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66)
쏟아지는 불길, 그리고 대기 전체가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
아르센은 즉시 진을 운용해 피하는 대신, 주의를 끌고자 버티고 서서 가열 방패를 내밀었다.
과연 고온을 낼 수 있는 방패는 그만큼 온도를 받아내는 능력도 뛰어난 법이라, 주위가 일그러지는 듯이 보일 정도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방패를 쥔 손이 익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열기 때문에 땀이 솟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크으······.”
몸이 익을 것 같은 열기에 신음하던 도중, 예상대로 다른 기사들이 군주의 몸통을 타고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눈앞에 버티고 선 적보다 몸을 오르는 벌레들이 신경 쓰였는지, 군주는 불 뿜는 것을 멈추고 몸을 힘껏 털었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기사들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으어어어-!”
맥없이 날아가는 기사들.
그중 한 명이 아르센의 옆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지 잠시 투구를 움켜쥐고 머리를 흔들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군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놈은 저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멀쩡하군. 불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기사의 넋두리에 아르센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몸 여기저기서 피를 줄줄 쏟아내고 있고 폭발창에 얻어맞아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음에도, 군주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계속해서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해온 기사들 쪽이 한계에 도달한 상태.
어딘가에서 다가온 기사 한 명이 조금 전 중얼거리던 기사에게 주장했다.
“아무래도 놈의 몸뚱이 중 뱀 부분을 공격해서는 답이 없는 거 같습니다. 상반신을 공격해야 합니다.”
“말은 쉽지, 저걸 어떻게?”
기사들이 바보라서 무작정 몸통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의 상반신은 가끔 직접 공격하러 내려올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저 높은 곳에 있었다.
아무리 기사의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거기까지 도약하기는 불가능하고, 기어오르려 해도 군주가 꿈틀거리거나 몸을 털기만 해도 튕겨 나갔다.
결국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몸통뿐.
그렇게 좌절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아르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이미 군주를 공략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는 아르센이 타고 있는 진을 이용하는 것.
기승수가 없어 기동력이 떨어지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아르센은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약을 올릴 경우, 흥분한 군주가 상반신을 내려 직접 공격하는 것을 유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군주가 직접 내려오기만을 기대해야 하는 수동적인 작전에 불과했다.
둘째는 폭발 투창을 이용하는 것.
강철 같은 비늘로 뒤덮인 몸통에는 큰 효과가 없었지만, 얼핏 보기에 사람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상반신에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워낙 군주의 크기가 큰 탓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저 위에 있는 상반신은 순식간에 수십 미터씩 움직였다.
아르센의 실력으로 이를 정확히 맞추기는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조금 전 카릭을 노리고 다가온 군주의 상반신에 투창을 박아넣었을 터.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존재했다.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바로 구원이 도착했다.
[나 왔어!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아직은.]* * *
“덩굴을 타고 올라간다고요?”
“아마 우리 모두가 동시에 타고 올라가기 충분할 정도로 튼튼할 겁니다. 가능하지?”
“응. 말도 안 되게 무거운 사람만 없다면. 마력을 더 투자하면 불에 타지 않게도 할 수 있어.”
바즈칼과 다른 기사 한 명이 이리저리 약을 올리며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아르센은 도착한 엘로이즈와 마룬, 그리고 살아남은 기사 몇 명과 모여 빠르게 회의 시간을 가졌다.
작전은 간단했다.
엘로이즈가 식물 생성 주문을 최대한 발휘해 군주의 몸을 덩굴로 뒤덮고, 기사들이 이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
미끈한 비늘은 잡기 어려워 조금만 흔들려도 떨어지지만, 그 몸이 붙들기 쉬운 덩굴로 덮여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차피 공격 주문으로 고위 마수나 마인의 항마력을 뚫기는 어려우니, 차라리 이런 식으로 보조하는 쪽이 훨씬 효율이 높았다.
“마룬 경은 계속 돌면서 사격으로 주의를 끌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진을 타고 있는데다 원거리 공격 능력이 뛰어난 마룬은 군주의 시선을 붙들기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지금만 해도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기사 두 명이 그럭저럭 주의를 끌면서 버틸 정도이니 마룬이라면 훨씬 안전하게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자, 빨리 공격하죠. 녀석이 지금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면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군주는 싸움에 취해 흥분했는지, 아니면 시력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인지 부하들이 전멸했음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몇 번씩 흙먼지를 뿌리며 이미 죽어버린 부하의 기습을 기대하는 모습이 그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이 자기뿐임을 인식한다면 더 싸울 가치를 느끼지 못할 터.
거대한 덩치만큼 움직이는 속도도 빠를 군주가 도주한다면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 막고자, 기사들은 일제히 군주를 향해 달렸다.
“사방으로 흩어지십시오!”
군주 공략에 병사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유물 무기를 가진 아르센의 병사들이 아니고서야 단단한 비늘을 뚫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군주가 꼬리로 땅바닥을 한번 쓸면 모조리 고깃덩어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한번에 수 미터를 도약하는 기사들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병사들에게 그런 민첩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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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라기에는 잠잠한, 기묘한 음성을 내며 군주가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을 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조금 전 폭발창을 터트린 것 때문인지, 군주는 명확히 아르센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군주의 꼬리가 다시 한번 아르센을 노리고 내리찍혔다.
