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27)
무공 쓰는 외과 의사-427화(427/540)
제83장 짬밥(3)
약제계 일병 정민은 치료실에 딸린 창고 안에 있었다.
정민의 발밑에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거대한 비닐 봉투가 놓여 있었다.
“어디보자~”
정민이 콧노래를 부르며 봉투 안에서 약통들만 따로 추려냈다.
편의점에서 선입선출을 하듯 새로 받은 약통들을 뒤로 밀어 넣고 기존에 쓰던 약통들은 앞으로 당겨 놓았다.
치료계는 보통 눈에 보이는 대로 약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선입선출은 필수였다.
약제함 정리를 끝내고 정민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허리가 아프고 피로가 밀려왔다.
의무병의 고질병(?)이었다.
다른 병과의 병사들이 오전부터 저녁까지 훈련을 하거나 작업을 하는 것에 비해 의무병은 대부분의 시간을 치료실에서 큰일 없이 보낸다.
그래서 체력이 저질이었다.
의무병이 왜 편하냐면…….
의무병은 항상 응급 대기 상태라서 그랬다.
위급한 환자가 나타나고 가정해 보자.
그때 의무병이 자리를 비웠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서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거나 이송을 못 하면 큰일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의무병은 거의 모든 작업 및 훈련에서 열외였다.
군대 최고의 이벤트.
혹한기 훈련과 유격 훈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입을 모아 의무병을 망고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망고는 망고만큼 달달한 병과라는 뜻이다.)
“휴~ 다 끝났다.”
정리를 끝마치고서 정민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역대급으로 오래 걸린 정리였다.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중대장이 사단 의무대에서 챙겨 온 소모품이 워낙 많았던 덕분이다.
정민의 눈이 약제함을 훑었다.
약통들이 가지런히 놓였고 제법 빵빵하게 보충되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약제함 서랍에는 각종 연고, 파스, 붕대 같은 소모품도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정민은 새삼 중대장의 수완에 감탄했다.
사단 의무대에 쳐들어가서 약품을 받아온 중대장은 아마 지금 중대장이 처음일 것이다.
보통 중대장은 중대에 물품이 적거나 말거나 신경을 안 썼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썼다.
준후처럼 의무대 관리에 적극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정민은 준후가 그냥 군의관이 아니라 진짜 의사 같았다.
“정민아.”
치료실 쪽에서 정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 아는 목소리였다.
“네. 이태원 상병님.”
정민이 창고 입구로 다가가 문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우리 호시딘 남은 거 있냐?”
치료계 태원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환자는 넘어졌는지 무릎이 까져 있었다.
태원은 과산화수소에 젖은 솜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무릎을 소독하고 있었다.
보글보글.
상처에서 거품이 올라왔다.
저렇게 안에서 바깥으로 소독해야 이물질이 빠진다고 했던가?
“네. 어제 사단 의무대에서 받아왔습니다.”
“그놈들이 순순히 줘?”
“중대장님이 사단 의무중대장님한테 직접 이야기해서 받아왔습니다.”
“와! 우리 중대장님 패기 장난 아닌데?”
태원이 피식 웃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눈치 빠른 정민은 호시딘을 챙겨 창고를 나왔다. 태원 옆에 놓인 드레싱 카트 위에 호시딘 연고를 올려놓았다.
“뭐야? 새 거 받아 왔다면서 왜 헌 걸로 주는데?”
좁아지는 태원의 미간.
호시딘 연고가 다 쓴 치약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그래도 있는 건 다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거 구두쇠가 따로 없구먼. 스크루지가 친구하자고 하겠네.”
“잘 보셨습니다. 저 안 그래도 몇 개월 전에 스크루지하고 친구 먹었습니다.”
“어휴. 말이라도 못하면.”
태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소독액이 마른 후 호시딘 연고를 면봉에 묻혔다.
그 면봉으로 환자의 상처를 문지르고 상처 위에 직사각형 모양의 밴드를 붙였다.
환자가 떠나면서 치료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오늘은 창고 정리하는데 오래 걸렸다?”
“어제 물품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창고만 들어가도 흐뭇합니다. 이태원 상병님은 아직도 중대장님이 못 마땅합니까?”
“이젠 아니지.”
“이유가 있습니까?”
“며칠 안 겪어봤지만 괜찮은 사람 같아서. 진료 받은 병사들도 다 중대장님 좋아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뭡니까?”
“수액 잡는 연습하라고 자기 팔뚝을 내주셨잖아.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거거든.”
태원도 후방에서 의무 교육을 받을 때 동기들끼리 서로서로 혈관을 빌려주곤(?)했다.
바늘에 생살이 찔리는 기분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아 비참했다.
그런데 병사도 아니고 의무중대장이 선뜻 팔을 내어준다.
이쯤 되면 살신성인이었다.
“내 군번에 병사들 치료에 진심인 군의관을 보게 될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누가 들으면 이태원 상병님이 한 30대는 되는 줄 알겠습니다.”
“이 자식이 빠져가지고.”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희희덕거렸다.
“그나저나 오늘 그거 있는 날인가?”
태원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 머물렀다.
“네. 맞습니다.”
“승범이 데리고 잘 놀아라. 나는 응급대기인 거 알지?”
“몸도 좀 쓰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싫어. 안 해.”
태원이 딱 잘라 말했다.
오늘 오후 스케줄은 태원과 상극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끼이이익.
귀에 거슬리는 경첩소리와 함께 중대장실 문이 열렸다.
“애들아.”
“네. 중대장님.”
