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85)
“여기가 유적 도시······.”
누군가의 중얼거림에는 찬탄이 담겨 있었다.
아르센 역시 일부 동감하는 바가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경이로운 것이었기에.
보통 영지의 규모는 정화 영역의 크기로 정해진다.
다만, 사람이 지나치게 적으면 얼마 전 지나온 오르무 영지처럼 정화 영역 내를 완전히 방비하지 못해 살 수 있는 공간이 적어지게 된다.
지금 아르센 일행이 보고 있는 것은 그 반대였다.
너무 사람이 많은 탓에, 정화 영역 바깥까지 뻗어 나가 버린 기괴한 도시가 그곳에 있었다.
이 유적 도시의 모습은, 이보다 훨씬 큰 도시를 여러 차례 본 적 있는 아르센조차 압도하는 박력이 있었다.
바즈칼이 입을 헤 벌린 채 말했다.
“뭔 벽이 저렇게 넓대······.”
그 말대로, 어마어마하게 길게 뻗은 장벽은 영지의 경계에서 한참 바깥쪽에 세워져 있었다.
높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그들은 장벽 안쪽에 멀쩡히 세워진 건물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영지 바깥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마수는?”
엘로이즈가 놀라서 말하자, 아르센이 답했다.
“사람이 아주 많고, 유물도 많으니까. 오랜 세월 주위의 마수들을 계속 처리해가면서 영역을 넓힌 거지.”
상인, 모로가 말해준 내용이기도 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인구 증가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계속해서 외부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적 도시의 명성을 듣고 밖에서 찾아오는 자들은, 모두 독기를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된 이들이니까.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죠.”
아눈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함께하던 기승수 역시 헤어짐이 아쉽다는 듯 끼잉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디 복수에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주시고요.”
원래는 아눈의 복수에 얽힐 마음이 없었지만, 아르센 역시 싸울 때는 미친 듯 날뛰면서도 평상시에는 정중하고 친근한 이 기사에게 꽤 정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그가 복수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면 단호히 거절할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그는 약속대로, 아르센의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용맹하고 성실하게 행동했다.
싸움이 불필요한 순간에는 합리적으로 후퇴하는 데도 협조했고.
마음 같아서는 계속 휘하에 두고 싶었지만, 자기 가야 할 길이 있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됐습니다. 엘타 사나이라면 자기 일은 알아서 해야죠.”
“돌아가는 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역시 상단 같은 곳에 합류하시는 게 나을 거 같긴 한데.”
아눈은 그 말을 듣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돌아가는 길에 마나르를 지나가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눈의 질문에 아르센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네?”
“거기 아눈 경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잖습니까. 기껏해야 카릭 경 정도나 되어야 알 텐데, 그 자리에서 폭로해서 굳이 아눈 경을 난처하게 만들 사람도 아니고요. 혹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숲에 대해서만 비밀로 해 주시죠.”
아르센의 말에 아눈이 씩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전쟁의 신께서 아르센 경을 가호하시길 빕니다!”
“아눈 경 역시.”
아눈은 힘차게 도시를 향해 기승수를 몰아 달려갔다.
다들 그 뒤에서 손을 흔들며 그를 보냈는데, 바즈칼은 얼굴에 눈물이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가끔 투닥이긴 했어도, 같은 기사라고 끼리끼리 어울리며 꽤 정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다 울겠다.”
아르센의 말에 바즈칼이 황급히 눈을 비볐다.
“안 울었습니다. 나르비크 사나이는 울지 않으니까요.”
“아눈 경 말투가 그대로 옮았어.”
엘로이즈가 옆에서 툭 내뱉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너무 슬퍼할 거 없어. 어차피 같은 도시로 들어가는 건데. 어쩌면 오늘 당장 같은 숙소를 잡게 될 수도 있고.”
만약 그러면 감동적으로 이별한 게 우스워지리라.
버스 정류장에서 감동적인 이별을 나눈 뒤, 곧바로 같은 버스를 타고 가게 되는 꼴이니.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눈은 도시 안으로 사라진 채였다.
“그럼 우리도 슬슬 들어가지.”
장벽 한편에 있는, 활짝 열린 성문 앞으로 가자 주위의 이목이 쏠렸다.
기사 두 명, 마법 기사 한 명, 마법사 열한 명, 잘 단련된 전사 열세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떠들고 흘깃거릴 뿐, 그 누구도 그들을 막아서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입구를 지키던 두 명의 병사 역시 이걸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태도로 어물쩍거리더니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 동쪽 멀리, 벨루안 영지에서 왔다.”
