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86)
모름지기 여관이란, 여행에 지친 자들을 위해 숙소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혜택 역시 제공하는 법이다.
여관 자체를 접하기가 힘든 세계지만, 이곳 역시 그런 우주적 대원칙에 충실하게 식사와 음주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은 아르센 일행은, 저녁 식사를 위해 1층에 모여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리노는 여주인과 은화의 비율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모종의 합의를 거쳤는지, 치열한 전투 없이 간단한 계산 끝에 가격을 지불했다.
“자, 형님. 한잔 받으십쇼!”
바즈칼이 아르센의 잔에 맥주를 쭉 따랐다.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겨울이 아님에도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냉각 기능을 가진 보관함 형태의 유물이 있다던가.
물론 주조 기술의 차이 때문인지 지구에서 먹던 맥주처럼 깔끔하고 탄산 가득한 그런 맛은 아니었지만, 그저 시원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르센은 이 맥주를 사랑할 수 있었다.
“크으, 끝내주네!”
“차게 먹으니까 진짜 좋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바즈칼과 리노 역시 맥주 맛에 흠뻑 취해 탄성을 터트렸다.
목을 축이는 한편, 아르센은 구석에 따로 마련된 마법사 테이블에 앉은 엘로이즈를 주시했다.
그녀가 조용히 무언가를 홀짝이는 모습을 보며, 즉시 귀걸이를 이용해 목소리를 보냈다.
[적당히 마셔. 너무 취하지 말고.]엘로이즈가 흠칫 놀라더니 받아쳤다.
[내가 애도 아니고, 적당히 마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믿을게.]과거 술에 취해 나자빠졌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영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자제력을 믿기로 했다.
아르센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린 뒤, 살짝 누르기만 해도 육즙이 흘러나오는 돼지고기 바비큐 한 조각을 잘라냈다.
몇 주 동안 거친 마수 고기와 육포로 혹사당하던 입에 기름지고 양념까지 된 동물 고기가 들어가자, 당장이라도 승천할 듯한 황홀감이 찌르르 솟구쳤다.
“하······.”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쾌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이런 음식을 먹은 지 너무 오래된 탓인지, 한 입 먹은 것만으로도 몸이 기쁨을 노래했다.
얼마 전 들른 오르무 영지 역시 이런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가난한 영지였기에 더더욱.
그렇게 행복해하고 있는 아르센의 옆에서 리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바즈칼 경, 그러다 이 부러지시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시선을 돌리니, 화로에 구운 닭의 다리를 뼈까지 통째로 씹어먹으며 건치를 과시하는 바즈칼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야 마음만 먹으면 벽돌처럼 단단한 건빵 역시 부숴 먹을 수 있으니 치아 건강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왜 굳이 저런 바보짓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의문을 가지던 아르센은, 지샤란을 흘깃흘깃 쳐다보는 바즈칼의 시선을 보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설마 관심 끌고 싶어서, 뼈까지 씹어 먹는 모습이 멋있고 남자다워 보일 거라고 믿는 것일까.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 아르센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조리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르센은 바즈칼을 제지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누구나 원한다면 바보짓을 저지를 권리가 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쨌든 미래의 부끄러움은 아르센의 몫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지샤란이 저 짓거리를 좀 귀엽게 봐줄 가능성도 있고.
바즈칼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아르센은 기름이 살짝 뜬 걸쭉한 스프를 접시째로 들어 후루룩 마셨다.
닭 뼈로 국물을 낸 스프였는데, 매콤한 향신료를 쓴 탓인지 묘하게 닭도리탕 비슷한 맛이 났다.
고된 여행 중에 진한 기름기와 짜고 단 향신료로 목 안쪽을 적시는 느낌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국물뿐만 아니라, 푹 삶아진 탓에 뼈에서 풀어져 나온 고기에서도 진한 감칠맛이 났다.
‘최고야······.’
그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음식을 먹으며, 아르센은 삶과 행복에 대한 깊은 사유에 빠졌다.
사람은 결핍이 없으면 만족을 모른다. 불행이야말로 행복의 어머니이며, 결여에서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혼자 개똥철학에 빠져 사색에 잠겨 있던 아르센을 깨운 것은, 술에 취한 듯 혀 꼬인 소리를 내는 주정뱅이였다.