가로도 세로도 아닌, 절묘한 각도로 들어오는 공격.
비현실적인 크기로 인해 발생하는,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를 내는 착시현상이 회피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바즈칼이 발로 뛰면서도 피하던 것을 진을 탄 아르센이 피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대지가 진동할 때, 이미 아르센은 꼬리가 떨어진 곳에서 몇 미터나 멀어져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뱀 꼬랑지 달린 놈아!”
저 멀리서 마룬이 마법 걸린 화살을 쏘는 모습이 보였다.
근접전에 비해 궁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만큼, 마룬은 꽤 훌륭한 명궁(名弓)이었다.
저 높이 쏘아진 화살이 군주의 상반신, 그 중에서도 등 부분에 박혀 불꽃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크게 포효한 군주가 공격 대상을 바꿨다. 마룬이 있는 방향을 향해 일어나는 굉음과 불꽃.
그때, 엘로이즈가 신호를 보냈다.
[준비 다 됐어.] [바로 시작해!]먼 뒤쪽, 매마른 바닥을 타고 녹색 덩굴줄기가 바닥을 기듯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준비한 뒤 대량의 마력을 투자했기에, 그 범위도 넓이도 평소 사용하던 주문과는 차원이 달랐다.
녹색 해일처럼 밀려간 덩굴은 이내 군주에게 도달해 그 몸을 감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갈라진 비늘의 틈새 하나하나에 덩굴손이 얽혀 몸을 고정시킨 끝에, 군주의 온몸은 덩굴로 뒤덮였다.
마치 옷을 입은 것처럼.
■■■■■■■■—-!
군주가 분노하며 상반신까지 타고 올라오는 덩굴을 손으로 쥐어 뜯었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긴 군주의 몸에 비해 팔은 짧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바로 아래까지 내려온 덩굴 일부를 뜯어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지금이다!”
어느 기사가 크게 외침과 동시에 기사들이 일제히 덩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아르센 역시 진에서 내려 덩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목소리 하나가 전해졌다.
처음에는 엘로이즈의 목소리인가 싶었지만, 이 목소리는 훨씬 더 굵고 낮았으며, 진한 분노가 묻어나 있었다.
-벌레.
그 한 마디와 함께, 분노한 군주가 자신의 몸을 향해 불을 훅 뱉었다.
미리 불에 내성이 있는 종류의 덩굴을 사용했던 만큼, 덩굴은 조금 그을릴 뿐 멀쩡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덩굴에 올라타 있던 기사들이었다.
“으아악-!”
기사 한 명이 불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다가 덩굴에서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살아있기를 바라며, 아르센은 열심히 두 손으로 덩굴을 타고 몸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불을 뿜던 군주는 마룬의 화살이 입안으로 들어갈 뻔하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격렬한 흔들림.
조금 전처럼 떨어트려보려 한 것이겠지만, 몸에 휘감긴 덩굴로 몸을 고정한 기사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흔들림을 이겨내고 올라가던 도중, 반사신경을 가속해 주위를 보니 그와 바즈칼, 그리고 서부 출신의 기사 카릭까지 세 명이 가장 빠르게 몸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덩굴을 타고 오르는 카릭을 본 순간, 아르센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너무 가깝다!’
아르센과 카릭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군주가 동시에 둘을 공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를 경고하려던 순간, 이미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르센은 그것이 거대한 손바닥임을 깨달았다.
몸을 흔드는 것이 먹히지 않자, 군주가 몸을 구부려 직접 자신의 몸통을 타오르는 벌레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카릭 경!”
“먼저 가시오!”
아르센의 부름에 무슨 의미인지 안다는 듯, 카릭은 그대로 날아드는 군주의 손가락을 향해 도약하며 칼을 내리찍었다.
잠시 후, 무언가 추락하는 소리가 났다.
아르센은 다시 한번 덩굴을 박차며 위로 도약했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드디어 군주의 상반신이 눈앞에 보였다.
다시 올라가고자 덩굴을 꽉 쥔 그때, 갑자기 주변 공간이 이지러지듯 흔들렸다.
“큭······!”
머리로 피가 확 쏠리는, 높은 곳에서 급속도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
군주가 자신의 몸을 굴려 넘어트리고 있음을 깨달은 아르센은 이를 악물고 덩굴을 팔에 감아쥐었다.
어마어마한 충격과 압력이 아르센을 강타했다.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든 것도 잠시, 아르센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정신을 일깨웠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군주의 상반신이 보였다.
이 거대한 생명체로서도 쉽게 받아낼 수 없는 충격이었는지, 군주는 멍하니 바닥에 팔꿈치를 대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몇 초쯤 있었을까,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은 바즈칼이었다.
억지로 몸통에 붙어있던 아르센과 달리 군주가 나뒹굴 때 떨어져나간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충격은 덜 받은 것 같지만.
