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60)
다른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간 뒤, 엘로이즈가 마법으로 소리를 막는 장벽을 쳤다.
행여나 누가 엿듣지 못하도록.
그리고 수정구를 꺼낸 뒤 마력을 불어넣었다.
저 멀리 떨어진 북쪽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형제와 연결될 수 있도록.
[라티스입니다.]“반갑습니다, 라티스 장로.”
[아르센 경, 유적 공략은 잘 진행되셨습니까?]“염려해주신 덕분에.”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아르센은 본론을 말했다.
유적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어떤 식으로 공략했는지, 그리고 또 다른 위협이 있었다는 것까지.
당연히 ‘저주의 문’에서 들려온 다른 목소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선 이번에 유적에서 얻은 유물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일단 마법이 걸린 검과 방패는 간단히 절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아르센 역시, 당장 필요한 만큼의 무장은 다 갖췄기에 더 필요 없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물건은 충격파 지팡이, 가열 방패, 마법 시야 투구. 이 세 가지 유물이었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귀물(貴物)이라, 가치를 나누기도 힘들 물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도 불명인 황금색 지팡이까지.
[사용법을 알 수 없다고 하셨던가요?]“맞습니다.”
[으음······그것까지 합치면 네 개군요.]“일단 제가 생각한 분배안은 이렇습니다.”
아르센의 제안은 간단했다.
유적 안에서 사용했던 그대로 가열 방패와 마법 시야 투구는 아르센에게, 충격파 지팡이, 그리고 숫자에 맞춰 정체불명의 지팡이까지 마룬에게 분배할 것.
불공정한 분배라 여긴 탓인지, 수정구 너머에서는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투구는 별부르미 쪽에선 쓸모없는 물건 아닙니까? 별동대는 전부 마법사니까요. 차라리 저희 쪽에서 쓰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겁니다.”
아르센은 투구에 숨은 다른 기능, 활성화된 마법을 간파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굳이 협상에 불리한 정보를 줄 필요는 없고, 나중에 알려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 와서 알게 됐다고 하면 그만이니.
거기다 마법사가 쓸 경우 시야 혼란을 유발하기에 실제로 쓸모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저희 쪽에서 크게 쓸모없는 유물을 대신 받아주는 셈 아닙니까. 사용해 본 사람으로서, 마룬 경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마룬 경?”
“어, 저기, 전···그러니까.”
마룬은 아르센과 수정구를 돌아보며 말을 흐렸다.
그런다고 라티스가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리 없을 텐데도.
여기서는 잘 모르겠다 얼버무리는 쪽이 올바른 판단이겠지만, 아르센이 보기에 마룬은 그런 판단을 내릴 정도로 약삭빠르고 눈치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장로님. 제가 써봤는데······.”
역시나, 마룬은 솔직하게 느낀 그대로를 말하기 시작했다.
마력을 볼 수 있는 마법사의 시야와 겹쳐져 어지럽게만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사실상 별동대 쪽에서는 가져가 봐야 의미 없는 물건일 거라는 것까지 전부.
그를 도와야 할 아군이 오히려 이렇게 뒤통수치는 소리를 하는 탓일까, 잠시 후 돌아온 라티스의 대답에는 허탈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먼저 지불하셔야 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벨루안에서 떠나기 전에 저희에게 빌려 가신 물건 말입니다.]“그거라면 이미 갚았습니다. 마룬 경에게 그대로 돌려드렸죠. 다행히 그거 말고도 쓸 만한 재산이 생겨서요.”
바즈칼의 재산을 얻은 덕분에 기존에 가져왔던 상단의 물건은 큰 쓸모가 없어졌다.
물물교환용으로 대충 가볍고 보관하기 쉬운 것들을 쓸어왔을 뿐이니 당연한 일.
아르센은 마룬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그것부터 정산했다.
당시 물건을 가져가며 작성한 목록까지 보여주며 대조한 만큼, 마룬은 별생각 없이 물건을 받았다.
빛을 내는 돌멩이 몇 개가 빠졌지만, 마룬이 보기에 그건 그냥 잡동사니 수준이라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당연히, 라티스 장로의 분노는 마룬에게 향했다.
[마룬!]“어···혹시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저는 그냥 빌렸던 걸 갚으신다고 해서 받았을 뿐인데요.”
마룬의 얼빵한 대답에 기가 막혔는지, 잠시 수정구 너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한탄하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거웠다.
