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88)
모험을 떠나기 전에는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아르센과 일행 역시 그런 준비가 필요했다.
며칠간의 휴식으로 몸의 컨디션을 되돌린 뒤, 유적 발굴에 도움이 될 물건을 준비하고자 유물 상점을 방문했다.
당연히 전투에 특화된 강력한 유물은 어마어마하게 비싼 만큼, 발굴에 도움이 되는 보조 기능을 가진 유물이 목표였다.
“이게 진짜 그런 기능이 있다고요?”
“아,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좀 속고만 살긴 했죠. 잠깐 줘봐요. 확인 좀 해보게.”
실랑이하던 리노가 목걸이를 빼앗듯이 낚아채 아르센에게 바쳤다.
상인 역시, 행여나 리노가 이를 바꿔치기 하거나 가지고 도망칠까 싶었는지 얼른 걸어 나와 이를 감시했다.
리노가 정중히 내민 목걸이를 받아든 아르센은, 이를 다시 엘로이즈에게 넘겼다.
엘로이즈의 두 손이 빛나며 간단한 감식 주문이 발동됐다.
[어때?] [맞는 거 같은데? 목표를 지정하고, 추적하고, 뭐 그런 기능이네. 일회용도 아니고, 이상한 기능은 없는 거 같아.] [고마워. 문제없으면 사야겠다.]“얼마라고 했지?”
상인은 어마어마한 값을 불렀지만, 아르센은 흔쾌히 이를 치르고 구매했다.
유적 도시에서는 모든 물건이 비쌌다.
계속해서 유물이 발굴되고, 그 유물을 사고자 먼 곳에서 찾아온 이들이 돈을 뿌리는 탓이다.
그렇기에, 어떤 물건을 구매하든 화폐경제가 존재하는 다른 영지를 기준으로 했을 때 몇 배의 금액을 지불해야 구매할 수 있었다. 식사든, 숙박이든.
오직 하나, 유물의 가격만은 훨씬 쌌다.
다른 영지에서 유물이라는 건, 어지간히 무용지물인 물건이 아니고서야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물건이었으니.
상점에서 나온 아르센은 주위를 둘러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화 구역 내부인 이곳은, 자유분방한 외부 구역과 달리 엄격하게 통제되는 분위기였다.
포장한 것이 아니면 함부로 무기를 휴대할 수도 없어서, 길을 가는 행인들 모두 비무장이었다.
아르센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고.
모두가 나오는 것은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괜한 충돌도 있을 수 있기에 아르센과 엘로이즈, 바즈칼, 리노, 그리고 짐을 들 병사 네 명만 나와 있었다.
“오, 형님. 저거 좀 보십쇼.”
그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뭔가 소란이 일어나자, 바즈칼이 아르센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바즈칼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치고받는 두 명의 기사가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잠시, 호각을 불며 다가온 경비대가 두 사람을 연행했다.
경비대원들은 모두 평범한 병사였지만, 딱 봐도 강력해 보이는 유물로 무장하고 있었다.
비무장인 두 기사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흑사자의 구역이 치안이 좋다더니, 그 말이 맞네요.”
정화 구역 내부에서 시장이 열린 곳은 몇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흑사자’라는 집단이 운영하는 구역이 치안이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모로에게서 한 번 들은 뒤, 여관의 여주인에게서 다시 확인한 정보였다.
“정작 영주가 직접 운영하는 구역은 위험하다죠.”
“아무래도 초짜들이 다니기엔 치안이 좋은 쪽이 낫지.”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흑사자의 구역은 세금을 많이 떼는 탓에 물건값이 비싸다고 했다.
하지만 아르센은 위험한 상황에 휘말느니 돈을 조금 더 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물건을 몇 개 더 구매한 뒤, 리노가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이 정도면 준비하라고 하셨던 장비는 얼추 다 구했습니다.”
땅을 파는 토굴 지팡이, 이전 루덴이 하나 준 적 있었던 물을 정화하는 물통, 누군가 접근했을 때 소음을 내며 이를 알리는 파수꾼의 등롱, 그 외에도 여러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잡다한 유물이 기승수에 실렸다.
누군가 훔쳐 가는 것을 막고자, 병사 네 명이 이를 포위한 채 사방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아르센 경!”
슬슬 돌아가려던 무렵, 누군가 아르센을 불렀다.
