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30)
무공 쓰는 외과 의사-430화(430/540)
제84장 환상과 환장(1)
‘말도 안 돼. 이건 꿈일 거야.’
인호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축구 선수 출신이었던 인호가 고작 군대스리가를 재패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능의 벽을 뛰어넘지 못해서.
어쩌면 노력이 부족해서.
벤치 신세를 지는 날이 많아지고 길어졌기 때문에 선수를 그만뒀지만.
인호의 축구 솜씨를 보통 사람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군대가 됐든, 조기 축구회가 됐든 인호는 항상 군계일학이었다. 어디서든 돋보이고 어디서든 활약했다.
그런데 웬걸?
오늘만큼은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원수 같은 의무 중대장 때문이었다.
“…….”
“…….”
골 에어리어 인근에서 인호는 중대장과 단둘이 맞닥뜨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팽팽했다.
“인호 뭐 해! 확 뚫어버리고 골 넣으라고!!!”
등 뒤에서 간부의 고함이 들려왔다.
단독 찬스를 잡았음에도 돌파를 못 하는 인호가 답답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소대장님이 뭘 알겠어요?
진짜 철벽 요새에 가로 막힌 것 같다니까요…….
인호는 섣불리 드리블을 하지 못했다.
왼쪽과 오른쪽.
그 어느 쪽으로 달려 나간다고 한들.
중대장에게 가로 막히고 공을 빼앗길 것 같아 불안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전반전이 진행되는 내내 인호는 중대방을 단 한 번도 뚫어내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중대장이 무려 선수 출신인 자신을 포승줄처럼 꽁꽁 묶어둘 수 있다는 것은.
의사면 끽해봐야 취미로 즐겼을 텐데.
어찌 이런 일이…….
인호는 중대장을 축구판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포기하지 말자.
포상 휴가증은 내 거야.
예원이랑 벚꽃 구경 가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빠드드득.
인호가 이를 깨물었다.
각오가 달라지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독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툭.
인호는 준후의 왼쪽 편으로 가볍게 공을 차며 달랐다.
인호의 장기 중 하나인 치고 달리기였다.
보통 수비수라면 한 번에 젖혀지는 게 당연했지만 준후는 인호와 비슷한 속도로 따라 붙었다.
똑같은 패턴으로는 안 당합니다!
아까 볼을 빼앗겼던 패턴을 교훈삼아.
인호는 치고 달린 후 트래핑한 공을 준후 가랑이 사이로 툭 찼다.
치고 달리기가 안 먹혔을 때 사용하는 알까기 패턴이었다.
그런데 웬걸.
관심법으로 다 보고 있었다는 것 마냥 준후는 가랑이 사이로 통과하는 공을 가볍게 받아냈다.
와? 이것까지 막아버린다고?
이거 사기 아니야?
“패스 잘 받으마.”
넋이 나간 인호에게 윙크하고.
준후가 미사일처럼 달려 나갔다.
드리블은 드리블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투박했지만 그 속도만큼은 가히 예술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 한 마리가 질주하는 것 같았다.
누구도 준후를 막지 못했다.
준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군 골대까지 도달했고 골대 사각에 슈팅을 처박았다.
평범한 땅볼이었지만 골키퍼는 막지 못했다.
후반 시작 20분.
승리가 당연했던, 인호가 속한 빨간 조끼 팀은 파란 조끼팀에 3:0으로 지고 있었다.
이제 인호는 뼈아픈 현실을 받아들어야만 했다.
벚꽃이 피기도 전에 벚꽃이 지고 있음을.
* * *
삐이이익!
우렁찬 호각 소리가 연병장을 뒤흔들었다.
포상 휴가증이 걸렸던 전투 체육의 최종 승자 파란 조끼 팀이었다.
최종 스코어는 3:0.
파란 조끼 팀은 선수 출신 인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화력으로 승리를 얻어냈다.
“와, 이걸 이기네.”
“중대장님. 꼭 바람돌이 소닉 같았습니다.”
“진짜 중대장님이 다하셨어요.”
경기가 끝나자 함께 했던 의무병들이 준후 주변을 에워싸고 한마디씩 했다.
다른 병과 병사들도 준후에게 몰려와 한마디씩 감탄사를 뱉어냈다.