“웬 마법사 놈들이 쥐새끼처럼 떼로 모여 있네?”
주정뱅이의 정체는, 평상복을 입은 젊은 기사였다.
서 있는 위치가 입구 바로 옆인 것으로 보아, 조금 전 막 들어온 모양이었다.
얼굴은 이미 불콰하게 물든 것이, 술 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가장 먼저 의문을 느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기사는 간의 해독력 역시 일반인보다 훨씬 좋았기에, 기사가 취하려면 술을 정말 많이 마셔야 했다.
저 정도면 정말 술을 물처럼 들이부었다는 뜻이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마법사들이 앉은 테이블을 보던 기사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들, 좆 같은 놈들. 그딴 더러운 함정이나 만들어 놓고, 사람 목숨을 뭐로 아는 거야······눈깔을 뽑아다 방에 처박아 놓고 물건이나 만들면 족할 놈들이, 멀쩡히 세상을 걸어 다니니까 이 모양이지······.”
“이봐, 술 취했으면 얌전히 들어가서 잠이나 자는 게 어때. 여기서 이런 식으로 행패 부리지 말고.”
바즈칼이 만취한 기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름 점잖게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충고했건만, 그 친절에 돌아오는 것은 잔인한 비웃음이었다.
“넌 또 뭐야? 기사씩이나 되어서 마법사들 딸랑이 짓거리나 하는 거냐? 머리 모양은 웃기게 해서······.”
기사는 비아냥거리더니 바즈칼의 뺨을 퍽 후려쳤다.
강하게 후려친 것은 아니었지만, 모름지기 다른 사람의 얼굴을 치는 행위는 어디서건 선전포고로 여겨지는 법이다.
그런데도, 바즈칼은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했다.
얻어맞은 뺨을 살살 비비며 다시 충고를 던졌다.
“······이봐,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사람이 취하면 머저리 같은 짓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만 들어가서.”
“퉤.”
기사는 바즈칼의 가슴에 침을 뱉더니,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어린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아르센은 바즈칼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 개-새끼야-!”
바즈칼은 포효하며 상대를 향해 덤벼들었다.
레슬링 선수처럼 낮은 자세로 태클을 건 바즈칼은, 방비할 새도 없이 몸을 휙 돌리며 상대를 집어 던졌다.
취한 기사는 테이블 몇 개를 부수며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식사 중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으아악!”
“어떤 새끼야?”
“이런 썅······!”
잠시 화낼 대상을 찾던 사람들은, 싸우는 두 사람이 기사임을 깨닫자 얌전히 물러섰다.
이런 주위의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즈칼은 그대로 날 듯이 도약해 음식물로 범벅이 된 채 쓰러진 기사를 짓밟았다.
배를 밟힌 기사는 그대로 입에서 장엄한 분수를 뿜었다.
“구우웩, 욱, 커헉······.”
“뻗어 있지 말고 썩 일어나, 이 새끼야!”
술에 취하지 않고 멀쩡했으면 모르지만,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기사는 바즈칼의 상대가 아니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몇 번 걷어차이자, 젊은 기사는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변했다.
아르센이 지나치게 흥분한 바즈칼을 제지하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 세 명이 들어왔다.
“이게 뭔 일이야?”
“저기 누워 있는 거 마즈란 아냐?”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더러워진 모양새로 토사물을 쏟아내고 있는 동료와 이를 걷어차고 있는 낯선 기사였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커다란 체격의 기사가 고함을 질렀다.
“누가 우리 막내 건드리냐!”
기사는 곧장 바즈칼을 향해 덤벼들었고, 둘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주먹을 교환했다.
그렇게 몇 번 주먹질을 나누고 나니, 어느새 바즈칼은 상대에게 밀려 바닥에 깔려 있었다. 상대 기사와 워낙 체격 차이가 심했던 탓이다.
“바즈칼 경!”
마룬이 깜짝 놀라 소리치며 일어났을 때, 이미 아르센은 싸우고 있는 두 기사의 바로 옆에 도달해 있었다.
