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87)
“저자들, 호랑이 발톱이라고 했었지.”
“그러게요.”
“강철 호랑이가 발톱 하나에 진 건가?”
아르센의 말에, 바즈칼은 멍이 든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울한 표정이 그야말로 맞고 돌아온 아이 그 자체였다.
그 모습에 아르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기 발톱에게 진 호랑이다운 표정인데.”
옆에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와 판자 박아넣는 소리가 힘차게 울리고 있었다.
목수들이 탁자와 의자를 고치고, 천장을 막는 소리였다.
그때, 요훈과 둘이서 이야기를 하던 라수르가 아르센을 불렀다.
“이야기 끝났소, 아르센 경.”
라수르의 말에 아르센은 바즈칼을 데리고 라수르와 요훈,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합류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요훈이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선······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사과에, 아르센은 고개를 흘긋 돌려 바즈칼을 보며 답했다.
“사과를 받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이 친구일 것 같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르센은 한 대도 안 맞고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했으니 말이다.
모욕당하고 얻어맞은 진짜 피해자, 바즈칼이 콧김을 흥 뿜으며 말했다.
“댁이 뭔 죄가 있겠수, 동료가 얻어맞고 있는데 나서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사과는 그 어린놈이 해야 하는 거 아뇨? 그놈은 뭐 하고 있길래?”
“마즈란이라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워낙 술을 많이 마셔서.”
“도대체 기사가 어쩌다 그 꼴이 된 겁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요훈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혹시 호랑이 발톱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각각 5개씩 해서 20개 아뇨.”
바즈칼이 즉시 답하자 요훈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유식함을 뽐내서 기쁜지, 바즈칼이 씩 웃었다.
“내 기승수가 대호(大虎)거든. 호랑이 키우는 사람이 그걸 모르면 안 될 일이지.”
그 말에 잠시 허탈한 웃음을 지은 뒤, 요훈이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 호랑이 발톱은 5개죠. 저희도 모두 다섯 명이었습니다. 거기서 따온 거죠.”
하지만 요훈의 말과 달리,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대장인 요훈과 취해 뻗은 마즈란, 그리고 아르센에게 얻어맞은 이름 모를 기사 두 명까지.
“최근에, 미궁 유적 하나에 도전했다가 동료 한 명을 잃었습니다. 마즈란과 같은 고향에서 온 소꿉친구이자 약혼자였죠.”
갑자기 진행되는 무거운 이야기에, 아르센과 바즈칼 역시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다.
“함정에서 그 녀석을 구하려다 대신 죽은 거였습니다. 시체도 못 건졌죠. 저희도 괴로웠지만, 마즈란은 오는 내내 자책감으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요훈의 목소리는 괴로움으로 낮아져, 짐승이 구슬프게 으르렁대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위로할 겸 술이나 마시자고 비싼 술집에 갔는데, 기사도 조심스럽게 먹어야 할 독주를 병째로 들이붓더군요.”
옆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 아르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바즈칼은 물론, 마룬이나 엘로이즈, 그 외의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요훈의 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만 마시랬더니, 혼자 꽁하니 앉아있다가 먼저 숙소로 들어가 보겠다면서 휙 사라져 버린 겁니다. 취한 놈을 혼자 보내자니 걱정도 되고 해서 따라온 건데, 그새 이런 사고를 쳤을 줄은.”
“말하는 걸 듣자니 마법사에게 유감이 많은 거 같던데요.”
“녀석이 온 영지가 좀 그런 문화가 있었답니다. 여기서 일 년쯤 지내면서 따로 교육했죠.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마침 약혼자가 마법사의 함정에 걸려 죽었다 보니······.”
요훈은 현대와 고대의 마법사를 분리해 생각하지 못하는 자가 많노라고, 그래서 마법 함정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기거나 동료가 죽었을 때 그 원한을 마법사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이들이 많노라고 변명했다. 어려서부터 그런 식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면 특히 더 그렇다고도 했다.
‘그딴 더러운 함정이나 만들어 놓고, 사람 목숨을 뭐로 아는 거야······.’
아르센은 마즈란의 술주정을 다시 떠올렸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느냐랑 별개로, 인과관계 자체는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일어나면 확실히 사과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놈이 취해서 사리 분별을 못 한 거지, 원래 타고나기를 나쁜 놈은 아닙니다. 진심으로 사과할 겁니다.”
요훈의 말에, 아르센은 바즈칼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바즈칼?”
“형님 생각은요?”
바즈칼이 되묻자, 아르센은 잠시 숙고한 뒤 말했다.
