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91)
말을 하는 벽.
나르비크의 유적에서 본 벽과는 조금 달랐다.
그곳에서 들린 목소리는 누가 봐도 틀에 박힌, 미리 녹음된 고정 멘트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금 전 목소리는 달랐다.
찾아온 사람들의 유형, 숫자를 분석해 알려주었다는 점.
그리고 음성 인식을 통해 문을 열어주었다는 점.
아르센은 그 점에서 미루어 보아, 어쩌면 벽과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마룬 경.”
“네?”
마룬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되도록 침착하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하려 노력했다.
“잠시 밖에 좀 나가보겠습니다. 아까 구조한 사람이랑도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마룬은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하냐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가는 길, 아르센은 지팡이를 팔에 낀 채 책 하나를 꺼내 읽어보고 있던 엘로이즈를 불렀다.
“엘리, 같이 가자.”
“나도?”
“혹시 어디 안 보이는 곳을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나가는 길, 다시 문에 손을 얹자, 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방문자님-
“문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현재 함께 들어와 있는 비인간 개체는 문을 열 수 없으니, 나갈 때 함께 데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충고와 함께, 처음 들어갈 때처럼 문이 열렸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생존자와 옆에 서서 이를 보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심심한 듯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병사는 아르센을 보고 재빨리 몸을 세웠다.
“대장님!”
“편히 쉬어. 저 사람은 아직 안 깨어났나?”
“방금 잠깐 일어나긴 했습니다. 비몽사몽하길래 물을 좀 줬더니 마시고 다시 쓰러졌지만요.”
쓰러진 사람을 잠시 본 뒤, 아르센은 병사에게 지시했다.
“저 사람 데리고 구석에 가서, 벽을 보고 서 있도록. 여기서 잠시 확인할 것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병사는 아르센의 기묘한 지시에도 의문을 표하는 일 없이, 순순히 생존자를 들어 업고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가 벽을 향해 몸을 돌린 것까지 확인한 후, 아르센은 다시 문에 손을 얹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문자님. 전투 인형 유사 아종 3개와 함께 방문하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용무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유사 아종 3개.
아르센은 문이 한 말을 되뇌며 옆에서 그를 보고 있는 엘로이즈, 그리고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한쪽 구석에 있는 병사와 생존자를 보았다.
문은 이 세 사람을 ‘전투 인형 유사 아종’으로 판단했다.
‘역시, 전투 인형이란 건 마룬을 말한 거였나?’
아르센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마룬, 혹은 엘로이즈 중 한 명이 전투 인형이며 나머지는 그 아종으로 분류될 거라고.
마룬은 아르센을 제외하고 일행 중 유일한 기사, 그중에서도 마법 기사였고, 엘로이즈는 유일한 영주 혈통의 후예였다.
‘바즈칼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마법 기사가 ‘전투 인형’으로 취급되는지, 아니면 기사가 그렇게 취급되는지 알 수 있었으리라.
어쨌든 확인 결과, 엘로이즈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종’으로 취급받을 뿐.
문은 마법사와 일반인을 구분하지 못했지만, 일반인과 기사를 구분했다.
그리고 아르센 자신은, 그들과 또 다른 존재로 분류됐고.
‘전투 인형이란 게 도대체 뭐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여러 가설, 그리고 의문이 오갔다.
별부르미는 계승자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이 단어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어째서 이런 중요한 정보를 아르센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어차피 유적에 온다면 이 목소리를 듣고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텐데, 미리 알려주는 편이 신뢰를 얻기 유리하지 않은가.
어쩌면, 전대 계승자는 별부르미에게 이 목소리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알려주지 않았다면 왜? 별부르미에게 유감이 있었나?
여러 의문을 마음속에 담은 채, 아르센은 멀리 떨어진 병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전투 인형이란 게 뭐지?”
“응?”
아르센의 질문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엘로이즈가 반문했다.
[잠시만, 기다려 줘.]그렇게 귀걸이로 말을 전한 순간, 답변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인식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 대답에 아르센은 맥이 탁 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인공지능까지는 너무 나간 모양이었다.
이후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 문이 인식할 수 있는 명령은 ‘문을 열어라’, ‘문을 열린 채로 두어라’, 이 두 가지가 고작일 뿐이었다.
그 어떤 질문에도 이 문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인식할 수 없는 명령이다’라는 대답 하나뿐이었다.
엘로이즈는 이를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르센이 안타까워하던 도중, 멀리서 미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생존자가 깨어난 것이다.
아르센은 엘로이즈와 함께 생존자를 향해 다가갔다.
생존자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고개를 붕붕 흔들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당황하여 물었다.
“여긴 어디죠? 그리고 당신들은 누굽니까?”
“여기는 미궁 안쪽이다. 쓰러져 있길래 구해 왔고.”
아르센의 말에 생존자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미궁 한가운데에서 결국 죽는구나 하고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느닷없이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니.
“혹시 지금······제가 죽어서 환각을 보고 있는 겁니까?”
“아니, 현실이지.”
생존자는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살았다느니, 드디어 돌아간다느니 뭐니 중얼거리며 바닥에 입을 맞추는 등 온갖 기행을 저지르던 생존자는, 급히 아르센을 돌아보며 물었다.
“잠깐, 지금 안쪽이라고 했죠?”
“그래.”
“나갈 방법이 있는 거겠죠? 제발, 제발 그렇다고 해주십쇼.”
나갈 방법을 모르겠다고 장난을 치면 칼을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간절한 태도였다.
굳이 이 불쌍한 사람을 놀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르센은 순순히 답했다.
“나갈 방법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정말입니까?”
환희에 찬 반문.
