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83)
일행이 숲의 서쪽으로 벗어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렌느가 환몽으로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줄였기에, 고작 수십 분을 걸은 것만으로도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해가 뒤쪽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그들은 마침내 숲에서 벗어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탄식과 한숨을 내쉬었다.
“오오······.”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 같은 기분입니다.”
확실히, 사방에 나무로 된 벽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감옥에서 해방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심지어 어제 연기를 위해 밖에 나갔던 아르센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다만, 이런 시야의 자유를 확보한 대가로, 그들은 후각적 쾌감을 내놓아야 했다.
다시 서부의 쇠 비린내가 비강을 가득 채웠던 탓이다.
“전신이시여······쇠 냄새는 전쟁터에서 맡는 걸로 충분하나이다. 부디 이 냄새를 거두소서.”
아눈이 투덜대는 가운데, 아르센은 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감상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역겨운 독기를 폐에 채우며, 바깥으로 나왔음을 실감하고 새롭게 정신을 다졌다.
“후우······.”
문득, 아르센은 지샤란에게 생각이 닿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숲 밖에 나온 것 아닌가.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그다지 바깥 환경에 큰 인상을 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별로 안 놀라시는군요?”
“네. 숲 바로 앞까지는 꽤 자주 나와 봤으니까요. 이쪽도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그런 거였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 보니, 오히려 엘로이즈가 다소 침울한 얼굴로 숲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르센은 슬쩍 귀걸이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이렌느 님 때문에. 앞으로도 못 나오시잖아. 루덴과 연락이 닿는다고 해도······.]루덴이 영지에서 벗어나, 숲에 와서 이렌느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 영지에 둘 남은 마법사 중 하나인 그가 영지를 이탈하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을 일이니까.
만약 루덴이 이렌느를 보러 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영지를 되찾고 나면, 루덴과 함께 다시 숲에 들르자.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응!]엘로이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렌느에게 받은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아르센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 * *
마나르와 어둔숲의 경계를 지나, 그들은 서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영지 두 개 정도의 거리를 걸어 도착한 곳은 오르무라는 이름의 영지였다.
별부르미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은 수십 년 전 영지와 성채가 모두 괴멸당한 곳이었다.
영주관의 기적으로도 퇴치할 수 없는, 강력한 마수에 의해.
그나마 살아남은 극소수의 생존자, 그리고 인근 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힘겹게나마 영지를 재건하는 중이라던가.
당연히 성채들은 모두 방치되어 있었고, 중앙 영지에서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10년도 더 된 정보였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으로 보아 그 당시로부터 크게 변한 것은 없는 듯 보였다.
“헉!”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지며 사람을 덮쳐오는 무언가, 병사 한 명이 기겁하며 맞서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날카로운 유물 검은 매끄럽게 마수를 두 동강 냈다.
“뭐야?”
“마수다! 다들 위쪽 경계해!”
한 병사가 다급히 소리쳐 경고했다.
연이어 위에서 일행을 덮치기 시작한 것은 늑대와 같은 머리를 한 원숭이였다.
늑대 머리를 한 인간이 늑대인간이니, 이 마수는 늑대원숭이라고 칭하는 것이 옳으리라.
다행히, 늑대원숭이의 습격은 무의미하게 끝났다.
놈들은 나무 위에서 떨어지며 강습한다는 특징만 빼면 그리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았던 탓이다.
병사들은 물론, 마법사들도 이리저리 몸을 날렵하게 놀려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워낙 흉험한 모험을 겪은 만큼, 평상시라면 이런 하급 마수의 공격쯤은 별것 아닌 일로 여겨졌다.
그들이 기겁한 것은, 이곳이 영지 내부였기 때문이었다.
정화 지대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 수가 적은 탓인지, 이곳은 영지 내부조차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뭔 이런 데까지 마수가······나르비크도 아니고.”
바즈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죽은 늑대원숭이 하나를 발로 뻥 차며 중얼거렸다.
굴러가는 마수를 보던 엘로이즈가 아르센에게 물었다.