준후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이 정도 활약은 활약도 아니었다.
본래 가진 능력을 50분의 1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오늘 경기에서 준후는 내공을 단 1그램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공으로 단련한 피지컬로만 승부를 보았다.
그런데도 팀을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설령 세계적인 축구 리그에서 뛴다고 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격수가 됐든.
수비수가 됐든.
골키퍼가 됐든.
준후는 원하는 분야에서 이전의 그 누구도 세우지 못했던 대기록을 세울 자신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 농구, 배구, 미식축구까지 씹어 먹을 자신이 있었다.
준후가 그동안 지켜본 축구 스타들의 수준은 무림으로 치면 일류무사 수준이었다.
(내공이 없다는 가정 하에).
그러니까 일류 무사를 넘고 절정을 넘고 초절정을 넘어 ‘화경’에 들어선 준후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어쨌든 체급 차이가 워낙 심해서 준후는 설렁설렁 경기에 임했다.
선수 출신이라는 인호를 수도꼭지 잠그듯 잠가 버리고 이따금 혼자 치고 나가서 2골을 획득했다.
빨간 팀의 핵심 전력은 인호였다.
인호를 봉쇄하니 나머지 올챙이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자네는 의사인데 축구도 잘하나?”
낯익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무려 연대장이었다.
준후가 속한 부대의 최고 상급자말이다.
연대장은 후반이 끝나기 10분 전에 연병장으로 나와 축구를 관람했다.
“운동 신경이 좋아서 운동선수를 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준후가 대충 둘러댔다.
“으음…… 오늘 경기를 보니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군. 선수 출신까지 꽁꽁 묶어놓고 말이야.”
“…….”
“자. 받아.”
연대장이 바지 주머니에서 포상휴가증을 꺼내 내밀었다.
“감사합…….”
휴가증을 받던 준후가 말문을 잇지 못하고 연대장을 쳐다보았다.
준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연대장님.”
“왜?”
“포상 휴가증이 2개입니다. 하나만 주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하나는 오늘 전투 체육 때문에 주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나를 치료해서 주는 거야.”
“아…….”
준후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장을 처음 만났던 날.
준후는 연대장의 안면에서 발생한 통증성 틱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삼차 신경통을 진단했고 말이다.
“치료는 잘 받고 계십니까?”
“자네 덕분에 병이 악화되는 걸 막았지. 수술까지는 필요 없다고 하더군. 약만 꾸준히 먹어도 호전될 거라고.”
“다행입니다.”
“요즘 들리는 중대장 소문이 아주 좋아. 간부나 병사나 전부 칭찬 일색이야.”
연대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한 손을 준후의 어깨에 얹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더는 바라지도 않을 테니.”
“네. 연대장님.”
연대장과의 대화가 끝나고 전투 체육도 끝났다.
본부 중대 병사들을 도와 뒷정리를 하고 준후는 의무병들과 치료실로 돌아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의무병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흡사 먹이를 갈망하는 아기새 같았다.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과연 누구에게 포상 휴가증을 줘야 할까.
* * *
GP초소는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한 최전방 초소다.
북한군과 바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였다.
망원경을 사용하면 건너편에서 작업하는 북한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 GP에 파견 나온 수색 중대 병사는 북한군의 모습을 신기하게 관찰하지만 그것도 한때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북한군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진다.
사람들은 보통 GP를 잘 몰랐다.
GOP와 달리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곧 끔찍한 참사가 벌어질 어느 GP 초소.
먹칠을 한 것처럼 하늘이 깜깜했다. 구름에 가려 별빛도, 달빛도 지상에 닿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초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명의 불빛뿐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방과 손가락만한 크기의 날벌레들이 조명 근처에서 화려한 춤사위를 펼쳤다.
마치 불빛에 구애라도 하듯이.
현재 시각은 밤 10시.
푸세식 화장실만큼 비좁고.
콘크리트 벽으로 사방이 막힌 초소 안에서 두 명의 병사가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상병 지웅과 이등병 영준이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철책선 너머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꼭 누군가가 참혹한 고문을 당하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지웅과 영준의 표정은 덤덤했다.
눈썹 한 번 까딱거리지 않았다.
