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79)
아르센과 엘로이즈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이렌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층으로 올라와 주겠느냐? 내 지금 움직이기가 힘들구나.
집 안의 풍경은 황량했다. 생활용품이 놓여있긴 했지만, 대부분 한참 사용하지 않은 듯 먼지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이쪽이네.”
“응.”
먼지 쌓인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처음으로 진짜 이렌느를 볼 수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은 그녀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좋구나. 와서 앉으렴.”
실제로 만난 이렌느는, 환몽 속에서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쯤 더 늙어 보였다.
그곳에서는 나이에 비해서도 정정해 보이는 인상이었건만, 지금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혈색이 나빴다.
힘없이 흔들리는 안락의자가 주인의 무력함을 내비쳤다.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오늘 환몽을 두 번이나 통제했으니 말이다. 너희들이 오는 동안 동쪽의 주인이 또 군사를 보냈단다. 기사까지 더해서 말이지.”
피로에 찌들어 그늘진 눈을 마주 보며,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건너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이야기를······아니, 보상이 먼저인가? 나이를 먹으니 헷갈리는구나. 어느 쪽이 좋겠느냐?”
“우선 좀 쉬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식사하는 동안 충분히 쉬었단다. 이 나이를 먹으면 잠도 필요 없어지지. 내가 아직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늙진 않았지만 말이야······.”
이렌느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깔깔 웃었다.
“그러면 이야기부터 했으면 합니다.”
루덴과 있었던 추억을 공유해 사이가 깊어지면 더 좋은 보상을 줄 것이라 생각이 들었노라고, 그래서 일부러 그것을 골랐노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이렌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어떻게 약혼하게 된 것이냐? 기사와 마법사의 결합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아, 저희는······.”
엘로이즈가 대답하려다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센은 잠시 고민한 뒤, 사실을 밝혔다. 계승자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않고, 마법사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특이체질이 있다고만 밝혔다.
“소문 정도는 들었지. 그렇다면 네가 그······?”
“맞습니다.”
“세상에, 간절한 마법사들이 만든 꿈같은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렌느가 깡마른 손을 앞으로 뻗자, 아르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꺼림칙함도 느껴지지 않는 동작으로.
이를 본 이렌느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부러움, 착잡함, 안타까움, 여러 감정이 스치고 지나간 얼굴은 다시 세월과 주름으로 단단하게 덮여 온화한 웃음이 되었다.
이렌느가 살짝 손을 당기자, 아르센 역시 그 손을 놓고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생각해보니 그때, 너는 마법사 아가씨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야. 정말로 부럽구나.”
어떤 점이 부럽다는 것인지, 아르센이 의문을 품은 사이 옆에서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엘로이즈.”
“응?”
“엘로이즈요. 제 이름. 여기 얘는 아르센이고요.”
엘로이즈의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뜬 이렌느가 유쾌하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미안하구나. 다른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지 워낙 오래되어서······도대체 얼마 만의 일인지.”
혼자 중얼거리던 이렌느가 다시 엘로이즈에게 물었다.
“어쩌다 약혼을 하게 됐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겠구나. 그야말로 천생연분인 셈이니 말이야. 그래, 엘로이즈. 루덴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
어쩌면 지어내야 했을 수도 있을, 가장 난처한 이야기를 피해갔음에 엘로이즈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렌느의 질문에 대답하고자, 루덴과 함께 했던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루덴은 이미 벨루안의 마법사였고, 엘로이즈는 거의 평생을 루덴과 함께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니.
아르센 역시 옆에서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좋구나, 좋아. 이렇게 멀리서나마 그 소식을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어······.”
루덴이 영지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들을 때마다 이렌느는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특히 물건을 자주 망가트리는 기사에게 화가 난 나머지, 혼쭐을 내주겠다며 망치를 휘두르고 다녔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이 꺽꺽대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중, 이렌느가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방 한쪽에서 물잔 세 개가 날아왔다.
“이런, 말을 너무 많이 하느라 목이 타겠구나. 차라도 한 잔 마시려무나.”
“차요?”