[아니, 아니다······이래서 대장으로 기사가 아니어도 되니까 다른 놈을 보내자고 한 거였는데.]마룬은 뭔가 잘못한 것을 깨달았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고 있었다.
모두가 침묵한 상황에서,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의 일정을 얘기해 보죠. 이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되는 겁니까?”
감정을 가다듬으려는지, 수정구 너머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아뇨, 남쪽으로 바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은 서쪽으로 갈 예정입니다.]“어째서입니까?”
수정구 너머에서 잠시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마치 자세를 바로잡아 앉으려는 것처럼.
[이제 저희와 본격적으로 합동작전을 하게 되었으니,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죠. 아직 저희에 대한 불신이 남으신 것 같으니.]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라, 아르센은 쓰게 웃으며 받아쳤다.
“거래에 개인감정을 섞진 않습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본격적인 이야기란 게 뭡니까?”
[저희가 누구인지, 무엇을 찾는지······일단 좀 옛날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아르센은 눈을 크게 뜨며 수정구를 응시했다.
라티스는 우선 자신의 조직, 별부르미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초에, 저희 조직의 수장이 일기장 하나를 얻었습니다. 고대 마법사의 일기장이었죠.]“고대 마법사 말입니까?”
슬쩍 마룬을 보니 그다지 흥미 있어 보이는 눈치는 아닌 게, 아마 마룬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 듯했다.
[그가 남긴 바에 의하면, 고대 마법사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날아다니는 배를 띄우고, 손짓 한 번에 산을 허물고,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다소 허황된 얘기 아니냐, 하고 반문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아르센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마법사의 일기에는, 훗날 있을지 모를 재앙을 대비해 문명의 모든 지식을 담은 도서관을 하늘에 띄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하늘의 별자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요. 그는 직접 도서관을 띄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하죠.]“별자리······말입니까?”
“말도 안 돼.”
옆에서 들려온 엘로이즈의 반응이야말로 이 세계의 보통 사람이 할 만한 대답일 것이다.
믿지 못하거나, 말도 안 된다고 비웃거나.
하지만 아르센은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를 떠올렸다.
인공위성.
고대 마법사들의 기술력이 그 정도라고는 믿을 수 없지만, 라티스의 말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바는 그것이었다.
[이를 하늘의 도서관이라 칭하니, 그것을 다시 지상에 돌려놓아 그 지식을 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위대한 고대인의 마법을 다시 손에 넣는다면 아르센 경 역시 원하시는 바가 뭐든 이룰 수 있겠지요. 벨루안 영주의 회복이든, 영지의 탈환이든.]라티스의 목소리가 끊긴 뒤에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아르센과 엘로이즈 둘 다, 이 허황되게 여겨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별부르미라는 이름이 그런 의미였나?’
내심 운석이라도 떨어트리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르센의 생각보다는 훨씬 온건한 의미였던 모양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아르센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그 도서관을 부르기 위해선 남부로 가야 한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도서관을 부를 수 있는 곳은 남부 엘레노르 영지 인근에 있는 유적입니다. 그곳에서 아르센 경이 직접 불러주셔야 합니다. 자격 있는 자 외에는 그 누구도 부를 수 없으니까요.]“이미 시도해보신 겁니까?”
[제가 본 건 아니지만, 최초에 일기장을 발견한 저희 조직의 수장께서 시도해 보셨다더군요. 당연히 실패했지만요. 이후 ‘계승자’, 그러니까 모든 유적의 인정을 받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계승자만이 도서관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계승자라는 게 정확히 뭡니까?”
이 질문을 하며 아르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유적에서 ‘저주의 문’에게 들은 말이었다.
‘당신은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종족입니다.’라는, 아르센을 제외한 모두에게 선언됐던 정체불명의 문구.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건, 그저 계승자만이 고대인의 유적을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뿐입니다.]“그럼 지금 바로 남부로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에 대해선 조금 전 이야기를 이어서 해야겠군요. 저희 조직의 수장은 무리를 모아 계승자를 탐색했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부르고자 유적으로 향했죠.]“그리고?”
