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77)
-그 공간이동 유물, 어떻게 얻었지? 그것을 만든 자와는 무슨 관계고?
갑자기 던져진 질문.
엘로이즈는 자기도 모르게 아르센을 올려다보았다. 질문에 대답하면 좋을지 아닐지, 판단이 서지 않은 탓이었다.
[어쩌지?] [대답해 줘.]아르센 역시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대답하는 쪽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목숨을 노리는 적인 상황에서, 루덴과 적대적인 사이라고 해봐야 더 나빠질 것도 없었으니까.
“만든 사람은 마법사 루덴, 내 스승이야!”
엘로이즈의 외침에 목소리가 대꾸했다.
-증명할 방법은?
엘로이즈는 고민에 빠졌다. 루덴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 마법만으로는 안 됐다. 비슷한 마법은 많으니까. 그렇다면 조금 전처럼, 유물이라면?
문득, 한 가지 물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자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
마침 품속에 넣고 다니는 물건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꺼낼 수 있었다.
“여기, 루덴이 자기 스승님에게 받았다는 유물이야. 내가 물려받았어.”
엘로이즈가 꺼낸 것은 파도 문양이 조각된 나무 조각품이었다. 과거 아르센의 목숨을 한 번 구했던,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막아주는 수호의 조각.
그것을 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빛이 주위를 어슴푸레하게 밝혔다.
이것이 우호의 표시임을 해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는 호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린 마법사야, 잠시 이리 와주지 않겠느냐? 둘이서만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구나. 네가 정말 루덴의 제자라면, 나와도 남이라고 볼 수 없으니.
“내가 당신의 뭘 믿고? 이미 우리 쪽 사람들을 몇 명이나 죽여놓고 뻔뻔하게······!”
조금 전 상대에게 죽을 뻔했던 탓에, 거기다 함께 지내던 병사와 마법사들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던 탓에 엘로이즈의 대꾸에는 날이 서 있었다.
목소리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단다. 확인해 보렴.
“확인해.”
아르센의 명령에 병사 몇 명이 쓰러진 동료들을 향해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모두 살아 있습니다. 대장님!”
“허리가 부러진 것 같은 사람도 있었는데?”
“멀쩡합니다!”
그 대답을 들었는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맞지? 부디 내게 해명할 기회를 다오.
놀랍게도, 이제 목소리는 간절함마저 담고 있었다.
엘로이즈가 응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한 가지 제안을 추가했다.
-정 그렇다면 지금 너를 안고 있는 기사와 함께 오거라. 내 지금껏 많은 기사를 보았지만, 그자처럼 강한 이는 본 적 없으니. 그가 함께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느냐.
엘로이즈는 고민하듯 얼굴을 굳혔지만, 이미 귀걸이를 통해 아르센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알겠다고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지켜줄게.]아르센 역시 귀걸이를 이용해 대답했다.
루덴과 인연이 있어 잠시 공격을 멈췄을 뿐, 아직 상황을 주도하는 쪽은 상대였다.
아르센 일행은 상대의 정체도, 공격 방법도, 한계도 알아내지 못하고 얻어맞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정황상, 지금 의 휴전 상태는 오로지 상대가 봐주고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그 자리에서 스무 걸음 정도 앞으로 나오거라.
“잠시, 모여서 대기하도록. 마룬 경, 부탁드립니다.”
지시를 내린 뒤, 아르센은 엘로이즈를 안은 채 전진했다.
진의 걸음으로 스무 걸음쯤 왔다 싶은 순간, 주위의 환경이 뒤바뀌었다.
이제 그들은 햇살이 내리쬐는 따사로운 숲에 있었다.
아르센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이게 무슨······?”
“내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란다.”
어느 순간인가, 그들의 앞에 연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서 있었다.
말투를 통해 상대가 조금 전까지 그들과 이야기하던 목소리의 주인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르센은 내심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약 10m 정도. 이 정도 거리라면, 진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목을 벨 수 있었다.
수작을 부리면 바로 공격하고자 마음먹은 순간, 상대가 뒤집어쓴 후드에 손을 얹었다.
“아, 내 아직 이것을 쓰고 있었구나.”
