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7)
6화 – 마법사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 공용 식당입니다.”
“공용 식당이라.”
“보통 오전 7시와 오후 12시, 오후 6시에 식사를 하시러 오시면 됩니다만 그 외의 시간에도 요청하시면 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통 누가 식사를 하지?”
“영주관 내에 거주하는 가신(家臣)들은 거의 여기서 식사를 하신다고 보면 됩니다. 결혼해서 영주관 밖에서 거주하시는 분들은 밖에서 드시고요. 하인들은 전용 식당이 따로 있습니다.”
“종자도 여기서 먹으면 되나?”
“네. 종자 수행을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영주관 내에 거주하셔서 여기서 드시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만 따로 식사하길 원하시는 경우에는 말씀해주시면 별도로 식사를 가져다드립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먹었던 것처럼 말이지.”
아르센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용 식당의 위치를 머릿속에 넣었다.
그는 영주를 만난 뒤 피로한 몸을 쉬고자 초저녁부터 하루를 꼬박 잠들었고, 다음 날 룸서비스 방식으로 제공된 아침 식사를 해결한 뒤 하녀를 따라다니며 영주관의 지리를 익히고 있었다.
영주관은 지리를 익힌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높이만 6층에 달했으며 층마다 다양한 종류의 시설들이 존재했다.
지금 도착한 식당만 해도 긴 테이블 하나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럼 다음은 연무장으로 안내해드리겠…”
다음 장소로 아르센을 안내하려던 하녀가 앞을 보더니 힉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하녀의 앞에 있는 것은 검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였다. 나이는 기껏해야 아르센과 비슷한 또래쯤 될까?
붉고 푸른 물감 같은 것을 얼굴에 덕지덕지 발라놓아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왼손에는 정체불명의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아, 아…아가씨…?”
“우술라아르마티아타카라바.”
소녀는 막대기를 휙휙 휘두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이게 무슨 소꿉장난 같은 짓이란 말인가?
아르센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하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크아앙!”
“꺄아아아악!”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소녀가 크게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며 함께 막대기를 내밀었고, 하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촌극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멀뚱멀뚱 서 있던 아르센을 버리고서.
소리를 지르며 하녀를 쫓아낸 소녀는 아르센이 가만히 서 있는 걸 보자 뻘쭘해졌는지 되려 자기가 한 걸음 물러섰다.
“넌 왜 안 도망가?”
‘왜 도망가야 하는데?’
그렇게 반문하려던 아르센은 조금 전 하녀가 ‘아가씨’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마 이 영지에 그렇게 불릴만한 사람이라면 영주의 딸 정도가 아닐까.
“혹시 영주님의 따님 되십니까?”
영주의 딸이 기사나 종자와 어떤 관계인지는 배운 적 없지만, 아르센이 군대와 사회생활을 하며 배운 바에 의하면 상대와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는 상대를 존중하는 쪽이 좋았다.
상대가 존중할 만한 상대라면 본전, 아니어도 큰 손해는 없지만 그 반대라면 잘 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손해니까.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의 언어는 한국어처럼 존비어가 명확하고 엄격한 편이었기에 그쪽으로는 신경 써야 했다.
“맞아. 그보다 왜 도망가지 않는 건데!? 누구야 넌!”
나름 성질을 낸다고 소리를 지르지만, 얼굴에 물감을 칠한 꼬맹이가 그래 봐야 우습기만 했다.
그래도 영주의 딸이라고 하니 존중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한 아르센은 전에 배운 예법대로 양 쇄골 사이에 오른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팔라토 경 밑에서 종자 수행을 하게 된 기사 아르센입니다.”
“어…종자 수행을…하는 기사? 그럼 종자인 거야, 기사인 거야?”
“음,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아가씨.”
애매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아르센 역시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이 애매한 신분은 아르센의 현재 상황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보통 기사는 끊임없이 신체를 단련하며 마력에 대한 적응도를 올리다가 각성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아르센은 어째서인지 전혀 그런 단련 없이 기사로 각성했다.