돌아보니, 요훈과 그가 이끄는 호랑이 발톱 발굴대였다.
요훈이 손을 몇 번 흔들다 다가와서 말했다.
“이거 시장에서 또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허허 웃으며 인사한 요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얼굴을 한 젊은 기사, 마즈란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르센 경.”
“······반갑다. 마즈란.”
아르센은 다소 어색한 기분으로 마즈란을 하대했다.
우습게도, ‘젊은 기사’인 마즈란은 스물한 살로 아르센보다 몇 살이 많았던 탓이다.
인사를 받는 아르센의 옆에서, 바즈칼이 나섰다.
“애송이.”
“바즈칼 경.”
마즈란이 굽신거리며 손을 내밀자, 바즈칼은 오만하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패악을 떨며 다짜고짜 시비를 걸던 첫인상과 달리, 술에서 깬 마즈란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청년이었다.
사정을 모두 듣자마자 넙죽 무릎까지 꿇고 이마를 땅에 박으며 사과했는데, 그 태도가 너무나 절실했던 나머지 바즈칼에게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마즈란과 악수를 하며, 바즈칼이 말했다.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 같아 보여서 다행이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마즈란이 흐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말대로, 마즈란은 갓 술에 깼을 때보다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주위에서 보기에는 충분히 어두웠지만.
적어도,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처럼 보였던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바즈칼이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젊은이에게 허세를 부리며 자존감을 충전하는 사이, 요훈이 아르센을 향해 물었다.
“유적 공략을 준비하시려는 겁니까?”
“맞습니다.”
“어딜 공략하시려는지 물어보면 실례겠죠.”
요훈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씩 웃었다.
그 질문을 흘려내며, 아르센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요훈 경도 사용하신 물자를 보충하러 오신 겁니까?”
“조만간 그러긴 해야겠지만······아직은 아닙니다. 좀 더 쉬어야죠. 오늘은 지난 여정에서 얻은 물건을 좀 팔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요훈은 뒤쪽을 가리켰다.
확실히, 그의 동료 중 하나가 큼지막한 보따리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건 없었습니다만, 당분간 머무를 숙박비랑 새로 유적을 공략할 준비를 할 비용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디다 파시려는 겁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요훈이 씩 웃었다.
“저희 새벽 모험단과 연결된 상점에 팔 겁니다. 거기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비싸게 사 주거든요. 아르센 경도 어디인지는 알아 두시죠.”
“어디 있습니까?”
“저기, 위쪽 벽돌만 붉은 건물 보이시죠? 저기입니다. ‘진실 상회’라고 하죠. 단원이 아니어도 역사적 사료는 가격을 잘 쳐 주니까 애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 * *
물건을 구매하고 돌아온 뒤, 아르센은 가장 큰 방에 전원을 소집한 뒤 회의를 열었다.
마법사와 비마법사가 좌우로 나뉘어 앉은 가운데, 아르센이 상석에 앉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자, 우리가 여기서 가장 먼저 공략할 유적은 ‘거울 유적’입니다. 마룬 경?”
별부르미 별동대의 수장이자 정보 제공자인 마룬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우선 거울 유적은, 이전에 한 번 공략된 적이 있는 유적입니다. 몰래 한 거라서 이곳 사람들은 모르겠지만요.”
마룬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여기서 사소한 문제는, 이에 대해 남은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모두 알고 있는······아르센 경의 특별한 능력과 같은 것으로 쉽게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외의 자료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요.”
별부르미의 말에 따르면, 과거 그들의 수장은 ‘암호’를 정확히 어느 유적에 숨겼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르센 일행은 서쪽을 돌며 과거 별부르미가 열어본 적이 있는 유적을 모두 확인해야 했다.
그 중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이 거울 유적이었다.
“일단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안에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환상이 많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거울을 이용하는 건지, 아니면 완전히 환상인지는 모르지만, 거울로 된 미궁을 뚫고 목적지까지 돌파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죠. 아마 목적지에는 전처럼 열 수 없는 문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요.”
리노가 다소 당황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는 이곳 사람들도 다 알 만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게, 정말 이곳에 대해 남은 이야기가 없어서요. 저희가 공략한 다른 유적은 꽤 자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곳은 그냥 ‘간단히 통과했다’라고만 되어 있어서······.”
