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75)
어둔숲.
이곳이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 직접 들어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나무다.
이들은 홀로 지내기가 외로웠는지 저 위에서부터 팔을 뻗어 서로 얽혔고, 그러기 위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가지를 뻗었다.
자라난 가지들 역시, 제 욕심 가득 잎을 피워내어 결국 하늘에는 빛조차 새어 나갈 틈이 없다.
당연히 그런 환경에서 작은 나무들은 햇살을 받을 수 없고, 숲의 아랫부분에는 채 자라지 못한 나무들이 말라비틀어져 무덤을 이룬다.
저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아르센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너무 멀어져 흐릿해진 햇빛이 보였지만 그뿐, 아스라이 들려오던 고함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상대는 숲속까지 쫓아올 마음이 없는 듯했다.
“전원 정지!”
“정지! 모두 멈춰!”
잠시 소란 속에서 명령 전달이 이뤄진 뒤, 일행은 달리는 것을 멈추고 대열을 정비했다.
리노가 아르센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이탈자 없습니다, 대장님!”
아르센은 리노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여 응답한 뒤, 추가로 명령을 내렸다.
“전원 휴식. 기사들은 이쪽으로.”
모두가 근처에 널린 나무에 몸을 기대앉아 몸을 쉬는 가운데, 아르센과 엘로이즈, 그리고 기사들은 병사들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에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음울한 정적 속, 가장 먼저 바즈칼이 분통을 터트렸다.
“카릭, 그 나쁜 새끼! 이런 식으로 배신을······.”
씩씩거리는 그를 향해 아르센이 말했다.
“조용히 해.”
“아니, 형님은 화 안 나십니까? 그렇게 좋게 헤어져 놓고 며칠 지났다고 군대를 몰고 쳐들어 왔는데······.”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는 수준으로 데려왔지.”
“네?”
바즈칼이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르센의 대답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기색이던 아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친근하게 여겼던 카릭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땅바닥에 처박힌 상태였다.
주위의 이목이 쏠린 것을 느끼며, 아르센은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카릭 경은 우리 실력을 충분히 봤어. 정말 우리를 잡을 생각이었다면 그 병력으로 달려들었을 리 없지.”
실제로, 만약 싸웠다면 일방적으로 끝났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다.
일단 마법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로 벼락 주문을 몇 번 쏘아내기만 해도 병사들은 모조리 죽어 나자빠질 것이요, 기사 간 전력 차이도 실속을 따져 보면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마룬은 근접전이 어설퍼도 보호받는 상태에서는 꽤 쓸만한 궁수였고, 바즈칼도 한 명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인재였다. 아눈은 말할 필요도 없이 능숙한 베테랑 기사이고.
거기다 아르센이 혼자 기사 서넛을 붙들고 엘로이즈가 전장을 통제했다면, 승부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끝났으리라.
“우리 전력을 마나르 쪽에 제대로 안 알려줬다는 뜻이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리를 지킨 거고.”
그때, 옆에 있던 마룬이 손을 들더니 물었다.
“그럼 조금 전에 싸웠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카릭 경까지 죽이시려고요? 그 사람이 동료들을 사지로 던져넣고 혼자 살아남는 사람 같지는 않던데요.”
주변에 있던 모두가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마룬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르센은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거기다 다 죽인다고 끝도 아니죠. 저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미 영지에 지원요청을 해놨을 테니까요. 기사 수십 명을 모조리 도륙할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결국 이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룬은 부끄러워졌는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섰다.
그에 비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던 아눈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힘차게 외치는 목소리 역시 열의에 차 있었다.
“역시! 전 카릭 경을 믿었습니다!”
“아닌 거 같던데.”
아눈이 특유의 전투광 같은 얼굴로 매섭게 쏘아보자, 바즈칼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그때, 마룬이 주의를 돌리려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르센 경, 빛이라도 밝히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부탁드리죠.”
마룬이 손짓하자 마법사 몇 명이 빛의 구체를 소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둑했던 숲이 밝아졌지만, 빛 때문에 주위에 깔린 그림자는 더 진해졌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소름이 돋는 것도 잠시, 바즈칼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뭔가 좀 이상한데요,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진 거 같은 느낌이······?”
아르센은 재빨리 투구를 벗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력 탐지 시야가 아닌 일반적인 시야로 보자, 바즈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빽빽한 나무들이 하늘을 덮었다 해도 지금은 한낮이건만, 이미 주위는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 질 녘, 혹은 초저녁 수준의 가벼운 어둠이 깔려 있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들어왔던 뒤쪽에서도 빛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어둠을 대낮처럼 보는 기사의 눈으로도 마법의 빛이 허락하는 공간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나무 사이로 깔린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바즈칼이 이를 말하기 전까지 이 자리에 있는 수십 명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어둠이 아닌 거 같아.”
엘로이즈가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슬슬 불안함이 전염되기 시작했는지, 다른 사람들 역시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투구를 쓰고 마력을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이 숲은 이미 공간 전체가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일단······왔던 방향으로 돌아가 보지.”
더 좋은 의견을 생각해 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은 도망쳤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 입증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달렸고 지금은 걸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걸 고려해도 30분 내내 걸었는데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라 볼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숲에 고립됐음을, 빠져나갈 길을 잃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쪽으로 왔던 건 확실한 건가?”
“이상하다, 이 정도 인원이 달렸으면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전혀 흔적이 없어. 새로운 길을 가는 것 같아.”