마력을 각성하는 것이 기사의 조건이니만큼 기사이긴 하지만 기사로서의 업무를 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능력을 지녔다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팔라토 경 밑에서 종자로서 수행을 쌓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종자란 운 좋으면 기사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기사 예비생’에 불과한 신분인데 아르센은 마력 각성이라는 조건을 놓고 봤을 때 이미 기사이며 나이를 먹고 꾸준히 단련한다면 확실하게 기사로 서임 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애매한 상황 때문에 ‘기사 겸 종자’라는 기묘한 신분을 얻게 된 것이다.
소녀는 그런 아르센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는데, 마치 사람이 웃는 것을 처음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제가 왜 도망가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 난 마법사야! 마법사라고! 마법사 뭔지 몰라!?”
“아…마법사시군요, 네.”
그렇게 말해도 그녀가 마법사라는 것과 얼굴에 물감을 칠한 채 막대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진짜 마법사 같지도 않았고.
아르센이 상상한 마법사는 간달프같이 중후한 노인이거나 적어도 로브 같은 것을 뒤집어쓴 음침한 사람이었지,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하녀를 위협하는 왈가닥 꼬맹이가 아니었다.
이런 유치한 짓거리가 무슨 마법적인 의식이라도 될 리는 없잖은가.
아마 소꿉장난 비슷한 것 같은데 대충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한 아르센은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몰랐네요.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저도 같이 도망가겠습니다.”
그렇게 맞장구쳐주는 아르센을 소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필요 없어!”
그러고는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더니 도도도 달리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굳이 쫓아갈 필요는 없겠지?’
너무 대놓고 맞춰주려고 해서 기분이 상했나, 그 정도로 생각한 아르센은 도망간 하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연무장에서 팔라토 경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은 만큼 적어도 연무장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 * *
“엘로이즈 아가씨는 진짜 마법사라네.”
“네?”
결국 아르센은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연무장을 찾아야 했고, 왜 이렇게 늦었는지 추궁하는 팔라토에게 해명하기 위해 조금 전 있었던 일까지 얘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팔라토가 내놓은 대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설마 그 꼬맹이가 진짜 마법사였다니.
아르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법사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법사인 아가씨가 왜 애꿎은 하녀를 괴롭히고 다니시는 겁니까?”
“음, 그거에 관해서 얘기하면 좀 복잡해지는데. 일단 자네는 마법사를 뭐라 생각하나?”
질문에 질문으로 대응하는 건 좋지 않은 화법인데. 속으로만 생각하며 아르센은 자신이 가진 마법사에 대한 인상을 떠올렸다.
마법사.
이 세상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인 영지와 성채를 만들고, 기사의 탈것인 진을 만들고 수리할 수 있는 존재.
또한 고대 마법사가 직접 만들었다는 영지관에는 마법적인 물건이 제법 많이 있었다.
물이 나오는 관이나 화장실, 불 없이 빛을 내는 등처럼 간단하고 실용적인 물건들 말이다.
전생의 지구를 떠올리게 될 정도인 이런 물건들이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있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놀랐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부정적인 인상도 존재했다.
일단 이 세계를 영지와 성채가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든 게 마법사의 소행이란 것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이야기였으며, 마법사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던가 밤에 묘지에서 뇌를 꺼내 간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솔직히 후자의 이야기는 그냥 아이들을 겁주려고 만든 이야기 같아서 반쯤 걸렀지만 말이다.
“대단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존재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원론적이라 모범적인 답변이 될지는 아르센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뜻밖에도 팔라토는 꽤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접 마법사를 보고도 그 정도면 굉장히 우호적으로 보고 있다고 봐도 좋겠군.”
“그렇습니까?”
“대부분은 마법사를 한 번 만나고 나면, 그들을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가 여자와 간통해 낳은 사생아라고 생각하니 말일세.”
아르센은 그야말로 미개한 중세인스러운 말에 잠시 아연했지만, 팔라토의 말에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음을 깨닫자 그가 새삼 달리 보였다.