[유적이 있는 영지, 엘레노르의 영주에게 공격당했습니다. 그의 영지를 몰래 지나간 것 외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수장과 여러 원로 마법사들이 돌아가셨고, 계승자도 죽었습니다. 그 외에도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로 큰 손해를 입었죠.]라티스의 목소리는 얼핏 듣기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것처럼 들렸지만, 안에서는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엘레노르의 영주는 저희가 가지고 있던 유물을 모두 빼앗은 덕분에 더 큰 세력을 꾸렸습니다. 지금은 몇 개의 영지를 통치하며 남부에서 왕국을 자칭하고 있죠. 이제는 거인왕 나르도크라는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저희가 남부로 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자 때문입니다. 당시 마법사 중 상당수가 포로로 잡힌 만큼,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는 절대 자기 왕국에 들어온 침입자가 유적으로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이미 그자가 도서관을 불렀을 가능성은요? 그가 따로 계승자를 확보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도서관을 부르기 위해서는 계승자뿐만이 아니라 암호가 필요하니까요. 당시 수장께서는 암호가 적힌 종이를 따로 감춰둔 뒤, 본인만 알고 계셨습니다. 애초에······정말 도서관을 불렀다면 이미 그자가 세상을 정복했겠죠.]복잡한 이야기에 아르센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표정인 엘로이즈는 물론, 마룬 역시 조금 전과는 달리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여기까지는 듣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암호는 어디 있습니까?”
[서쪽에 있는 유적 중, 우리가 물건을 남겨둔 곳이 있습니다. 계승자가 없으면 통과할 수 없는 유적 안에 말입니다. 암호 역시 그곳에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야 하는 첫 번째 이유기도 하죠.]“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뭡니까?”
[지하 동굴입니다.]“지하 동굴이요?”
[고대인들이 만든 비밀 통로죠. 서부에서 남쪽 끝, 해안까지 이어지는 어마어마하게 긴 동굴입니다. 아, 해안이란···]“그거까진 설명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 동굴을 통해 거인왕의 영지에 몰래 침입하는 것이 계획입니다.]“처음부터 그렇게 하셨으면 됐을 것 같은데요.”
[동굴의 존재를 알게 된 게 고작 몇 년 전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겁니다.]“아.”
잠시 대화가 끊기고, 아르센은 앉은 그대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도서관, 암호, 거인왕, 동굴······
라티스의 말에 어떤 허점이 있나 찾아보려 했지만, 일단 지금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이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승자만이 남부에서 도서관을 불러올 수 있고, 암호는 과거 별부르미가 숨겨놓은 유적에 있다. 암호를 찾아내 비밀통로로 가서 도서관을 부른다······.
“그래서, 뭘 하려는 겁니까?”
“별부르미의 목적 말입니다. 도서관의 지식을 얻어서 하고 싶은 게 뭡니까?”
단순히 지식이 목적일 리는 없었다.
지식이란 모름지기 어딘가에 사용하기 위해 습득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어서 들려오는 라티스의 목소리는, 다소 꿈꾸는 소년 같은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저희의 목적은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래대로’인지는······저희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서 정확히 대답해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모든 것이 나아질 겁니다. 모든 것이요.]“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별부르미는 목표 하나를 두고 모두가 힘을 합치는, 맹목적인 형태의 조직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람이 모이면 파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계승자가 아닌 모든 인류가 마법사를 꺼리는 현상을 극복하는 겁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의 마법사들은 칭송과 숭배의 대상이었지, 지금 같은 대우를 받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요. 우리는 도서관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그들이 내세우는 목적은 아르센이 듣기에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마법사에 대한 거부감은 이 세계의 문명 발전 자체를 틀어막는 족쇄나 다름없었으니까.
당연히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아르센은 겉으로나마 믿음을 가장했다.
“그런 큰 목표를 두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저 역시 별부르미가 추구하는 가치에 공감합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말 감동했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아르센의 내면에는 일말의 감동도 어려있지 않았다.
이들과 조금 더 접촉해서 정확한 목표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넘어가죠, 우선 서쪽으로 평야를 지나······.]이후 두 사람은 한참동안 디테일한 계획을 설립했다.
마룬이 가져온 대륙 지도라기엔 굉장히 대충 만든 무언가를 이용해가며.
[좋아요,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어떤 것 말씀이신지?]“남부의 왕, 왜 거인왕입니까? 키가 얼마나 크길래?”
아르센의 질문에 라티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가 열 어림에 가까운 기사라더군요. 예전에도 거인 영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그 말에 아르센은 키가 3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기사를 떠올렸다.
듣고 보니, 먼 옛날 그렇게 큰 기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거인병 환자처럼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통제하는 기사가 그 정도 체격이라면.
그리고 능숙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덤벼든다면?
‘제발 거인왕과 싸울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