상대는 바즈칼을 찍어누르느라 무방비하게 뒤를 노출하고 있었고, 이를 노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르센은 두 손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잡아챈 뒤, 위쪽을 향해 집어던졌다.
기사의 몸뚱이는 그대로 나무로 된 천장을 뚫고 박혔다.
천장 너머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1층에서는 여주인이 그에 맞춰 비명을 지르며 화음을 이루었다.
“안 돼! 내 여관!”
소란 속에서,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소리쳤다.
“이 비겁한 새끼!”
“감히 형님을!”
두 기사는 동시에 아르센에게 덤벼들었지만, 용기에 비해 실력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아르센은 처음 달려드는 기사의 얼굴을 잽으로 후려친 뒤, 살짝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턱 중앙에 어퍼컷을 먹였다.
상대는 그대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러던 사이, 두 번째 기사가 달려와 주먹을 날렸다.
관자놀이를 노리는 매서운 일격이었지만 아르센은 고개를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곧장 가슴에 옆차기를 한 방 먹였다.
“커허억!”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물러선 기사는, 두려운 기색으로 아르센을 보더니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얹었다.
그때, 천장에서 쩌렁쩌렁 고함이 울렸다.
“뽑지 마!”
검에 손을 얹었던 기사가 깜짝 놀라 손을 내렸다.
소리를 지른 것은 맨 처음 천장에 박아 넣었던, 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거구의 기사였다.
그는 몸의 절반이 천장을 뚫고 2층으로 들어간 탓에,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신참도 아니고, 술집에서 칼을 뽑으려고 하냐!”
훈계하듯 말한 거구의 기사는 두 손을 천장에 대더니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힘을 주었다.
나무판자가 으스러지며 몸이 빠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2층에서 떨어진 거구의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나무 조각이 파고든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피범벅이었다.
“젠장, 잠깐 매달려 있었다고 어지러워 죽겠군.”
조금 전에는 급히 내던지느라 몰랐지만, 마주 서니 체격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키부터가 족히 40cm는 더 컸으며 어깨도 넓고 굉장한 근육질이어서, 아마 군주를 잡기 전이었다면 아르센 역시 맨손으로 덤빌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싸운다면 모를까, 격투전에서는 체급 차이가 주는 이점이 절대적인 법이니.
아르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거구의 기사는, 조금 머리가 식었는지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호랑이 발톱의 대장 요훈이다.”
“벨루안의 아르센.”
거구의 기사, 요훈은 아르센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자신에 비해 한참 작은 기사가 조금 전 그런 괴력을 발휘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분명 그가 본 기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준의 마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비상식적인 근력이었다.
“어디 물어나 보자, 왜 우리 막내를 개 죽 쑤듯이 두들겨 패고 있었던 거냐?”
“그쪽 막내가 술주정을 좀 부렸어야지. 이쪽에서 참아주고 얌전히 가라고 하는데 뺨을 때리고 침까지 뱉더군. 우리가 그런 것까지 참아 줘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아르센의 말에 요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잠시, 벽에 붙어있던 손님 하나를 지목해서 물었다.
“이봐, 저 말이 사실이냐?”
“네? 네, 어, 그게······.”
손님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눈을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어느 쪽에 유리하게 대답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 아니리라.
한참 고민하던 손님은, 마침내 눈을 꾹 감고 진실을 밝혔다.
“그게, 이 기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쪽에 토하고 있는 기사님이 마법사들은 눈을 뽑느니 어쩌니 먼저 시비를 거시다가, 대머리 기사님이 그만하라고 하니까······.”
그 와중에 바즈칼이 자신은 대머리가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요훈의 표정이 굴욕과 자괴감으로 어두워지고 있을 때, 계단 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인가?”
여관에 들어올 때 만났던 기사, 라수르였다.
“······라수르 부단장.”
“요훈 경? 드디어 돌아왔나 보구려! 근데 지금 이 소란은 도대체 뭐요? 우리 쪽 마법사 아가씨가 말하길, 조금 전에 누가 엉덩이로 자기 방의 바닥을 뚫고 침입하려고 했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