후드를 벗자 드러난 모습은 60세 전후로 짐작되는 백발의 노파였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이목구비가 제법 뚜렷하여, 젊은 시절에는 꽤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나는 이렌느라고 한단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느냐?”
“엘로이즈······요.”
“아르센이라고 합니다.”
아르센의 말에 노파, 이렌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호위로 인정했지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는 않았는데, 루덴과는 무슨 관계지?”
한마디로, 루덴과 관계없는 사람은 입 닥치고 호위 역할에나 충실하라는 의미였다.
아르센이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한 순간, 엘로이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센은 내 약혼자예요. 루덴과도 친한 친구고요.”
“······그렇구나, 미안하다.”
이렌느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우선 하나 물어보자꾸나, 왜 숲에 들어온 것이냐? 너희도 동쪽의 주인을 따르는 것이냐?”
“동쪽의 주인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아무도 따르지 않습니다.”
아르센의 질문에, 이렌느는 조금 전과 달리 순순히 대답했다. 오히려 엘로이즈보다 상대하기 편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날 서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 때문이리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엘로이즈가 ‘나쁜 경찰’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숲의 동쪽, 그러니까······바즈라라고 하던가? 그곳 영주의 아들이 최근에 여기에 갇혔지. 그것을 구하고자 영주가 몇 번이고 구출대를 보냈고. 나는 너희들이 그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단다. 몇 번이고 동쪽에서 도전해서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루덴의 제자가 끼어있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뭔가 상황이 이상함을 깨달았노라고, 그래서 대화를 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혀 관계없습니다. 저희는 그냥······.”
아르센은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먼 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베른과 마나르가 막힌 상태에서 아슬아슬한 길을 골랐지만 마나르의 기사들에게 걸려, 숲으로 도망 온 것이라는 것 정도.
이렌느는 믿는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판이었구나. 진심으로 사과하마.”
“그런데 영주의 아들은 무슨 얘기입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이렌느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숲에서 무엇과 싸웠는지 기억하느냐?”
“싸움이라면······.”
갑자기 살아나서 걸어 다니는 나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부엉이 군단이 적이었다.
하지만 이렌느가 그런 단순한 것을 물어보는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너희는 환몽(幻夢)의 세계에서 싸우고 있었단다. 너희 중 누군가가 두려워한 것이 반영되는 세계에서 말이지.”
“그게 다 환상이었단 말입니까?”
“환상이지만 또한 실체이기도 하지. 네 몸의 상처와 망가진 갑옷은 거짓이 아니지 않으냐. 여기 어린 마법사 아가씨가 쓴 유물도 돌아오지 않지. 진짜 사용한 것이니까.”
아르센이 모호한 표정을 짓자, 이렌느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퍽 유쾌한 듯 웃으며 설명했다.
“환몽의 주인이 원하는 바에 따라 환상이 실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를 반영할 수 있지. 나는 너희들이 충분히 다쳐서 더 들어오지 못하기를, 하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기를 바랬단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당한 이들은 실제로 죽지는 않았지. 죽을 만큼 아프기는 했겠지만.”
이렌느의 말을 얼추 이해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단다. 동쪽 영주의 아들이 모험하겠답시고 숲에 들어왔는데, 얼마나 두려움 없는 영혼의 소유자인지 환몽이 아예 작동하지 않았어. 마침 그때 내가 자리를 비운 참이라, 그 아이는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봐서는 안 될 것까지 모두 봐 버렸지.”
“죽이신 겁니까?”
“굳이 환몽에 그런 기능을 넣은 것만 봐도 알겠지만, 나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경멸한단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라면 모를까. 그냥 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이란다.”
단호히 말한 이렌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동쪽의 주인은 계속 병사들을 밀어 넣고 있지. 자기 아들을 구하려고. 막아내고는 있지만, 그자는 자기 아들을 구하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야.”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아르센이 물었다.
“그런데, 루덴 경과는 어떤 사이이신 겁니까?”
“경? 루덴이 기사가 되기라도 했느냐?”
“저희가 살던 곳의 영주님이 직접 기사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직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분을 루덴 경이라고 불렀고요.”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잘 지낸다니 다행이구나.”
