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97)
아르센은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것이 착시인지, 아니면 정말 노래진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자신이 바보 같은 고민 중임을 깨닫고 일어서려고 했다.
무릎에 힘이 풀려서 다시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크으······.”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무릎 꿇은 아르센을 보며, 크렌이 덤덤히 물었다.
“아직 충분히 못 쉬었나?”
“여기까지만 하시죠. 더 하다가는 진짜 죽겠습니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다른 기사가 말했다.
대련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폭발적인 움직임을 유지한 탓에 아르센의 체력은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더는 제대로 된 싸움이 어려울 정도로.
크렌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쉽군.”
스르릉, 하고 무기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때, 아르센의 뒤에서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정말 고생했소, 아르센 경.”
“······괜찮습니다, 라수르 경. 이 정도는.”
그렇게 말하며 접근하는 라수르의 얼굴이 악마처럼 보여서, 아르센은 상당히 표정 관리에 노력을 기울인 뒤에야 정중히 인사할 수 있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라수르가 씩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도 될 것을, 고생 좀 하지 않았소? 꽤 힘들어 보이는데.”
“사실, 전쟁에 참여한 적도 있습니다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듭니다.”
“그거참 큰일이겠소.”
신나게 웃는 라수르를 보며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말이 길어져 봐야 징징대는 것으로 들릴 것 같았다.
아르센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 노력하며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가르침을 주시는 겁니까?”
“응? 무슨 말이오?”
뜻밖에도, 라수르의 되물음에는,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제가 아직 크렌 경에게 자극이 될 수준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후배 기사를 위해 가르침을 주신 것 아닙니까?”
“크렌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을 거요. 워낙 단순한 친구라, 칼 몇 번 마주쳤다고 나자빠지지 않는 상대를 최대한 즐기고 싶었겠지. 크렌 입장에서도 경 정도의 실력자와 대련할 기회는 드물다오. 그 정도 실력자는 다들 위치가 있으니.”
비틀거리는 아르센을 잡아 일으켜주며, 라수르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크렌은 자신이 가르침을 줬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며, 그저 시원한 대련을 원했을 뿐이니.
그러니 거기서 무엇을 얻든 그것은 아르센 본인이 직접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일단 씻고 뭐라도 좀 먹겠소?”
* * *
본거지인 동쪽 여관에 조금 늦는다고 연락을 보낸 뒤, 아르센은 이곳에서 제공하는 시설을 이용해 몸을 씻었다.
그리고 지금, 크렌과 라수르를 건너편에 두고 앉아 마음껏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전혀 과장하지 않고, 음식을 삼킬 때마다 몸 안쪽에서 게걸스럽게 영양분을 탐하는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였다.
거의 몇 초에 한 번씩 쉬지 않고 음식이 들어가는 격렬한 리듬에, 라수르가 감탄했다.
“거참 잘 먹는구려. 뭐······이쪽도 마찬가지인가.”
그 말대로, 맞은편에 앉은 크렌 역시 아르센에게 뒤처지지 않을 기세로 음식을 흡입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이것이 정수를 취한 기사가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육체를 혹사했을 때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짐작했다.
본래 기사는 일반인보다 식사량이 많지만, 이 정도는 기사 기준으로도 비정상적이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음식을 내오고 내온 끝에야 식사를 멈춘 두 기사를 보며, 라수르가 음식을 내오던 종업원에게 지시했다.
“만족한 것 같아서 다행이군, 이제 그만 가져와도 되겠네. 차 한 잔씩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인사하고 물러가자, 이제야 조금 진정할 수 있게 된 아르센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음식이 풍족한 것도 신기하군요. 고기라면 마수를 잡을 이들이 넘쳐나니 이해가 갑니다만, 곡식을 재배하기엔 너무 좁지 않습니까? 이 도시는.”
이 유적 도시만큼 ‘좁다’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적 도시의 인구 밀도는 그 영역의 상당 부분이 정화 영역 외부, 즉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재배할 수 없는 공간에 있음을 생각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큰뿔소의 뿔을 이용해 엄청난 식량 생산량을 자랑했던 벨루안조차 인근 모든 성채에 풍부한 양의 식량을 공급할 수는 없지 않았던가.
물론 이는 운반 능력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이 많은 수의 기사와 전사들이 떼로 굶어 죽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부 구역에서 곡물 생산을 독점하는 ‘상회’의 힘이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소?”
아르센은 일전 작은 영지에서 보았던, 유적 도시에서 왔다는 상인을 떠올렸다.
“상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유물을 팔러 가는 유물 상인이었죠.”