“어휴. 저 X발 고라니. 오늘 따라 더 지X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러다가 귀에서 피나겠습니다.”
영준이 초소에 나 있는 감시창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고라니가 또 시끄럽게 울어댔다.
목소리가 겹치는 걸 보면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인 것 같았다.
가뜩이나 로드 킬 때문에 고라니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는데 GP근무를 서면서 영준은 고라니를 증오하게 되었다.
고라니 울음소리에 깜짝깜짝 놀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울 거면 정상적으로 울든가.
안 좋은 일을 당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울 건 뭐란 말인가.
괜히 사람 섬뜩하게.
“영준아.”
“네. 윤지웅 상병님.”
“심심한데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봐라.”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으면 성의껏 지어내기라도 해봐. 네 동기는 고등학교 썰 맛깔나게 풀던데.”
“저는 그냥 평범하게 지내서 딱히 드릴 말씀이…….”
“못 하면 끝이냐? 못 해도 되게 해야지.”
지웅의 압박에 영준은 남녀공학 중학교를 나왔던 시절.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썰을 풀어놓았다.
다 듣고서 지웅이 하품을 했다.
그게 재미없다는 말보다 더 상처였다.
내가 코미디언이냐?
너 웃기는 재주가 뿅 하고 튀어나오겠어?
할 말은 많았지만 참는 영준이었다.
경계 근무가 끝난 후 영준은 지웅과 함께 막사로 돌아왔다.
시간은 자정이었지만 의식은 쌩쌩했다.
배가 출출하기도 했다.
지웅이 라면을 먹자고 했고 지웅도 그러겠다고 했다.
벙커로 지어진 초소 내부 생활관은 어둡고 습하고 고요했다. 근무자가 아닌 병사들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영준은 최대한 조용하게 생활관으로 들어가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컵라면과 건빵을 챙겨 복도로 나왔다.
지웅이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이 휴게실에 도착했다.
“너 누나나 여동생 있냐?”
정수기에 뜨거운 물을 받던 지웅이 영준에게 물었다.
“한 살 누나 있습니다.”
“오올. 그래? 그럼 나랑 동갑이네? 예쁘냐?”
“오크입니다.”
영준이 신속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누나가 오크는 아니었다.
오히려 예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누나의 외모를 일부러 비하했다.
누나를 지웅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사진 있으면 사진 좀 보여줘 봐.”
지웅의 제안에 영준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사진을 보여주면 백퍼센트 치근덕거릴 텐데.
남자친구가 있다고 둘러대야 하나?
아니면 사진이 없다고 할까?
“뭐야? 너 갑자기 왜 굳었어?”
지웅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죄송한데 오크 사진은 취급 안 합니다.”
“크크크크. 알았다. 알았어.”
다행히 농담이 먹힌 눈치였다.
영준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때!
지웅에 이어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으려던 찰나!
탕!
한발의 총성이 벙커를 뒤흔들었다.
영준과 지웅은 놀란 부엉이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금 그거 총성 맞지?”
“네!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시X. 바깥에서 난 소리가 아니고 안에서 난 것 같던데.”
“이…… 이제 어떻게 합니까?”
겁먹은 영준이 덜덜덜 다리를 떨었다.
“일단 현장으로 가보자.”
“그러다가 저희까지 죽는 거 아닙니까?”
“총성이 한 발밖에 안 들렸어. 난사가 아니니까 실수로 격발됐을 수도 있어.”
“그래도…….”
“그럼 넌 경계 초소로 가서 상황 전파해. 난 현장으로 가볼 테니까.”
“위험하실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넌 빨리 올라가 봐.”
“네.”
영준을 경계 초소로 올려 보내고 지웅이 휴게실을 떠나 복도로 나왔다.
총성이 터졌는데 생활관은 왜 아직도 잠잠할까.
분명 생활관에서도 총성을 들었을 텐데?
의문을 가지는 한편.
지웅은 잔뜩 긴장한 채로 사방을 경계하며 복도를 통과했다.
조용해서 더 불안했다.
그러던 중 창고 쪽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창고 문이 열려 있었고.
하연 연기가 담배 연기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창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누군가가 죽어 있었다.
공포와 소름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