이렌느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꼬리를 살짝 닦아냈다.
“나는 루덴과 같은 스승 밑에서 마법을 배웠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리고······사귀기도 했고.”
엘로이즈도, 아르센도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덴은 자기 과거 이야기를 자랑하길 즐겼지만, 과거에 연인이 있었노라 언급한 적은 없었던 탓이다.
“그게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거 같구나.”
그렇게 말한 이렌느가 손을 뻗었다.
“수호부를 잠시 줘보겠느냐?”
엘로이즈가 조각상을 꺼내 내밀자, 이를 받은 이렌느는 조각상을 앞뒤로 뒤집으며 유심히 관찰했다.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구나.”
“네. 계통이 조금 안 맞아서요.”
루덴보다는 나았지만, 엘로이즈 역시 수호부에 걸린 마법과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수리한다고 노력한 게 간신히 형태만 붙여놓은 수준이었고, 제대로 된 기능은 봉인되어 있었다.
이렌느가 수호부를 쥔 채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손에서 빛이 일어나 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다시 수호부를 내밀었다.
“다 고쳤단다. 여기.”
“벌써요?”
“난 스승님과 비슷한 계통이라 그렇단다. 내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지. 반대로 네게 쉬운 일이 내게는 어려울 수 있고.”
엘로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호부를 받아들었다.
“그럼, 루덴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내가 사는 마을로 너희를 초대하고 싶구나. 죄 없는 이들을 공격하게 된 것에 대해 보상도 해야 하니 말이다.”
“마을이요?”
“안에 마을이 있습니까?”
아르센과 엘로이즈가 놀라 질문하자, 이렌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무모한 젊은이가 엿본 비밀이자, 바깥사람들에게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이지. 이곳은 언제나 위험하고 신비로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이어야 한단다. 사람이 사는 곳임이 밝혀지면 분쟁의 대상이 될 테니까 말이다.”
“저희에겐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저 멀리 서쪽으로 떠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근처에만 알려지지 않으면 된단다. 어차피 이 숲에는 많은 소문이 있으니, 먼 서쪽에서 어둔숲에 사람이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봐야 헛소문으로 여기겠지.”
이번에 문제가 된 것도 들어온 자가 영주의 아들이라는, 강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부하들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들이 마을에서 행패를 부릴 정도로 무도한 이들이 아니라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르센의 장담에 이렌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그러길 바란단다.”
“그런데, 이걸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엇을?”
“어떻게 그렇게 강한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겁니까?”
아르센이 알고 있는 한 가장 강한 마법사는 루덴이었는데, 그조차도 기사 한 명을 감히 당해내지 못했다.
항마력 때문에 기사에게 극히 불리한 상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루덴은 타고난 환영술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한두 명을 잠시 속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비해, 이렌느의 마법은 차원이 달랐다.
기사 네 명, 수십 명의 병사와 마법사들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환몽을 말하는 거라면, 그건 이 숲이 부리는 마법이란다. 나는 수호자로서 마법을 통제할 뿐이지. 내 마력은······아마 이 꼬마 아가씨만도 못할걸.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고 나서 해주마.”
이렌느는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 * *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조금 전 그들이 싸웠던 장소에 돌아와 있었다.
주변 상황을 보아하니, 다른 이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아르센과 엘로이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 같았다.
“아르센 경!”
“대장님!”
“형님!”
달려온 그들을 진정시킨 뒤, 아르센은 환몽 속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안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법 심한 상처가 몇 개 있긴 해도 영구적인 장애가 될 만한 부상은 없었으며, 그저 의식을 잃은 상태였을 뿐이었다.
치유 주문을 받자, 그들 모두 금방 의식을 찾았다.
아르센은 모든 구성원을 모은 뒤,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전 그것은 강력한 마법사의 술수였으며, 이 모든 상황이 오해로 빚어진 것이기에 상대가 사과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래서 보상을 받고자 숲속으로 들어갈 거라는 것까지.
설득을 끝내자, 숲 어딘가에서 샛노란 불빛 하나가 떠올라 아르센 일행을 인도했다.
이렌느가 숲의 힘을 이용해 엿듣고 있었던 듯했다.
불빛을 따라, 그들은 숲속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