“아마 그 친구도 상회 소속일 거요. 이 도시의 상인들은 다들 상회 소속이니. 어쨌든, 다들 쉬쉬하는 비밀이지만 상회는 식물 재배에 특화된 강력한 유물을 꽤 많이 갖고 있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큰 도시가 유지되는 것이 말이나 될까. 다들 굶주리다 떠났겠지.”
아르센은 역시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왜 이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티엔은 여기서 안주하고 있는 겁니까? 인근 모든 영지를 합친 것보다 강한데요. 듣기로 요즘에는 좀 실책이 잦았다지만, 어쨌든 구심점이 될 영주 집안도 멀쩡히 있잖습니까.”
수백 명의 기사, 그리고 어쩌면 수천 명이 넘을지도 모르는 전사들.
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부린다면 그 어떤 영지라고 해도 적수가 아닐 것이다.
아르센이 지금까지 여행하며 보았던 모든 영지가 힘을 합쳐야 간신히 대적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래도 불가능할지도 모를 정도로 이 도시의 힘은 굉장했다.
산맥의 군주조차 수백 명의 기사를 둔다면 그 비늘을 있는 힘껏 마찰하며 달아나리라.
하지만, 라수르는 웃으며 아르센의 말을 부정했다.
“그야 사티엔이 하나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겠소.”
그렇게 말한 뒤, 이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유적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은 영주 가문도, 흑사자를 비롯한 여러 유서 깊은 무력 집단도, 그렇다고 상회도 아니오. 바로 발굴대지. 인근의, 혹은 더 떨어진 영지나 성채에서 온 떠돌이들. 그들은 유적 도시에 대한 애착이 없고, 따라서 도시의 법률을 존중하지만 존경하고 따르지는 않소. 도시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벌이라니, 그런 일에 따를 리 있겠소?”
그 말에, 아르센은 이전 라수르의 자기소개를 떠올렸다.
유적 도시의 북부, 자나쉬 영지에서 왔다고 했던가.
“라수르 경도 이곳 출신이 아니라고 하셨죠.”
“아, 그건 거짓말이라오.”
너무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해서, 아르센은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 아르센의 당황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수르가 씩 웃었다.
“대외적으로는 자나쉬에서 왔다고 얘기하곤 하지만, 나 역시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오. 우스운 일이지만, 발굴을 업으로 삼는 외지인들 대부분은 발굴대 일을 하는 현지인을 도둑놈이라고 생각하거든.”
유적 도시의 주민들이 되려 유적 발굴에 있어 차별을 당하다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조금 전 이야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하니, 왜 그런 대우를 받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이미 도시의 주인이 아니군요.”
“정확한 표현이오.”
유적 도시, 사티엔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이 사는 내부 구역은 그 크기가 벨루안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작은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발굴대를 위한 고급 여관, 혹은 상거래 구역으로 사용되니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구역은 더 적을 터.
그에 비해, 외부 구역에서 거주하는 ‘외지인’은 모두가 기사이거나 전사이며 그 수는 내부 구역의 주민 전체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다.
두 세력이 전쟁을 벌인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리라.
“발굴대라고 해 봐야 다들 여기저기에서 온 사람들이니 동료 의식 따윈 없는 게 보통이오만, 현지인에 맞서서는 하나가 되곤 하지. 아득히 먼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이라오.”
그렇게 말하는 라수르의 얼굴에서, 아르센은 미미한 짜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식량과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유물을 받지. 그 외에 우리가 직접 유물을 거래하는 건 금기시되고. 그래서 크렌의 신분도 대외적으로는 비밀이라오.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이런 얘기까지 해주셔도 되는 겁니까?”
“내가 보기에 아르센 경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소문내 봐야 본인만 재미없어질 거란 걸 잘 알 것 같았소.”
다소 음흉하게 웃는 라수르를 보며, 아르센은 이들 발굴단이 돌아가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뛰어난 무력에 카리스마를 겸비한 리더 크렌, 그리고 그를 따르며 포용력과 사교성, 때로는 계략으로 조직을 이끄는 실질적인 흑막인 라수르.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도시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종업원이 주문한 차를 가져왔다.
잔의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탄 연분홍색 차였는데, 한 잔 마시니 씁쓸하면서도 진한 향이 올라왔다.
홍차에 화장품을 섞은 맛이라고 하면 좋을까.
다소 취향에 맞지 않아, 아르센은 차를 마시는 척하다가 슬쩍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크렌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소? 아마 지금이라면 뭐든 대답해 줄 것 같은데. 저 친구가 저렇게 만족스러워하는 건 근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거든.”
