이 ‘여왕’은 지나치게 똑똑한 놈이었다.
여기서 죽이지 않고 내버려 뒀다가는 나중에 후환거리가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럴 리가.”
한참 고민했다는 티는 전혀 내지 않은 채, 아르센은 망설임 없이 여왕의 목을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
조금 전의 느릿한 움직임과 달리, 여왕은 믿을 수 없는 순발력으로 몸을 젖히며 포효했다.
덩치만큼 생명력도 강한 것인지, 목에서 새파란 피를 분수처럼 뿜으면서도 당장 숨이 멎을 기색은 없어 보였다.
‘일격에 목을 자르려고 했는데.’
뼈가 잘리지 않고 걸리는 느낌이 손에 남아있어, 아르센은 다소 낭패한 기분을 느끼며 검을 털었다.
이제 여왕은 바닥이 울릴 정도로 몸을 버둥대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엘로이즈가 말했다.
“내가 마법으로 공격할까? 집중 좀 하면 한 방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냥 기사들끼리 잡아볼게. 이 정도 크기면 뭔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대형 마수 중 일부는 마력이 응집된 구체, 흔히 ‘마력핵’이라 불리는 물질을 떨어트린다.
진의 심장으로 사용되는 이 물질은 굉장히 귀해서, 벨루안에서는 이 마력핵의 숫자가 곧 진의 숫자를 의미했다.
다른 부품을 모두 만들더라도 그것 없이는 진이 완성되지 않기에.
엘로이즈의 마법은 섬세한 파괴와는 거리가 먼 만큼, 자칫하다 핵이 손상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바즈칼, 다리와 몸통 바깥부터 천천히 저미듯이 공격해라. 마룬 경도 부탁합니다. 마법은 사용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형님!”
“예, 아르센 경!”
세 기사는 힘을 합쳐 여왕을 몸 바깥쪽부터 천천히 토막 내기 시작했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에 여왕은 처절하게 울며 독액을 분사했지만, 머리 근처에서 이를 기다리던 아르센이 가열 방패를 들이대자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거대한 몸통을 굴려 깔아뭉개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기사를 잡기에는 지나치게 둔한 공격이었다.
진에 탄 아르센과 마룬은 물론, 바즈칼이 탄 거대 호랑이 역시 그런 공격에 잡히기엔 너무나도 날렵했다.
“손맛 좋다!”
“이번엔 여기다, 이놈아!”
바즈칼과 마룬은 의외로 죽이 맞는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소리치며 여왕의 몸뚱이를 토막 냈다.
독액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 아니라면 아르센이 끼어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우우···
잠시 후, 마침내 몸의 사분지 일 이상이 깎여나가고 나서야 여왕은 대지에 몸을 눕혔다.
이미 세 기사 모두 여왕의 몸에서 뿜어진 파란 피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나마 금속제 전신 갑주를 입은 아르센과 마룬은 갑옷 색상이 바뀐 정도였지만, 마수 가죽과 갑각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바즈칼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썅, 뭔 냄새가···이건 핏물 빠지지도 않겠네!”
“나중에 갑옷이 나오면 하나 챙겨주지.”
“꼭 좀 부탁드립니다. 형님!”
넙죽 허리를 숙이는 바즈칼의 모습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웃었다.
그도 잠시, 아르센은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고자 여왕의 머리 옆으로 다가갔다.
이제 반쯤 빛이 사라진 네 개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며 주변을 관찰했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겠다는 듯.
“잘 가라.”
조금 전, 기습적인 공격이 의외로 쉽게 먹히지 않았음에 아르센은 방패를 진에 걸고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뒤 모든 힘을 실어 내려찍는 일격.
완력과 체중, 그리고 마력까지 실은 덕에 깔끔하게 목뼈가 잘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도 남은 게 있었는지, 다시 한번 잘린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이겼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바즈칼의 외침에 옆에서 리노가 큰 소리로 화답했다.
이에 주변을 돌아보니, 병사들 역시 주변에 있던 많은 수의 알을 모두 부순 모양이었다.
“고생했군, 리노.”
“아닙니다! 그냥 알만 부쉈을 뿐인데요.”
잠시 리노를 격려하고 있자니, 여왕의 온몸을 은은히 감싸던 마력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여왕의 몸통과 배 사이 어딘가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구체의 형상이 보였다.
그 부분을 갈라내자 마력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그게 마력핵입니까?”
“그래.”
* * *
지상으로 올라와 보니 이미 태양은 오간 데 없이, 녹색 달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일행은 그나마 벽이 멀쩡한 건물 옆에 야영지를 꾸렸다.
당연히 아르센의 병사들과 별부르미의 마법사들은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반으로 나눠 진영을 꾸렸지만, 그 분위기는 처음보다 훨씬 온건했다.
온종일 지하에서 사투를 벌이느라 생긴 유대감 덕분이었다.
아르센은 품 안에서 구슬을 꺼내 눈앞의 모닥불에 비춰 보았다.
검은색에서 밝은 자주색으로 그라데이션을 입힌 것처럼 물결치는 색상.
누가 봐도 자연적인 물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다 쓸 거야?]옆에서 함께 걷던 엘로이즈의 물음에 아르센은 덤덤히 대답했다.
[앞으로 봐서. 새로 진을 만드는 것도···.]아르센은 말끝을 흐리며 건너편에 있는 바즈칼을 보았다.
바즈칼은 신나게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기승수인 거대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생각해 봐야겠지만, 정작 바즈칼은 자기 기승수에 꽤 만족하는 거 같네.] [아니면 내가 그걸로 유물이라도 새로 만들어 보려고.] [일단 나중에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 정할 필요는 없는 문제니까.]아르센은 눈을 감은 채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오늘만 몇 번이고 전투를 치른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기에.
조금 눈가가 시원해졌다고 느껴질 무렵, 아르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던 마룬에게 다가갔다.
“마룬 경, 잠시 시간 괜찮습니까?”“네? 물론이죠! 무슨 일이시죠?”
“그쪽 장로님과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마룬 경도 같이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아, 무슨 일로···?”
마룬은 뜻밖에도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서운 할아버지가 있는 시골집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처럼.
“이번 유적에서 얻은 물건의 분배도 있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거에 대해서라면 그냥 저랑···.”
“판단하고 책임질 권한이 있으십니까?”
아마 없으실 것 같은데, 라는 뒷말은 삼켰다.
설마 눈치가 없다 해도 이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마룬은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탁탁 두드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