엘로이즈의 반문에서 그녀가 차의 개념 자체를 모른다는 사실을 읽었는지, 이렌느가 웃으며 설명했다.
“뜨거운 물에 말린 식물을 우려내어 마시는 음료를 말하는 거란다. 이걸 모르는 걸 보니, 네 고향은 꽤 외진 곳에 있는 모양이구나. 물이 좋은 편일 것이고.”
말린 풀잎 비슷한 무언가가 날아와 잔 안에 들어갔을 때, 창문 너머에서 물 몇 덩이가 날아왔다.
아르센은 그것이 들어오기 전 얼핏 봤던, 집 옆에 있는 우물에서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엘로이즈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더니 물었다.
“아니, 어떻게······?”
“응?”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염동력으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물을 떠 오신 거 아니에요?”
아르센이 보기에도 꽤 놀라운 기예이긴 했지만, 엘로이즈가 보기에는 아예 믿을 수 없는 기적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엘로이즈는 당장에라도 의자에서 튀어 나갈 것 같은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이렌느가 명확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마법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렌느는 대답하지 않고 실없이 웃더니, 물과 찻잎이 들어간 잔에 한 번씩 손을 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 위로 뜨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잔 두 개가 엘로이즈와 아르센을 향해 느릿하게 날아갔다.
“받으려무나.”
그때, 엘로이즈가 살짝 몸을 일으켜 두 개의 잔을 받더니, 손에서 살짝 빛을 흘려냈다.
정화 주문을 시전한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실례지만,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요.”
“이해한단다. 밖에서는 언제나 그렇게 조심하렴.”
이렌느는 오히려 기껍다는 듯 자애롭게 웃었다.
아르센은 차를 받은 뒤, 가볍게 후후 불며 음미하듯 마셨다.
일부러 그런 온도로 데운 것인지, 차는 조금 뜨겁긴 해도 가볍게 마시기 딱 좋을 정도의 온도였다.
차에서는 볶아낸 곡물 특유의 고소한 향이 풍겼다.
“영주의 기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네, 대충은.”
“이 숲에 정화 영역이 있음을 보면 알겠지만, 이곳도 일종의 영지란다. 조금 개념은 다르지만······나는 숲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겠노라 서약했고, 덕분에 이 숲에 깃든 모든 마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 이 힘을 이용하면 숲의 어디든 보고 들을 수 있고, 그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단다.”
이렌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이런 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차를 끓이는 간단한 마법이라면 모를까, 숲에 존재하는 마법에 간섭하는 정도면 몸에 꽤 무리가 간단다. 오늘처럼 환몽을 두 번 이상 부렸다가는 며칠을 꼬박 앓아야 하지. 그리고······.”
말하던 중, 이렌느는 갑자기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거의 십수 번 이상 기침을 토한 뒤에야 헉헉거리며 호흡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지. 내가 루덴보다 훨씬 늙어 보이지 않던? 둘 다 고아여서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만, 나와 그이는 나이 차이가 크지 않단다. 오히려 내가 좀 더 어릴지도 모르지.”
이렌느의 말을 통해, 아르센은 숲의 수호자로서 강대한 마법을 부리는 대가 중 하나가 빠른 노화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쉰 살 정도로 보이는 루덴, 그리고 족히 칠십 살도 넘어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는 이렌느.
또래라기에, 두 사람의 차이는 지나치게 컸다.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고된 일이군요.”
“고되지.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놓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내 생명은 이미 이 숲과 연결되어 있거든. 죽기 전에는 계약을 넘길 수도, 숲에서 나갈 수도 없단다. 이곳이 나의 세계인 셈이지.”
흐흐 웃은 이렌느가 목이 탔는지 가볍게 차를 들이켰다.
“내가 루덴과 연인이었다고 말했던가?”
“말씀하셨습니다.”
“난 원래 마법사의 마을 출신이었단다. 마법사의 마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말이 좋지, 세상의 온갖 위협을 못 이겨 도망친 마법사들의 도피처일 뿐이었단다. 늙은 마법사들이 가끔 인근 성채에서 어린 마법사를 데려오고, 그 어린 마법사들이 늙어서 또 버려진 마법사를 데려오고······때로는 숲속에서, 때로는 동굴에서 지내는, 어찌 보면 약탈자보다 나을 것 없는 삶을 사는 부랑자 신세였지.”