그 말과 달리, 크렌의 얼굴 어디에도 만족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엄숙한 표정을 지은 기사만 있을 뿐.
하지만 크렌은 앞에 놓인 차를 후루룩 마시며 고개를 끄덕여 라수르의 말을 긍정했다.
“좋은 기사가 되겠더군.”
“뭐든 물어보라는 뜻이오.”
라수르의 친절한 번역에 감사하며, 아르센은 질문했다.
“남쪽에 가보셨다고 했죠, 혹시 남쪽에 있다는 ‘왕국’에도 가보셨습니까?”
국가라는 개념이 막연한 이 세계에서, 유물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남부의 거인왕.
아르센은 그에 대한 정보를 캐보고자 했다.
크렌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왕도 만났지.”
아르센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조금 전 내려놓았던 맛없는 차를 들어 한 입 마셨다.
“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컸다.”
짧게 대답하고 다시 차를 마시는 크렌을, 옆에서 라수르가 툭툭 치며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줘.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설명하면 짜증 난다니까.”
“알았다.”
크렌이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키는 열 어림, 그에 맞게 마수조차 압도하는 힘을 가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민첩했다. 기술 역시 단순하면서도 정밀해서 그 경지가 얕지 않았고.”
크렌의 설명에 따라, 아르센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사람 하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어 그저 그림자 정도로만 보이던, 거인왕의 실체가 드디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마 십 년 전에 서른이 좀 넘었으니, 지금은 마흔 살에서 마흔다섯 살쯤 됐나.”
“왕 역시 정수를 취한 자였습니까?”
“음.”
크렌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내가 정수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지. 당시 나는 사냥에서 객장(客將)으로 참여했는데, 거대 마수가 죽고 나온 정수를 왕이 취할 수가 없자, 왕이 자기 다음으로 사냥에 기여한 사람에게 정수를 취하라고 명했지. 그게 나였고.”
“왕이 그걸 허락했단 말입니까? 크렌 경은 왕국 사람도 아니었는데도?”
당연히, 정수 같은 전략 물자는 자신의 왕국에 속한 부하 기사에게 주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일 것이다.
크렌이 몰래 뺏은 것도 아니고 왕이 직접 허락했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크렌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야 모를 일이지. 어쨌든 덕분에 나는 정수를 취했고, 지금의 힘을 얻었다.”
크렌의 말에서 아르센은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거인왕이 원리원칙에 충실한, 고지식한 성격일 가능성.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고자 정수를 외부 출신 객장에게 돌릴 정도로 속 좁고 냉철한 계략가일 가능성.
왕까지 된 인물인 만큼, 후자 쪽에 무게가 쏠렸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고 나서 왕과 몇 번 대련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 졌다. 기량 자체는 그럭저럭 비슷했지만, 신체적으로 타고난 차이가 너무 심했지. 당시에 나는 아직 이 신체 능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기도 했고.”
2m도 되지 않는 단신인 크렌이 3m에 달하는 거인왕과 싸우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단순히 힘뿐만이 아니라, 신체 길이 차이에서 오는 이점만 해도 압도적이었을 테니까.
“두 자루 도끼를 풍차처럼 휘두르는데, 그 기세가 태풍과도 같더군. 아마 애송이 기사 수십 명을 늘어놓아 봐야 그자 앞에서는 일반 병사와 다를 바 없을 거다.”
“지금 싸운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지금? 글쎄.”
잠시 고민하던 크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지금이라면 당시의 왕과는 비슷하게 싸울 것도 같지만, 그자가 지금까지 마냥 놀지는 않았겠지. 거기다 왕국에는 강력한 유물이 유난히 많았는데, 왕은 그중에서도 최고라 불릴 만한 물건들만 사용했고.”
아르센을 간단히 압도한 크렌조차 감히 이길 수 있다 확신할 수 없는 상대.
그 위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왔다.
그때, 크렌이 말했다.
“혹시 왕과 싸우려거든, 이십 년 정도 수련하고 가라.”
그 말에 아르센이 빤히 쳐다보자, 크렌이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 정도면 그자도 늙어서 힘을 못 쓸 테니. 어린아이 손목 꺾듯 쉽게 이기겠지.”
그제야, 아르센은 크렌이 농담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옆에서 라수르가 폭소하며 말했다.
“설마, 방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건가?”
귀엽기도 하다며 푸하하 웃는 라수르의 옆에서, 크렌은 묵묵히 눈을 감았다.
“음.”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수줍어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