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90)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마룬을 진정시킨 뒤, 아르센은 다른 사람들을 몇 번 더 들여보내며 환상을 시험했다.
그 결과, 이 환상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환상에 빠질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엘로이즈가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함정이네. 원리도 모르겠고.”
정리한 바에 의하면, 우선 들어간 자는 그대로 사방에 거울이 깔린 미궁에 들어간 것 같은 환상을 보게 되었다.
환영을 보는 당사자에게 있어, 이 거울로 이루어진 벽은 확실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덤으로, 환상에 빠진 상태에서는 거울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거울 벽의 강도는 물리력과 마법 등, 무슨 수를 써도 뚫을 수 없을 정도이며, 따라서 미궁을 뚫거나 우회하는 꼼수는 불가능했다.
흠집을 내거나 무언가를 칠해도 곧 없어지기에 따로 표시는 불가능하고, 당연히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길을 잃게 되었다.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뒤쪽 통로가 막혀 있지만, 실제 위치는 바로 계단 구역 앞쪽이니, 나가는 방향을 찾아 헤매다 보면 어렵지 않게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깊숙이 들어간 상태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리고 마룬이 필사적으로 주장한 것과 달리, 사람에게 공포심을 불어넣는 정신 마법 따위는 없었다.
“아니, 진짜 뭐가 이상했다니까요?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심장이 뛰고, 그런 게······!”
마룬이 필사적으로 주장했지만, 마룬 외에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하긴 했어도, 극적인 공포를 호소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기사에게만 작용하는 마법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마룬이 무사히 나오는 모습을 한 번 봤기 때문에 그리 큰 공포를 느끼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 환상을 실험한 끝에 알아낸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아르센 본인, 그리고 아르센과 신체를 접촉한 사람이 거울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 접촉한 사람은 거울벽이 보일지언정 물리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게 되어, 마음대로 벽을 뚫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과 손을 잡는 식으로 2차 연결, 3차 연결을 해도 마찬가지로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손에 손을 맞잡고 기차놀이를 하듯이 전진하는 것이 이 환상 함정을 통과하는 비법이었다.
처음에는 좀 더 편하게 밧줄 같은 것을 이용하려 했지만, 밧줄로 연결한 채로 함께 가려고 하니 어느 순간부턴가 밧줄이 끊어져 버렸기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자,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혹시 손 놓치면 바로 소리 지르시고.”
“네!”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한 손으로는 마법사들을, 다른 한 손으로는 리노와 병사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다가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에서 봤을 때는, 지금 이 모습이 마치 텅 빈 주차장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 같은 모양새였던 탓이다.
이와 달리, 따라가는 사람들은 주위를 보며 연신 탄성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울의 세상 속, 자신과 손을 맞잡은 동료들이 벽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지고 나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 광경이 기이하고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서로 다른 광경을 감상하며 그들은 미궁 속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끌던 아르센의 눈에 기묘한 것이 보였다.
기둥 옆에 기대고 앉아 있는 누군가의 모습.
아르센은 그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대장님?”
아르센이 방향을 바꾸자, 일반인 쪽에서 그와 손을 맞잡고 있던 리노가 의문을 표했다.
“사람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아르센은 그것이 이미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시체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복식이 위에서 봤던 발굴단과 비슷했기에, 시체의 정체가 그 발굴단의 일원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체의 상태로 미루어 보아, 죽은 것은 몇 시간 전.
피 묻은 단검과 목의 상흔은 시체의 사인(死因)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마법사 쪽 라인에서 아르센과 손을 맞잡고 있던, 그 덕에 눈앞의 광경을 생생히 볼 수 있었던 엘로이즈가 물었다.
“자살이야?”
“응. 다른 상처는 없고, 위치도 딱 그렇네.”
죽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발악한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까지고 멍든 모습이 보였다.
아마 필사적으로 거울 벽을 두들기고 때렸으리라.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탈출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음을 결정하기까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을까.
암울한 생각을 떨치고자, 아르센은 엘로이즈를 가볍게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 시체는 돌아오는 길에 가져다주도록 하고.”