“받아주는 게 좋겠는데. 괘씸하긴 하지만, 워낙 정신적으로 힘들 만한 상황이었으니.”
엘로이즈가 자신을 구하려다 비참하게 죽어 절망한 상황이라면, 아르센 역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술이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즈란이 겪은 비극은 어느 정도 참작할 만한 것이었다.
사실, 바즈칼이 몇 대 맞은 거 말고는 손해도 없었고.
아르센의 말에 바즈칼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형님이 그러신다면.”
바즈칼의 대답을 들은 아르센은, 요훈에게 통보했다.
“따로 보상하실 필요는 없고, 그냥 기물 파손으로 인해 여관이 입은 손해만 배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거라면 이미 내가 지불했소. 천장, 탁자, 싸움 도중에 손님들이 나가서 못 받은 식사 비용까지 모두.”
그때, 라수르가 끼어들어 말했다.
어쩐지, 천장이 부서질 때까지만 해도 죽을 듯한 표정이던 여주인의 얼굴이 방긋 핀 이유가 있었다.
“라수르 경이 말입니까?”
질문 안에 담긴 네가 왜, 라는 뉘앙스를 알아들은 것인지 라수르가 짐짓 헛기침했다.
“일단 자기소개를 좀 해야겠소.”
라수르는 살짝 의자를 들어 탁자에서 멀어진 뒤, 과장된 태도로 몸을 낮춰 인사했다.
“나는 ‘새벽 발굴단’의 부단장이자 가름칼 발굴대의 대장인 라수르요. 그리고 여기 요훈 경의 호랑이 발톱 발굴대는 우리 발굴단 소속이고.”
“그렇군요.”
발굴단이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간단히 말해 특정 목적을 위하여 여러 발굴대가 모인 조합이었다.
발굴대란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소규모 조직을 말하는 것이고.
아르센의 일행처럼 큰 규모는 보통 발굴단으로 여겨지지만 대장이 한 명이라서 발굴대라 해도 무방한 등, 기준을 명확하게 정해놓고 쓰는 용어는 아니었다.
“우리가 군대처럼 딱딱한 상하 관계는 아니오만, 그래도 부단장으로서 동료가 곤경에 빠졌으니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소. 이걸 대놓고 말하는 것은 실례지만, 요훈 경은 이번 공략에 실패한 만큼 경제적으로도 다소······여유가 없을 테니.”
요훈이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때, 라수르가 아르센을 보며 물었다.
“혹시 새벽 발굴단에 대해서 들어보셨소?”
“그것까지는 못 들어봤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생긴 지 얼마 안 됐거든. 이제 두 달쯤 됐나. 아니, 좀 더 됐던가?”
장난스럽게 웃은 뒤, 라수르가 다소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유적 도시에 발굴단이 꽤 있지만, 우리 발굴단은 그중에서도 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오. 그 목표가 무엇이냐면, 바로 ‘고대 시대에 대한 발견’이지.”
“그거라면 모든 발굴자들의 목표 아닙니까? 다들 고대 유물을 찾아서 유적을 헤매는 거잖습니까.”
아르센의 반문에 라수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는 좀 다르오. 대부분 발굴자는 강력하거나 특별한 효과를 지닌 유물을 발굴해서 그 힘을 취하거나 팔아 이득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잖소. 그와 달리 우리의 목표는 역사 탐구요. 고대인들이 어떻게 살았나, 어떻게 부흥하고······어떻게 멸망했는가. 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지.”
“역사 말입니까.”
“그렇소. 그래서 우리는 강력한 유물과 일기장 중 하나를 챙길 수 있다면 일기장을 챙기오. 그 안에 더 많은 지식과 정보가 담겼을 테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라수르가 씩 웃었다.
“여기서 ‘그냥 모으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지. 우리의 목표는 고대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어, 세상을 그 좋았던 시대로 되돌리는 것이라오.”
라수르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내용을 들은 아르센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고대가 지금보다 살기 좋은 시대였다고 믿으십니까?”
“세상 어디에나 구전되는 이야기가 있잖소. 먼 과거의 이야기, 온 세상에서 녹색 풀이 자라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으며, 어린아이조차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 마수나 약탈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벨루안 역시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던 탓이다.
먼 고대, 마법사의 잘못으로 멸망의 죄업을 지어, 세상은 망가졌으며 모든 인간은 영지와 성채에 갇힌 수형자(受刑者)가 되었노라는 신화.
과거 아름다운 낙원이 지상에 있었으나 죄를 지은 탓에 영원히 낙원을 잃었다는,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
이는 벨루안에서만 전승되는 것이 아니어서, 그간 아르센이 돌아다녔던 영지 곳곳에서도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골자는 비슷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었다.