당연히 먼 서쪽, 유적도시의 병사들이 동쪽 끝 벨루안 영지의 이름을 들어봤을 리는 없었다.
병사 한 명이 필기판 같은 것을 들어 내용을 받아 적었다.
“벨루안······동쪽······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유적 도시에 왜 왔을까,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아서지.”
지극히 평범한 용무에 병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적 도시에 오는 이들 대부분의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유물 하나 주워서 팔자 펴겠다는 마인드는 도박꾼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지만, 경비병들은 출입자의 도덕적 정당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사티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시겠지만, 이곳에서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실 경우 경비대에 의해 심판을 받으실 수······.”
병사의 경고에 아르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역시, 이런 대병력을 성문 앞에 세워두기 부담스러웠는지 꼭 해야 할 만한 말 몇 마디만 하고 일행을 들여보냈다.
그렇게, 그들은 유적 도시 사티엔에 입성하게 되었다.
* * *
“사람 진짜 많다.”
엘로이즈가 고개를 붕붕 돌려 주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시에 처음 온 촌놈들처럼, 모두가 이 생소한 풍경에 넋이 나갔는지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팔고 있었다.
제일 바깥이라 그런지, 제대로 된 건물보다는 간단한 구조로 만들어진 노점상 같은 것이 쭉 늘어서 있었다.
가판대 위에 올려진 물건은 때때로 영롱하게 빛나거나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어, 그것이 유물임을 증명했다.
다른 도시에서라면 보물로 여겨질 유물이, 여기서는 길거리 노점상의 가판대에 올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적임을 증명하듯, 돌아다니는 사람들 역시 그런 유물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백 명의 행인은 하나같이 체격이 좋고 단단히 무장한 것이, 이들을 모두 모으면 영지 한두 개는 우습게 점령하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독기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된 전사일 테니, 마냥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저기 마법사도 지나간다.]엘로이즈가 귀걸이를 통해 말했다.
과연, 벗어 놓았던 투구를 쓰고 보니 지나가는 사람 중 마법사가 드문드문 보였다.
다들 엘로이즈와 같은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기에, 다시 투구를 벗고도 대충 식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행인들은 마법사를 보고 욕설을 지껄이거나 침을 뱉으며 피해갈 뿐, 그 이상 과민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마법사에 익숙해 보이네? 로브가 유물이라서 그런 거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게. 루덴이 준 로브도 여기서 나온 거 아닐까?]욕을 먹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게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 정도만 해도 놀랄 정도로 온건한 반응이었다.
유적 도시에서 온 상인, 모로에게 대충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까 꽤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아르센은 리노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일단 장기간 머무를 곳부터 찾지. 적어도 유적 세 군데는 둘러봐야 하니까, 몇 주일 이상 머무르게 될지 몰라.”
“알아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리노가 병사 두 명, 마법사 두 명과 함께 주변에 돌아다니던 사람 몇 명을 붙들고 숙소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중년 여자 하나를 데려왔다.
겉으로는 평범한 아낙처럼 보였지만, 정화 지역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만큼 나름대로 단련된 사람일 터였다.
실제로, 그녀는 제법 큰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여기 이 자가 그러는데, 최근에 큰 여관 하나가 비었답니다. 탐험가 무리 하나가 몇 달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데, 아마 다들 죽은 거 같다고······.”
“우리가 들어가기 충분한가?”
아르센의 질문에 중년 여자가 고개 숙여 답했다.
“아, 물론이죠. 기사님. 여기 있는 사람 두 배여도 들어갈 정도로 넓은 곳이니 걱정하지 마셔요. 시설도 좋습니다.”
“좋아, 안내해.”
그렇게 말하며, 아르센은 미리 준비해 둔 구리 동전 하나를 휙 던졌다.
동전을 받아든 여자는 처음 보는 양식에 얼굴을 슬쩍 찌푸렸지만, 이내 그 기색을 지우고 흥얼거리며 길을 안내했다.
“믿을만할까요?”
옆에서 바즈칼이 작게 속삭였다.
“아니면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될 일이지.”
누군가에겐 다행히, 누군가에겐 아쉽게도, 여자는 속임수 없이 정말 괜찮은 숙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5층 높이의 여관은 지어진 지 제법 오래되어 보였지만, 돌을 잘 짜 넣은 덕에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그 크기는 수십 명을 수용하기 충분해 보였고, 내부 시설 역시 훌륭해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값이 좀 비싸다는 점일까.