그렇게 걷기를 잠시,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 하나가 또 보였다.
이 사람도 이미 죽었나 생각했지만, 혹시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할 겸 다가갔다.
‘살아있나?’
놀랍게도, 이번에 찾은 사람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가슴과 복부가 들썩이는 모습에서 호흡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르센과 손을 마주 잡고 있던 엘로이즈, 리노도 생존자를 볼 수 있었다.
“생존자네?”
“데리고 가실 겁니까?”
리노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들은 이 유적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음을 누구에게도 알릴 마음이 없었다.
당연히, 이 생존자를 데려간다면 그들이 유적을 돌파하는 모습을 모두 보게 될 것이고.
리노의 물음에 아르센은 간단히 답했다.
“그냥 데려가지. 혹시 일어난다면 기억은 지우고.”
“아······.”
아르센은 기억을 지우는 것을 썩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적어도 안에서 죽게 두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은 리노가 마법사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엘로이즈 한 명뿐이었지만.
아르센은 진에 탄 채, 진의 앞다리를 이용해 여자의 몸을 들어 뒤편에 얹었다.
“다시 갑시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마침내 벽과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엘로이즈가 중얼거렸다.
“끝났다.”
그 말에 아르센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당연히 그의 눈으로는 환상이 끝났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엘로이즈가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 세 번째 사람이 서 있는 곳부터 미궁의 환상이 사라져. 완전히 통과한 것 같아.”
이후 통과 지점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끌어내는 것으로, 마침내 아르센 일행은 모두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적인 유적을 통과한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한 방법으로.
엘로이즈가 넘어온 미궁 구역을 보며 자조하듯 말했다.
“왜 이곳을 지나가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았는지 알겠네.”
확실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냥 환상에서 헤매고, 계승자가 가서 도와주려고 시도하기만 해도 해결 방법을 알게 될 테니까.
옆에서 마룬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인들의 지혜 아니겠습니까.”
아르센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뒤, 뒤에 매달고 있던 생존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병사 한 명을 시켜 돌보도록 지시했다.
“그냥 다시 미궁에 뛰어들지 못하게만 해라. 혹시 모르니까 무기는 빼앗아 두고.”
“알겠습니다!”
살펴보니 부상도 없었고, 그냥 지쳐서 쓰러졌을 뿐이었다.
이 정도 조치면 충분했다.
아르센은 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룬이 재빨리 책을 펼쳐 읽으며 말했다.
“자, 이제 진짜 이 책이 활약할 시간이네요. 여기서는 계승자가 손을 대고 ‘문을 열어라!’라고 말하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러게 말입니다.”
동의하며, 아르센은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전에 들었던 것과 유사한, 라디오 주파수가 비틀린 듯한 괴음이 문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으로 직접 주입되는 듯한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그 의미를 전달했다.
-안녕하십니까, 방문자님. 전투 인형 1개, 전투 인형 유사 아종 11개와 함께 방문하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용무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뭐.”
자기도 모르게 직접 입 밖으로 의문을 표할 뻔한 아르센은 재빨리 이를 삼켰다.
다행히, 들은 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전투인형이라고?’
그 의미조차 짐작할 수 없는 단어에 아르센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함께 방문했다’라고 했으니 아르센 본인은 저 계산에서 빠졌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문 앞에 선 사람은 총 13명이었다.
아르센과 엘로이즈, 리노, 마룬, 병사 다섯 명, 마법사 세 명, 그리고 조금 전 구한 생존자 하나까지.
이 중 하나만 전투 인형이라고 칭하고 다른 열한 명은 유사 아종이라고 칭했다. 무슨 의미인가?
생각에 잠기려던 순간, 마룬이 의아하다는 듯이 아르센을 불렀다.
“아르센 경?”
“······아, 아닙니다. 잠시만요.”
아르센은 의문을 밀어 넣으며, 마룬이 알려준 대로 말했다.