“오늘도 혈관 잡는 연습해야지. 수액 세트 챙겨서 중대장실로 와. 니들 대신 카테터 쓰고.”
“하지만 팔이…… 괜찮으시겠습니까?”
태원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태원과 승범이 준후의 팔을 쑤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혈관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괜찮으니까 가져와.”
중대장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원은 하는 수 없이 승범을 호출했다.
수액 걸이에 수액 세트를 세팅하고 승범과 함께 의무중대장실로 들어갔다.
‘오잉?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휘둥그레지는 태원의 눈.
쩍 벌어지는 태원의 입.
중대장은 벌써 전투복 소매를 걷고 팔뚝을 드러냈는데 피부와 혈관이 멀쩡했다.
이틀 전만 해도 마약쟁이처럼 엉망이었던 팔뚝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사람 회복력이 이렇게 좋을 수 있는 건가?
* * *
그날 오후 1시, 의무중대장실.
준후는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실로 느긋한 일과였다.
의사들이 군의관 시절을 괜히 ‘휴가’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위에서 쪼아대는 선배도 없어.
챙겨야 할 후배도 없어.
그렇다고 빡세게 관리해야 할 환자가 있기를 하나.
준후의 일과는 여유, 그 자체였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준후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전에 받았던 민석의 전화는 응급 콜이 아니었다.
준후의 그림자 수술을 앞으로 민석이 돕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그림자 수술에 관해서는 민석과 연락을 주고받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어제 수술 받은 환자 분은 좀 어때요?”
-경과가 판타스틱이던데요? 안 그래도 오늘 정오쯤에 의식을 차렸습니다.
뇌수술 환자의 경우 2-3일은 지나야 깨어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환자는 하루도 안 돼서 깨어났다.
준후의 수술이 워낙 빠르고 정확했던 데다가.
준후가 중환자실을 찾아 내공 수액술로 환자의 회복을 도왔기 때문이다.
-환자분이 서 선생님을 찾았어요.
“저를요?”
-네. 뭔가 보답을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준후는 턱을 쓸어내리며 잠시 고민했다.
새롭게 얻은 원 스타 인맥을 어떻게 활용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일단…….”
-일단이요? 이단은 안 됩니까?
“…….”
-……죄송합니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갑자기 민망해하는 민석이었다.
뭐, 이것도 민석의 매력이지만.
“제가 나중에 따로 연락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연락처 받으셨어요?
“네. 응급실 들어가기 전에 받았어요. 그건 그렇고 그 환자분한테 그림자 수술은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으로 펼칠 그림자 수술은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했다.
병원장과 민석이 사전에 준후와 말을 맞출 테니까.
하지만 원 스타 환자는 그림자 수술 1호였다. 아직 그림자 수술에 대한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 문제는 걱정 마세요.
“방법이 있나 보죠?”
-서 선생님이 연대 중대장과 도수 병원 업무를 겸직한다고 둘러대 놓았습니다. 원 스타라고 해도 병원 쪽 돌아가는 건 잘 모를 테니까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수술 중 문제가 생겼으면 모를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마당에 더 이상 준후의 정보를 캐내고 싶은 마음은 안 들 것이다.
간단한 안부를 나누면서 통화는 맥없이 끝났다.
상념이 끝날 때쯤 커피도 다 마셨다.
준후는 엑셀 파일을 열어 어제 외진 다녀온 환자들의 경과를 살폈다.
사단 의무대와 한국 도수병원을 통틀어서 상태를 지켜보자고 들었던 병사가 9명.
재진 일정이 잡힌 병사가 3명이었다.
개중에 눈에 띄는 병사가 있었다.
만성적인 속 쓰림으로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어제 결과를 들었다는 병사였다.
병사의 이름은 송희철.
검사 결과는 만성 위염.
희철은 외진 중 준후의 승용차에 타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었다.
원 스타 수술을 끝내고 부대에 복귀하기 전.
병사들에게 피자를 사줬는데 피자를 혼자서 6조각이나 먹었던 대식가라서 기억에 남았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리는 노크소리.
“중대장님. 작전 장교님 오셨습니다.”
문 너머에서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전 장교라면 간부 아닌가.
간부가 의무 중대장실을 직접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치료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용무 때문인가.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이윽고 문이 열리고 작전 장교가 의무중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작전 장교의 이름은 이훈.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몸매는 호리호리하다 못해 가냘프게 느껴질 정도였다.
피부는 하얗고 잡티가 없었다.
이름은 강해 보이는데 정작 보이는 이미지는 연약했다.
“안녕하세요. 중대장님.”
“안녕하세요. 거기 앉으세요.”
준후가 의자를 권하자 이훈이 의자에 앉았다.
“부대에서 지낼 만합니까? 답답하지는 않으세요?”
“군부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연구도 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잡담을 주고받다가 준후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혹시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아…… 그게…….”
이훈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벅지에 뭐가 났는데요…… 이게 걸을 때마다 바지에 쓸려서 쓰라리더라고요. 왜 그런가 싶어서요.”
“피부 문제군요.”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부임한 의무중대장이었지만 병사를 진료하다보니 공통적으로 보이는 게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의외로 피부과 질환 환자가 많다는 점이었다.
아토피성 피부염, 습진, 건선, 무좀 등등.
그래서일까.
병사들을 위해서 피부과 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단 종아리에 난 게 뭔지 봐야겠습니다. 바지를 벗어주시죠.”
“바지를요?”
“제가 투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훈이 쑥스러워하면서 바지를 벗었다.
검지로 허벅지 옆에 난 뾰루지 같은 것을 가리켰다.
“이겁니다.”
문제의 부위를 살피는 준후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