[상황이 이런데, 중앙이라고 쉴 만한 곳이 있을까?] [아마? 사람이 없어도 영주관은 그대로 남아 있겠지.]이렇게 환경이 안 좋아서야 정화 영역 밖에서 노숙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냐 싶겠지만, 적어도 독기를 맡지 않으며 잠드는 것만으로도 휴식 효율이 차원이 달랐다.
기사나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병사들은 몇 달, 몇 년 단위로 장기간 독기에 노출될 경우 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기회가 된다면 정화 지역을 들러 몸에 독기를 빼주는 쪽이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그리고 기왕 쉴 거라면 건물 내부, 혹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쉬는 편이 제일 좋았고.
주변의 나무와 수풀에서 뭐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조심하며, 일행은 계속 전진했다.
영지 내부로 향하기를 한참, 마침내 작은 목책이 보였다.
리노가 선두에 나서서 소리쳤다.
“누구 없습니까!”
목책 위, 병사 한 명이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히익 하고 신음을 흘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간,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든 나와 보라고 끊임없이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리노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겁먹었나 봅니다.”
아르센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멋들어지게 늘어선 기사와 마법사,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기 영지도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상황에서, 이 정도 대규모 병력이 나타났으니 겁을 먹은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확인도 안 하다니.
어이없을 정도로 안일한 대처였다.
“어쩔 수 없지. 조금 떨어져서 야영 준비해라. 저쪽에서 저렇게 나온다고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없으니.”
멀쩡한 목책을 앞에 두고 밖에서 노숙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쳐들어가서 모두 죽이고 불태울 수는 없었다.
수상하고 위협적인 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도 저들의 권리이니.
예전 나르비크 서쪽 성채에서야 상대가 지레 겁먹어 문을 열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렇게 대화를 거부하고 숨어버린 상대는 구슬리거나 달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목책에서 물러나려고 뒤를 돌아본 순간, 아르센의 마법 투구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빛 하나가 보였다.
잠시 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병사들 십여 명, 그리고 선두에 선 기사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어디에서 온 손님이시오?”
선두에 선 기사가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 * *
“세상에, 그렇게 멀리서 오셨는데 이런 홀대를 받으시게 하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엄중히 문책하겠습니다!”
“그러지 마시죠. 워낙 흉흉한 세상인데, 저들도 해야 할 일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나 넓은 도량인지! 어서 들어오시죠! 오르무는 여러분을 환영할 겁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영주 대리.”
자신을 오르무의 영주 대리라 소개한 남자, 기사 바단은 산맥 너머 동부에서 왔으며, 서쪽 유적 도시로 간다는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아르센 일행을 목책 안으로 들여보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노골적인 아첨은 덤이었다.
어찌나 호들갑을 떠는지, 아르센은 서로 존칭을 쓰면서 대화하는데도 윗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영주 대리의 외침 한 마디에, 그 즉시 목책 문이 열렸다.
어떻게든 얘기 한 마디 나누겠다고 한참 소리를 질렀던 리노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일행은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옆에서 떠들며 아첨하는 영주 대리의 모습에, 엘로이즈가 메시지를 보냈다.
[솔직히 좀······추할 정도로 아부하네.]아르센이 웃으며 이에 답했다.
[그래? 역시 내가 저런 소리를 듣기엔 도량이 너무 좁나?] [아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 놀리지 마.]엘로이즈가 투덜거리자, 아르센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이 영지를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로 보여서 그렇겠지. 이만한 병력이면 어지간한 성채 몇 개를 합친 수준이잖아. 영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존심을 굽히는 거라면 오히려 존경할 만한 인품이지.]벨루안이나 엑세키아, 마나르같이 제대로 정비된 영지와 비교하자면 한참 모자랐지만, 아르센의 군대는 강력했다.
적어도 자기 영지 내부의 마수조차 정리하지 못하는 영지로서는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영주 대리로서는 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기사가 있는데도 왜 이런 상태인 걸까?] [한 방향을 정리하면 다른 방향에서 들어올 테니까. 아마 지금도 영지 내의 마수를 정리하고 왔을걸.]하지만 기사 한두 명에 저 정도 병력으로는, 평생 노력해도 영지를 수복할 수 없으리라.