마치 지구에서, 교류가 없는 먼 문명들이 홍수 신화를 공유했던 것처럼 말이다.
“상상해 보시오. 마수가 없는 세상을. 약탈자가 없는 세상을. 어린아이들이 성벽 밖에 나가서 즐겁게 놀 수 있고, 언제나 원한다면 목숨을 걸지 않고도 다른 영지, 그리고 더 멀리 떨어진 영지로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을. 영지 밖의 넓은 평야가 모조리 밭이 되어 아무도 굶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더 안전하고, 더 풍요로우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거요! 어두운 밤을 지나, 새벽이 올 수 있도록!”
격정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라수르에게서, 아르센은 훌륭한 웅변가이자 선동가의 자질을 엿보았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크고 열정적인 목소리, 틈틈이 맞추는 것을 잊지 않는 시선, 역동적인 몸짓까지.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열정을 감염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환생자로서, 그런 세상이 마냥 낙원인 것만은 아님을 아는 아르센조차 잠시 혹하게 할 정도로.
아르센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소란도 있었던데다 시간이 꽤 늦었기에, 사건 관계자들 외의 다른 손님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천장과 탁자를 고치는 수리공들, 그리고 이를 감독하는 여주인은 아직 1층에 있었다.
라수르의 목소리는 그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런 말씀을 이런 곳에서, 아무한테나 하셔도 됩니까?”
“아무한테나 못 할 건 뭐요?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이고,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없잖소. 그리고······.”
라수르가 씩 웃더니 말했다.
“그대가 ‘아무나’가 아니게 되면 될 문제기도 하고.”
“제게 합류를 권하시는 거군요.”
“맞소. 우리는 언제나 젊고 열정적인 모험가를 찾고 있거든. 요훈 경을 집어 던질 정도의 힘에, 같은 기사 두 명을 순식간에 격투로 제압할 정도의 기량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심지어 기사 동료 하나와 잘 무장한 전사들, 그리고 많은 마법사 동료들까지 데리고 있다면 더더욱!”
“왜 처음에는 제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크렌 단장은 몰라도, 나는 능력만큼이나 인품을 중시하거든. 자신의 이득이 아닌 온 세상의 이득을 추구하는 일이니,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으니까. 그대가 조금 전 보여준 태도를 보고 확신이 섰소.”
크렌. 아르센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상인 모로에게 들었던, 미개척 유적을 공략하고자 사람을 모으고 있다는 기사의 이름.
생각이 이어지기 전, 라수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요훈 경에게 수리비 이상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니 이는 공정함이요, 마즈란 경의 불행한 사정을 듣고 이해하니 이는 관용이요, 한낱 공상으로 취급되곤 하는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니 이는 진중함이지. 이런 사람을 어찌 놓치겠소.”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과장된 칭찬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르센을 괴롭게 하는 것은, 옆에서 바즈칼이나 다른 사람들이 사람 볼 줄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르센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대답했다.
“너무 칭찬해 주셔서 이러다 날아가겠군요.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그리 와닿지는 않습니다. 저는 공익(公益)보다 개인적인 이득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아르센이 개인으로, 그저 유물을 찾아서 돈 좀 벌겠다는 막연한 목적으로 온 사람이었다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박력 있는 설득이었다. 그 의도 역시 나빠 보이지 않았고.
하지만 아르센은 계승자였으며, 그것은 특히 이 유적 도시에서는 절대 들켜선 안 될 특징이었다. 만약 아르센의 능력에 대해 알려진다면 어느 발굴단이든 아르센의 몸뚱이를 가지겠다고 눈에 불을 켜며 덤벼들 테니.
그런 아르센이 다른 조직과 협업을 할 수는 없었다.
라수르는 조금 실망한 듯,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렇소? 참으로 유감이군······하지만 내 제안을 거두지는 않으리다. 어차피 이웃으로 지내며 종종 만날 터이니, 우리 발굴단의 평판 같은 것도 들어 보면서 천천히 생각해주시오. 그 대답이 바뀌길 기쁨으로 기다릴 테니.”
그렇게 말한 뒤, 라수르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남기고 동료들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요훈 역시, 다시 한번 죄송하다 인사를 남기며 올라가려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부탁드립니다만, 오늘 저희가 벌인 추태를 보고 새벽 발굴단을 판단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라수르 부단장도 그렇고, 다들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요.”
요훈은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습니다.’하고 말을 남긴 뒤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르센은 문득 피곤해져 두 눈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