솔직히 지적인 면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던 레녹 경을 기준으로 기사의 지성을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과장된 미신을 믿는 건 아니네만 사실 엘로이즈 아가씨는 약간 문제가 있었다네. 너무 어린 나이에 마법사가 되어서인지 자신의 마법을 통제하지 못하고 주변에 몇 번 해를 끼친 적이 있었거든.”
“해를 끼친다면 어떤?”
“물리적으로 주변에 충격을 준다던가,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을 정도의 빛을 낸다던가, 주변 사람의 머리카락이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었지.”
“다른 것도 만만찮지만 마지막이 특히 무섭군요.”
“동감일세.”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팔라토의 이마가 오늘따라 유난히 넓어 보였다.
설마 그 피해자가 팔라토 경은 아니겠지.
아르센은 번뜩 떠오른 생각을 속에만 접어두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가씨가 그런 이상한 장난을 친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루덴 경…아, 우리 영지의 자문관이자 마법사인 사람이네만. 루덴 경이 말씀하시길 자신을 꺼리고 두려워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그러는 거 같다더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럽니까?”
“자네는 느끼지 못했나? 보통 사람들은 마법사가 가진 사악한 마력 때문에 마법사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네. 기사나 육체를 충분히 단련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거부감을 느끼지.”
팔라토의 말에 아르센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조금 전의 만남을 회상했다.
확실히 하녀의 반응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을 정도긴 했지만, 정말 그런 힘이 있었는가 하면 그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장난꾸러기, 말괄량이라는 느낌 정도일까.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마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고 어차피 기사에겐 어지간한 마법은 해를 줄 수 없다는 것도 아는데도…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들어서, 아가씨를 마주하고는 도저히 친절하게 대하기가 힘들더군.”
그렇게 말하는 팔라토의 얼굴은 본인의 평소 인상에 맞게 굉장히 침울해 보였다.
“저는…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르센의 말에 팔라토는 잠시 신기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르센을 보더니 잘 됐다는 듯 웃었다.
“그럼 오전 훈련을 마치고 한번 루덴 경을 만나보러 가겠나? 좀 괴짜긴 해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분이니 어쩌면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덤으로 일이 잘 풀린다면 자네가 아가씨랑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아무래도 가엾은 아이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망설임없이 승낙했다.
정말 자신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 마법사의 마력에 반응하지 않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식을 얻어 나쁠 일은 없을 테니까.
특히 마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만큼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건 그거고 일단 체력단련부터 시작하세나. 첫 번째는 연무장 달리기라네. 저기 저 기둥에서부터 연무장을 둥그렇게 돌도록 하게. 내가 그만 달리라고 할 때까지. 가능한 전력을 다해서.”
연무장은 한 바퀴가 300m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컸다.
“적어도 삼백 바퀴 정도는 돌 수 있으리라 믿네.”
“삼…백…이요?”
대충 잡으면 90km 아닌가.
거기다 오전단련 중에 뛰어야 할 분량이니 조금 전 열 시를 알리는 종이 쳤음을 생각하면 두 시간 안에 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평균 시속 45km를 유지하면서 두 시간이라니, 아르센의 경험에 따르면 마력을 가졌다고 해서 한 시간 단위로 전력 질주를 해도 괜찮지는 않았다.
이걸 혹사라는 개념 자체가 미비한 중세의 미개한 단련 방식으로 치부해야 할지, 아니면 베테랑 기사의 숙련된 기사 육성 교육방침으로 봐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훈련을 받기로 한 종자인 이상 까라면 까야 했다.
“좀 시간이 빠듯하네만 그건 자네가 늦어서 그런 거 아닌가. 감수해야지.”
웃으며 말하는 팔라토의 얼굴을 본 아르센은 조금 전 들었던 마법사에 대한 수식어-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가 어쩌고-를 그대로 팔라토에게 붙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젠장, 머리나 몽땅 벗겨져 버리라지.
애꿎은 팔라토의 모발을 욕하며 아르센은 몸을 풀기 위해 준비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