“문을 열어라.”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방문자님. 환영합니다.-
그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 * *
일전에 보았던 유적 내부와는 또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이 탐험했던 유적이 중세풍 연구소에 가까웠다면, 이곳은 그에 비해 훨씬 생활 공간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생활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누군가 살던 흔적은 없는 곳.
비유하자면 비상용 벙커 같은 분위기라 해야 할까.
“일단 다 같이 뒤져 보죠.”
마룬의 제안에 따라, 일행은 흩어져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리 특별한 물건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곳은 이미 별부르미가 한번 발굴하여 쓸만한 물건을 모두 건져낸 유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온 이유는 오직 하나, 이곳이 전대 별부르미 수장이 암호를 남겨놓았을 수 있는 곳 중 하나여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챙길 물건이 없지는 않았다.
희귀 금속으로 된 컵 같은 잡동사니부터, 물을 공급하는 유물까지.
밖에서 팔면 돈이 될 것 같은 것이 몇 개 있었다.
아르센은 그런 물건 역시 모아두라고 지시하며, 마룬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건질 게 많군요. 아예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럴 겁니다. 당시에 손이 모자라서 너무 무겁거나 쓸모없는 물건은 놓고 오셨다고 했거든요. 그때는 필요 없던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도 있을 거고······.”
그 말대로, 그나마 괜찮은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물 생성기 역시 그 크기와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건장한 병사 네 명이 힘을 합쳐 들어야 할 정도여서, 도저히 휴대용으로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 안에 다른 유물이 많았다면, 굳이 이런 것을 챙겨 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 생성기를 가져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병사 한 명이 아르센을 불렀다.
“대장님, 찾은 것 같습니다!”
병사 한 명이 들고 온 물건은 석판이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밋밋한 모양의 석판. 들은 그대로의 생김새였다.
아르센은 그것을 받은 뒤 마룬에게 넘겼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보시죠. 간단한 가열 주문이면.”
마룬의 손에서 빛이 난 뒤, 석판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곳에는 마법으로 새겨진 듯 깔끔하게 음각된 글씨가 드러나 있었다.
‘세 번째 단서-’항해하여‘, 아바테가 씀.’
아르센은 마룬을 향해 비석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게 바로?”
“맞습니다! 전대 수장님이 직접 쓰신 거죠.”
마룬은 크게 기뻐하며 비석을 들어, 음각된 부분을 쓸었다.
“어릴 적에 두어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자상한 분이었죠. 좋은 마법사가 되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마룬은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 특유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비석을 매만졌다.
아르센은 그가 충분히 여운을 즐길 정도로 시간을 준 뒤에야 질문을 던졌다.
“거기 쓰여 있는 암호가 그겁니까?”
“네. 빨리 외우죠.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일전에 별부르미의 장로들이 말하길, 도서관을 부르기 위해서는 특정한 암호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암호는 보안 유지를 위해 수장만이 알고 있었는데, 당시 수장은 암호 내용을 그들이 탐험한 유적 중 몇 군데에 몰래 보관하자고 제안했다고 하던가.
혹시나 암호를 잃게 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그리고 그들이 유물을 가져감으로서 허탕을 치게 될 후대 모험가들을 위한 작은 보상의 의미도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아르센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별부르미의 전대 수장이란 사람이 비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자인, 괴짜에 가까운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남부의 거인왕에게 암호만은 넘어가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몇 번이고 되뇌어 외운 뒤, 아르센은 비석을 꽉 쥐었다.
“아······.”
마룬이 아쉬운 듯 탄식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미 사전에 합의한 내용이었기에.
아르센이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자, 비석은 맥없이 두 갈래로 쪼개졌다.
이후 쪼개진 비석을 꽉 움켜쥐어 부스러트리기를 몇 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센의 두 손에는 암호가 적힌 비석이 아닌, 한낱 돌 부스러기만이 남게 되었다.
그 부스러기마저 탈탈 털어내는 것으로, 아르센은 암호의 은폐를 마쳤다.
“단서가 모두 몇 개랬죠?”
“네 개입니다. 이제 세 개 남았네요.”
“세 개라.”
아르센은 자동으로 닫힌 문을 흘깃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