아르센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도록. 저쪽으로 갔다간 다시 미궁에 빠질 거다. 이번에는 구해줄 수 있으리라 장담 못 해.”
사실 미궁에 들어가도 얼마든지 꺼내올 수 있지만, 귀찮은 일을 방지하고자 그렇게 협박한 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생존자가 급히 소리쳤다.
“아, 잠시만요! 안에 제 동료들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아르센은 잠시 바깥에 있던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를 떠올렸다.
기사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
“동료가 모두 여덟 명 맞나?”
“맞습니다. 어떻게······?”
“이미 너 말고는 다 밖에 있다.”
생존자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그렇군요, 아무도 안 죽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자신을 남겨두고 동료들이 모두 나갔다는데도 다행이라니. 이 사람도 참 특이한 성격이었다.
선인이라고 해야 할지, 호구라고 해야 할지.
그 와중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자살자의 마지막이 떠올라, 아르센은 입안에 쓴맛이 감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 안으로 들아가······.”
들아가자고 말하려던 순간, 아르센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알립니다. 쥐덫 청소를 시작합니다. 방문자께서는 잠시 문 안쪽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립니다, 쥐덫 청소를 시작······-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 아래, 좌, 우, 어느 방향 할 것 없이 전부.
예민한 청력 탓에 영향을 크게 받은 아르센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그때, 엘로이즈가 귀걸이로 말을 전했다.
[센, 앞을 봐!]고개를 돌리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환상이 깔린 구역의 바닥이, 가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임은 저 멀리서부터 시작해, 안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센은 급히 문에다 손을 대고 외쳤다.
“문을 열어라!”
정중한 답변과 함께 문이 열리고, 아르센과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들어온 그들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마룬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르센 경!”
마룬이 급하게 아르센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 다행이다······아까부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어서요. 혹시 밖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습니다. 저희는 문을 못 열잖습니까.”
그 말을 듣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그 이상한 소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치 모터가 돌아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기이잉’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 밖에서 일어난 ‘청소’와 관계가 있는 무언가일 터였다.
“일단 잠시 기다리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아르센은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며 걸음을 옮겼다.
몇 분 뒤, 기이한 기계음이 멈추자 마룬이 물었다.
“혹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아십니까?”
“아마 이 유적의 기능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바깥에서 바닥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아마 이 방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침입자들의 시체를 치우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마룬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확실히, 직접 보지 않고선 상상하기 힘든 스케일이었다.
대형 주차장보다도 넓은 면적의 바닥이 물결치듯이 서서히 움직이는 광경은, 아르센의 눈에도 충분히 초현실적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일단, 나갈 준비는 끝났습니까?”
“챙겼습니다. 잡동사니부터 해서, 책도 돈이 좀 된다니 챙겼고······저건 어쩌죠?”
마룬이 가리킨 것은 거대한 물 생성기였다.
아르센은 한참 고민한 뒤, 고개를 저었다.
“저건······버리죠. 일단 나갑시다. 볼일도 다 끝났으니.”
결국, 물 생성기는 챙겨 나오지 않기로 했다.
지나치게 불편하기도 했고, 애초에 대부분 영지나 성채에는 물을 공급하기 충분한 수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외부에서 사용해야 쓸모가 있다는 뜻인데, 저런 물건을 들고 여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곳이면 모를까, 이 유적 도시에서 쓸모없는 물건이 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싸게 팔릴 가능성은 없었다.
여러모로 계륵인 물건이니 굳이 고생해서 챙겨가는 것보다 그냥 후세 사람들을 위한 선물로 남기는 편이 나았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일을 해야지······붙잡아.”
아르센의 명령에, 즉시 병사 두 명이 생존자를 붙잡았다.
생존자가 당황해서 외쳤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왜?”
아르센은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미궁을 통과할 수 있음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노라고,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지울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생존자가 필사적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만 기다리는 동생들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부모님도 없어서 제가 없으면 걔들은 다 죽어요! 제발······!”
병사 한 명이 시끄러웠던 탓인지 입을 막았다.
필사적으로 웁웁거리며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솥뚜껑 같은 손에 입이 덮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부탁합니다, 제론. 반나절 정도만 지우면 충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기억 삭제 마법의 전문가, 제론이 생존자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과거 어둔숲에서와 달리 훨씬 짧은 시간, 처절한 비명이 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조금 지웠으니까 얼마 안 가서 일어날 겁니다. 한 이십 분 정도?”
“빨리 나가야겠군요.”
그들은 곧바로 들어갔던 방식 그대로 미궁을 가로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던 도중, 아르센은 자살한 자의 시체가 있었던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체도, 흘렸던 피도, 단검도.
‘청소된 건가.’
그동안 미궁에서 나오지 못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들의 시체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벽 너머 어딘가, 어쩌면 저 지하 너머 어딘가에 묻혀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상상하자 오싹해졌다.
아르센은 이를 떠올리지 않고자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걸어가기를 몇 분, 다시 나선 계단이 그들을 반겼다.
지난번에 비해 시시할 정도로 간단히 끝난 유적 공략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귀걸이를 통해 전해져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센.]의문 가득한 엘로이즈의 표정.
이를 보며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줄게. 돌아가서 이야기하자.]엘로이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나르비크 유적 공략에서, 아르센은 문의 목소리에 대해 엘로이즈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아직 어리고 보호해야 할 대상인 엘로이즈에게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괜한 부담을 지울 뿐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여행 중, 특히 어둔 숲에서 엘로이즈가 보인 모습이 아르센의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엘로이즈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동료였다.
그것도 아르센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지금 아르센에게는, 동료의 지혜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