근본적으로 영지민의 숫자가 늘고, 그에 따라 병사와 기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이는 수 세대, 혹은 수십 세대가 지나야 해결될 문제고.
아르센은 자신을 바짝 따라오는 영주 대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영주 대리라고 하시면, 영주님은?”
“안 계십니다.”
“부재중이란 말씀입니까?”
“그게······.”
영주 대리는 수십 년 전, 영지가 멸망에 이르게 된 사건을 설명했다. 아르센은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말하지 않고, 차분히 그 설명을 들었다.
“당시 영주 혈통이 모두 목숨을 잃은 탓에, 영지 내에는 감히 영주를 자처할 이가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유일한 기사라 영주 대리를 자처하고 있죠.”
영주 대리가 말하길, 당시 성채에 거주하던 영주 혈통의 후예가 있었으니, 그중 누군가가 돌아오면 영주 자리를 계승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그때까지 대신 맡을 뿐이라고.
“고된 길을 가시는군요. 존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만은 조금 전과 같은 아부가 묻어나지 않는, 본심이 느껴지는 담백한 감사 인사였다.
아르센은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초가집, 그리고 무너진 것을 어설프게 보수한 듯한 돌로 된 건물, 이곳은 나르비크의 외곽 지역을 연상시켰다.
차이점이라면, 그나마 안쪽은 멀쩡한 나르비크에 비해 이 영지는 영지 전체가 쇠락한 상태라는 것일까.
건물만이 쇠락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사람들 역시 피로하고 굶주려 보였다.
낡고 초라한 건물 사이에 홀로 아름답게 우뚝 솟은 영주관의 모습은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어지간한 성채보다 작은 목책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영지라니.
이곳이 먼 옛날에는 벨루안이나 엑세키아처럼 발전된 영지였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덕분에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강력한 마수의 준동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재앙 하나로 수백 년이 넘는 역사와 문화가 모조리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이곳을 침공한 마수가 엑세키아나 벨루안을 침공했다면, 그곳들 역시 여기처럼 되지 않았을까.
“마음 같아서는 손님들 모두 영지관에 머무실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실례겠죠. 그냥 비어있는 집 몇 채만 허락해 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혹시 얼마나 지내실 생각이신지?”
“하룻밤이면 충분합니다. 내일 바로 떠날 생각이니까요.”
아르센의 말에 영주 대리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불안요소가 빨리 사라진다는 이야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봐, 빨리 가서 준비해.”
영주 대리의 명령에 병사들이 후다닥 달려갔다.
저들은 곧 아르센의 군대가 묵을 숙소를 마련할 것이다.
아마 집에서 살던 주민 몇몇을 내쫓아서라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유적 도시에서 온 상단이 하나 있답니다. 마나르로 가는 길이라더군요. 그쪽으로 오시진······않으셨겠죠, 그쪽 사람들이 마법사에겐 좀 매서우니까요.”
아르센이 대답할 틈도 없이 혼자 내뱉고 대답하는 모습. 다소 비굴하기까지 한 어투에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마나르에는 무슨 일로 간다고 합니까?”
“고대 유물을 팔러 가는 모양이더군요. 마나르 사람들이 마법사는 싫어하지만, 유물은 즐겨 쓰지 않습니까. 그치들의 교리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니까요. 고대 마법사를 신으로 섬기면서 요즘 마법사는 악한 존재라니, 뭐가 그런지.”
마법사들을 데리고 있는 아르센이 마나르 출신이 아니라 확신한 것인지, 영주 대리는 마나르 영지를 깔보는 말을 하며 흉을 보았다. 아르센은 그 태도에서, 어떻게든 반-마법사적 가치관이 없음을 어필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아르센은 이 불쌍한 사람을 조금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세상에는 가끔 이해하기 힘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죠.”
아르센이 맞장구를 쳐주자 영주 대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이 비위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혹시 그 상인들을 좀 소개해 줄 수 있습니까? 가는 길에 대해서나, 최근 동향 같은 거라도 좀 듣고 싶은데.”
“물론이죠. 아예 안내인 하나 붙여 드리겠습니다. 이봐, 멕. 이분들을 안내해 드려.”
“알겠습니다!”
병사 한 명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