루덴이 했던 말 그대로였기에 아르센은 크게 감흥이 없었지만, 엘로이즈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물론 불만은 없었단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고, 그 외의 사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먼 곳에서 여행을 온 젊은 마법사가 나타났지. 스승님과 함께.”
이렌느의 목소리는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져 있었다.
“스승님과 루덴, 그 둘은 마을에서 머물며 마법의 지식을 나누길 원했단다. 마침 내가 스승님과 적성이 맞았던 덕에, 마을의 마법을 전수하는 대가로 내가 스승님 아래서 마법을 배웠지. 루덴과 함께 말이야.”
이렌느는 부끄럽다는 듯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나이 먹은 외모에 썩 어울리는 제스처는 아니었지만, 그리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통했어. 루덴은 거친 야수 같았지만, 매력적인 남자였거든. 비리비리한 마을 젊은이들에게 질린 아가씨의 마음 따위는 가볍게 훔칠 정도로.”
“그런데 어쩌다 헤어지신 거예요?”
엘로이즈의 질문에 이렌느가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 나이 먹고 말하긴 쑥스럽다만, 당시 마을 안에서는 나만 한 아가씨가 없었단다. 다들 너무 어리거나 늙었었거든. 내게 매달리던 사내놈 몇이 루덴을 질투했고, 죽이려고 들었지······루덴은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고가 좀 있었단다. 그놈들 중 두 명이 죽었지.”
아르센은 과거, 루덴이 아타르 영지에 불을 질렀다고 고백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 일도 그렇고, 루덴은 유난히 과잉방어로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둘 다 그가 먼저 잘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을의 장로들은 귀한 젊은이를 죽인 이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단다. 스승님과 루덴은 추방됐고, 그 와중에 루덴이 내게 함께 가자고 했지만······거절했지.”
“왜요?”
“무서웠거든.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이후로, 평생을 그 작은 공동체에서 자라왔단다. 그곳을 벗어나 황야를 헤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고.”
그렇게 말하며 흘흘 웃는 얼굴에서, 아르센은 긴 세월 쌓인 회한을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거기서 끝났으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루덴이 쫓겨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단다. 당연하지만 루덴의 아이였지.”
엘로이즈가 당혹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덴이랑 결혼하셨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아이가 꼭 결혼해야 생기는 건 아니잖니. 마음과 배꼽이 맞으면 저절로 생기게 되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할 수 있냐는 듯한 엘로이즈의 표정에, 이렌느는 겸연쩍게 웃었다.
“나도 루덴도 젊고 철이 없었단다. 아직 책임감이 뭔지 모를 나이였지. 너희보다 고작 몇 살 많을 때였으니 말이다.”
다시 차를 한 잔 마신 이렌느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단다. 마을은 당연히 정화 지역이 아니었고, 갓 태어난 아이가 살 수 있는 곳도 아니었으니까. 결국 기승수 한 마리를 훔쳐 타고 몰래 마을을 나와야 했지. 장로들은 차라리 마을에서 아이를 낳아 죽게 두라고 말할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아······.”
엘로이즈가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신음을 흘렸다.
“마법사를 받아줄 수 있는,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아이만이라도 맡길 수 있는 영지나 성채를 찾아 떠돌고, 또 떠돌고······몇 번 죽을 위기를 넘기고 배가 완전히 부풀었을 무렵, 이 어둔숲에 올 수 있었단다. 수호자의 계약을 계승한다는 조건으로 전대 계약자가 나를 받아줬고, 이곳에서 무사히 아이를 낳았지. 그런 다음 수호자가 된 거란다.”
“그러면, 루덴의 아들이나 딸이 지금 여기에 있단 건가요?”
“물론. 너희는 이미 그 아이와 만나기도 했고, 이름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 말에,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들이 여기 와서 만난 사람 중 이름을 나눈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대리인이라는······?”
“그래, 지샤란. 그 아이는 내 딸이며, 동시에 루덴의 딸이기도 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