“한 명이 일주일 머무르는 데 은화 두 닢이라고?”
“네. 물이나 식사는 별도고요. 계절상 화로에 넣을 장작 값은 안 주셔도 되겠네요. 이거보다 싼 곳은 진짜 싸구려예요.”
놀랍게도, 이 여관의 주인은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그 중년 여자였다.
마침 자리가 비었는데, 한 번에 받을 정도로 큰 손님이 드물어 바깥까지 나왔다가 그들을 만났다고 했다.
“돈 없으신 건 아니죠?”
아르센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확인했다.
바즈칼이 내놓은 재산, 그리고 엑세키아에서 교환하며 받은 재물을 합치면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아르센은 은화가 든 자루 하나를 리노에게 건넸다.
“리노.”
“알겠습니다!”
리노는 안에 든 은화를 확인한 후, 흥정을 시작했다.
우선 사람 수에 맞춰 은화를 내놓자, 여자는 돈을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말했다.
“여기서 쓰이는 공용 은화가 아니네요.”
“그야 뭐, 멀리서 왔으니까.”
“음······멀리서 오신 분들이면 자주 있는 일이죠. 아까 동전 줄 때부터 이럴 거 같더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카운터에서 물건 몇 개를 꺼내더니 은화를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단검으로 갈라서 안을 보고, 저울로 자신이 가진 은화와 무게를 비교하고, 온갖 방법으로 확인했다.
“가짜 은화는 아닌 거 같네요. 근데 크기도 작고 순도가 좀 떨어지는 거 같은데, 두 닢만 더 줘요.”
“기준이 뭐요? 내가 보기에는 아닌 거 같은데. 그걸 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지, 이 은화는 말이야······.”
두 사람이 투닥이는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그대로 여관 1층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1층의 커다란 홀은 의자와 책상이 여럿 있어서,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무려 영주관이나 성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마력등이 몇 개씩 박혀서 빛을 내고 있었기에, 창문이 닫혀 있음에도 대낮처럼 환했다.
“다들 쉬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흥정을 기다리는 동안, 아르센은 엘로이즈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중년의 기사 한 명이 뒤에 동료 몇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나 왔소, 부인! 술 한 잔 주시오!”
호쾌하게 외친 그는, 홀을 점령한 아르센의 일행을 보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여기 손님들은 누구신가?”
“말 그대로 손님이죠.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르센이 일어나서 답하자, 잠시 그를 보던 기사는 오, 하고 탄성을 터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자나쉬에서 온 라수르요.”
“벨루안의 아르센입니다.”
악수를 한 뒤, 라수르는 한쪽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아르센이 그에 맞춰 발을 한 번 구르자, 유쾌하게 웃더니 말했다.
“젊어 보이는데, 완전 초짜는 아닌가 보군!”
아르센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자나쉬는 어디에 있는 영지입니까?”
“북쪽에 있소. 아무래도 이 근처는 그쪽 출신이 꽤 많지. 벨루안이야말로 어디에 있는 영지요? 내가 여기서 몇 년 지냈지만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 없는데.”
“동쪽 끝, 여기서 위주 산맥까지 간 다음 그 거리만큼 더 가도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야 할 겁니다.”
“그거 살벌하게 먼 곳에서 오셨구려.”
씩 웃은 라수르가 엘로이즈와 다른 마법사들을 보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뿐, 라수르는 놀라운 인내력으로 표정을 감췄다.
“마법사 친구들이 많군. 이렇게 많이 있는 건 처음 보는데.”
“별로 안 놀라시는군요?”
“마법사엔 익숙하거든. 우리 일행 중에도 한 명 있잖소.”
그 말을 듣고 보니, 다른 사람들과 유난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여자 한 명이 보였다.
차림새가 다른 전사들과 비슷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때, 리노가 다가와서 말했다.
“끝났습니다, 대장님. 남은 은화는 짐에 넣어 두었습니다.”
“고생했다.”
“이 주일을 미리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수르가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 이웃으로 지내겠군. 우리도 여기서 머무르고 있거든. 그럼 난 이만 올라가 봐야겠어. 유적 하나 잘 발굴하길 기원하겠소.”
“저 역시, 성공 거두시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아르센은, 라수르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로에게 들었던, 기사와 만날 때의 인사를 떠올렸다.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습니다.”
“나 역시,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소.”
그제야 라수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