크게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에 자극받았는지, 군주는 고개를 들어 바즈칼을 응시한 뒤 화염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다시 눈에서 쏘아내는 방식으로.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러 피하는 바즈칼.
불이 옮겨붙어 필사적으로 머리를 털어내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바즈칼이 자기 머리까지 희생해 가면서 만들어 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아르센은 삐걱거리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가며 군주를 향해 달렸다.
다른 적을 향해 불을 뿜느라 미처 군주가 느끼지 못한 사이, 아르센은 군주의 배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
조금 전 이미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던 적이 계속 올라타 있었다는 사실.
군주가 언어라고 보기 어려운 그르렁거림으로 놀람을 표한 순간, 아르센은 그대로 군주의 가슴을 노리고 검을 뻗었다.
마법 투구 덕분에 아르센은 마력이 결집되어 새햐얗게 빛나는 심장을 볼 수 있었다.
거기가 약점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잡았다!’
아르센은 있는 힘껏 검을 찔러넣었다.
찌르고, 비틀고, 뽑아내고.
대형 마수의 숨통을 끊어내는 테크닉은 이미 몸에 익어 있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검이 움직였다.
혹시 몰라 한 번 찌른 곳을 벌려, 팔꿈치까지 들어갈 정도로 칼을 푹 찔러넣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검을 뽑아냈을 때, 아르센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심장을 찔렀음에도 피가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기에.
.‘설마?’
그렇게 깊숙이 찔렀음에도 심장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경악한 찰나,
무언가 우악스럽게 발목을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세상이 한 번 뒤집히고, 아르센은 군주가 자신의 왼쪽 발목을 잡은 채 거꾸로 들어올렸음을 깨달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아르센의 모습을 보며 군주가 웃음지었다.
마치 방 안을 기어다니던 바퀴벌레를 잡은 것 같은 뿌듯한 미소로.
아르센은 즉시 발목을 붙잡은 군주의 손가락을 있는 힘껏 찔렀다.
자르거나, 적어도 통증을 느껴 놓도록 하기 위해서.
하지만 검은 사람의 손가락을 이쑤시개로 톡 찔렀을 때처럼, 피부를 살짝 파고들 뿐이었다.
군주의 손은 몸통의 비늘 이상으로 단단했다.
-제일 골치 아픈 벌레를 잡았구나. 드디어!
함박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음성을 전하는 군주.
이런 거대한 생명체가 대화가 가능한 존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정작 그런 존재에게 살해당하기 직전인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문제였다.
느릿하게 왼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아르센은 최대한 사고속도를 높였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고자.
검을 던져서 유효한 타격을 입히는 것은 불가능, 투창은 조금 전에 구르면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온 힘을 다해 다가오는 손을 벤다면?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아르센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하얗게 빛나는 화살이.
■■■■■■■-!
눈에 화살이 박힌 군주가 고개를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를 쥐다 깜짝 놀란 사람이 으레 그러듯, 군주 역시 아르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다리가 공업용 프레셔에 끼인 것처럼 우두둑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에 비명이 솟구치는 것도 잠시, 그 감각이 아르센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해 주었다.
* * *
‘벌레 같은 인간 놈, 죽여 버리겠다!’
왼쪽 눈에서 느껴지는 불타는 듯한 통증.
화살이 박혀 괴로워한 것도 잠시, 군주는 이성을 찾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큰 체격에 비하면 화살이란 바늘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라서 깊게 박힌 것도 아니고, 애초에 눈은 시간을 들이면 재생할 수 있는 기관 중 하나였다.
우선 수행해야 할 것은 지금 쥐고 있는, 아까 전부터 거슬리던 인간을 죽이는 것.
아직 손에 쥐고 있는 감촉이 선명했기에 행여나 놓쳤으리라 걱정하지는 않았다.
‘뭐지?’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군주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조금 전까지 저항하던 벌레가 아닌, 벌레의 다리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붙잡혀 있던 놈이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잡힌 다리를 잘라낸 뒤 도망간 것이다.
가벼워진 무게까지 느끼기에는 군주의 완력이 지나치게 강했고, 감각은 둔했다.
‘이게 도대체 어디로······?’
그렇게 의문을 느낀 찰나, 조금 전 찔렸던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을 내려다본 군주의 눈에 보인 것은, 상처를 벌리고 몸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벌레의 모습이었다.
* * *
뜨겁다, 따갑다, 축축하다.
군주의 갈라진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간 아르센이 처음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특히 조금 전 잘려나간, 정확히는 스스로 자른 다리 부분이 피에 닿을 때마다 마치 상처를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 뇌를 지배했다.
끈적거리는 살점과 혈액의 감촉이 불쾌하게 온 몸을 적시고 달라붙는 가운데, 아르센은 전진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법 투구가 이끄는 대로 눈앞의 빛나는 구체를 향해 파고들었다.
피와 살점을 가르며.
도중에 대동맥을 자르기라도 했는지 피가 솟구쳐 온 몸이 잠겼지만, 그럼에도 숨을 참은 채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몸을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 구체를 향해 칼을 찔러넣은 순간.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