마룬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그들이 과거 통과한 유적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과거 기록, 그리고 상인으로 위장한 첩자들이 남긴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
현재 별부르미에 남은 장로들은 당시 간부나 핵심 요원이 아니었기에, 유적 공략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탓이다.
“너무 막연한데요, 그냥 간단하다는 것만 믿고 돌격하자니. 차라리 이곳 사람들에게 수소문이라도 하면?”
바즈칼의 질문에 아르센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여기 사람들은 어느 유적을 공략할지 남에게 함부로 알리지 않아. 미리 알려줬다가 누군가가 그걸 노리고 함정을 팔 수도 있으니까. 받은 정보가 진실이란 보장도 없을 거고.”
아르센은 거짓 정보는 정보가 없는 것보다도 위험하다고 덧붙이며 바즈칼의 의견을 부정했다.
바즈칼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다 말했다.
“그러면, 그냥 들이 받아 봐야죠. 뭐.”
고개를 끄덕인 뒤, 아르센이 말했다.
“일단 내일 떠날 인원을 따로 선별하겠습니다. 첫째로 이번 유적은 특성상 많은 인원을 동원할 필요가 없어 보여서이고, 둘째로는 우리 인원이 너무 많으면 눈에 띄어서입니다.”
실제로, 이 유적 도시에서 아르센의 일행은 유난히 시선을 끌고 있었다.
많아도 열 명이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다른 발굴대에 비해, 이십 명이 넘는 큰 규모를 유지하는 탓이었다.
물론 무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눈에 띄든 말든 모두가 참여해야겠지만, 정보에 의하면 이번 유적 공략에서 많은 병력은 필요가 없었다.
눈에 띄지 않는 인원으로, 공략했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살짝 처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것을 확인한 후, 아르센은 천천히 호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엘로이즈 아가씨, 마룬 경, 리노.”
호명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노는 병사 중 다섯 명을 뽑도록. 마룬 경도 마법사 중 세 명을 선별해 주시고요. 이렇게 총 열두 명이 공략에 나서고, 나머지는 숙소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아르센은 한 마디 덧붙였다.
“숙소에서 기다리는 인원들도 자신의 임무가 하찮다 여기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유적 공략 한두 번은 실패해도 되지만, 여기 있는 기반이 더 소중하니까요.”
사실 정말 중요한 물건들은 루덴이 준 마법 배낭에 넣고 다녔지만, 아르센은 짐짓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남아 있는 이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자기들끼리 편하게 쉰다고 해이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지루하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 이 여관에서 나가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외출은 위험하기도 하고, 분쟁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바즈칼이 책임자가 될 테니, 지시를 잘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마법사들 역시 해당하는 이야기였기에, 아르센은 높임말을 사용해가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들 역시 큰 불만이 없는 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다, 바즈칼.”
“걱정하지 마십쇼, 형님. 갔다 오시는 동안 짐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바즈칼이 나름 믿음직스럽게 외쳤다.
기사인 바즈칼을 유적 공략에 동원하지 못하는 것은 꽤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병사와 마법사들만 달랑 남겨놓을 수는 없었다.
수백 명의 기사가 돌아다니는 이곳 유적 도시에서, 사건이 일어날 경우 최소한 통솔자 한 명 정도는 기사여야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 그럼 모두 돌아가서 잡시다. 어떤 모험이 우리를 기다릴지 몰라도, 순조로울 거라고만 믿을 수는 없으니.”
* * *
다음날, 그들은 여정을 떠났다.
가는 길은 아르센의 예상과 달리 순조로웠다.
열세 명으로 규모를 줄인 그들은 조금 많긴 해도 눈에 띌 정도로 거대한 집단은 아니었기에, 낯선 사람에 익숙한 이곳 사람들은 그냥 못 보던 발굴단이려니 하고 말았던 탓이다.
장벽을 나서 남서쪽으로 향하기를 몇 시간, 모두가 기승수를 탔으며, 짐을 든 기승수를 별도로 부리지도 않았기에 그 속도는 여행하던 것에 비해 훨씬 빨랐다.
덕분에, 그들은 녹색 달을 만나는 일 없이 저물어가는 햇살 아래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끼 낀 비석이 잔뜩 늘어선 무덤.
거울 납골당이라 불리는 유적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