“분명 이쪽이 남쪽인데?”
나름 숲에 능숙한 나르비크의 사냥꾼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했지만, 그들 역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눈이 해결법 하나를 제시했다. 지극히 단순하지만, 또한 효율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저쪽에 있는 큰 나무에 표식을 새겨보죠.”
병사 한 명이 칼을 뽑아 나무에 박아 넣었다.
고대의 마법이 걸려있는 무기인 만큼, 칼은 부드럽게 나무를 파고들어 흉터를 새겨넣었다.
가야 할 방향으로 화살표를 새긴 후,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조금 전 새겼던 화살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화살표의 방향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몸을 돌려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서 왔나?”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아르센은 가능한 한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생각만큼 감정의 동요가 크지는 않았다.
갑자기 어두워졌을 때부터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무리를 이끄는 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공포를 누른 덕분에, 아르센은 차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닌, 해결책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마룬은 완전히 겁에 질려 이빨까지 따닥이며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호호우, 하고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자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목소리 역시 공포에 질려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아아, 아르센 경, 어쩌죠? 정말 여기 갇히게 되면······.”
지나치게 겁에 질린 마룬의 태도에, 아르센은 내심 기사면 기사답게 체통 좀 지키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화풀이에 불과할 뿐, 의미 있는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리더로서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으며 냉정을 유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도 완전히 이곳 기사가 다 됐군······.’
“그럴 일 없습니다. 나갈 방법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마법사들 통솔에 힘써 주십시오.”
아르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며 마룬을 위로했다.
그때, 누군가가 슬쩍 그의 갑옷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 있던 엘로이즈였다.
[정말 방법 있어?]왜 몰래 물어본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냥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지, 진실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일 터.
[대충은. 몇 가지 생각하는 건 있는데······.]그때,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몸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후드 아래 가려진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눈가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
마룬처럼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을 뿐, 내심 이 상황이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아르센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엘로이즈의 손을 마주 잡으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기사 중 아무나 한 명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방향을 확인해도 되고, 아니면 밧줄로 몸을 묶은 채 흩어져서 길을 찾아도 돼. 정 그걸로도 안 되면······그냥 숲 전체에 불을 질러 버리던지.] [너무 무모한 방법 아냐?]위험하지 않냐는 듯 반문하긴 했지만, 엘로이즈의 얼굴은 훨씬 편해져 있었다.
적어도 아르센이 이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때, 엘로이즈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센, 저 나무 좀 이상해. 화살표 새겨진 나무.]아르센은 고개를 돌려 나무를 보았다.
화살표가 새겨진 나무. 다 자라지 못한 채 말라 죽어버렸지만, 그런데도 그 높이는 어지간한 사람 키의 두 배에 달했다.
사실 주변에 널린 나무들이 다 그 꼴이어서 그것만으로는 특색을 찾기 어려웠다. 유일한 특징이라면 머리 높이에 새겨진 화살표,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기묘한 무늬······.
‘어?’
굉장히 꺼림칙하고 기이한 형태의 무늬가 그곳에 있었다.
길게 찢어지고 솟구쳐 분노로 가득 찬 두 눈, 그 아래 뚫린 구멍은 크게 벌어져 포효하는 입을 연상시킨다.
원래 저런 게 있었던가 생각할 틈도 없이, 얼굴 무늬의 눈 부분이 뒤룩 구르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목표는 바로 아래 서 있는 병사였다.
“피해!”
아르센의 외침과 함께, 나무에서부터 온몸이 울리는 듯한 기묘한 공명음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에서 가지 두 개가 돋아났다.
흐릿한 잿빛 나뭇잎이 붙은 그것은 끝에 손가락으로 여겨질 만한 작은 가지까지 돋아나 있어, 누가 봐도 손과 팔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어어······.”
나무 앞에 서 있던 병사는 갑자기 일어난 초현실적인 전개에 몸이 바짝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온갖 마수와 싸우는 이 세상에서도, 나무가 팔을 뻗어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었던 탓이다.
커다란 손이 병사를 향해 날아들자, 옆에 있던 리노가 재빨리 달려들어 얼어붙어 있던 병사를 뒤로 내던졌다.
병사가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다행히 리노 역시 병사를 던진 뒤 민첩하게 몸을 날렸고, 무사히 나무의 손아귀에서 피할 수 있었다.
나무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아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공격이 실패했음을 확인한 뒤, 나무는 몸길이만큼 늘어난 팔을 아래로 뻗었다.
끙 하고 힘을 주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천천히 그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커지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점점 땅에서 뽑혀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몸이 완전히 땅에서 뽑혀 나오자 길쭉한 뿌리가 드러났다.
뿌리는 촉수처럼 꿈틀대며 나무를 지탱하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식물이 마수가 되어 움직이는 듣도 보도 못한 현실. 다른 이들이 경악하는 사이, 아르센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묘한 소음에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부터 들려오던 부엉이 소리. 그냥 배경음 정도로만 느껴졌던 그것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호우, 호호우, 멀리서 들려온다고만 생각했던 소리는 이제 저 높이 깔린 어둠 속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울음소리가 끊겼다.
“뭐야, 씨발. 도대체 무슨······.”
잔뜩 긴장한 바즈칼의 목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진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방패 들어! 하늘에서 온다!”
날아오는 것의 정체는, 몸통 크기가 사람과 비슷한 거대 부엉이 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