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42)
무공 쓰는 외과 의사-442화(442/540)
제86장 혹한(3)
문득 올려본 하늘이 시리도록 맑았다.
하지만 준후의 마음은 어두웠다.
‘시호’라는 이름의 거대하고 탁한 구름이 가슴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시호가 6개월 전 출소했다.
곱씹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족과 아영과 지인에게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모를 녀석인데 말이다.
출소하자마자 보복하지 않았으니 혹시 갱생한 건 아닐까.
준후는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 따위는 일찍 접어버렸다.
시호가 뜸을 들이는 건 단지 송곳니를 갈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충분한 준비가 끝나는 대로 녀석은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준후는 그 시기를 알 수 없어서 답답했고.
시호의 출소를 통해 준후는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과 시호의 형량이 너무 적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시호가 저지른 은밀했던 살인.
그중에서 만천하에 드러난 것만 3개였다. 거기에 준후에게 칼부림을 했던 케이스도 있었다.
그런데도 시호의 형량은 고작 12년 남짓이었다.
솜방망이 처벌, 그 자체였다.
돈을 쏟아부어서 유족들과 합의를 본 걸까.
아니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법무법인을 고용했을까.
준후도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하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여도 겨우 몇 년을 살다 나오고.
학교 폭력으로 피해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아무 처벌 없이 학교를 다니는 학교 폭력 가해자도 있고.
무고죄로 남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많구나.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후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한민국의 범죄 처벌 수위는 너무 낮고 빈약했다.
가해자를 처벌한다기보다는 혼낸다는 느낌이 강했다.
10만큼의 죄를 저질렀으면 10만큼의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게 사법 정의 아닐까.
가해자를 교화하고 갱생시키는 것만큼 피해자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는 것도 사법 정의 아닐까.
준후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깊어지는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시호의 출소를 듣고 나서 부모님께 연락을 해두었다.
요즘 위험하고 흉흉한 사건이 많으니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조심하시라고.
아영에게는 고민하다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시호가 출소했으니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아영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호에게 아영을 잃는 건 더 두려웠으니까.
목 놓아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손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준후는 자동차가 신호에 멈췄을 때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누구야, 짬내 나는 군의관 아니야?
휴대폰 너머에서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지금 통화 괜찮아?”
-타이밍 기가 막히네. 10분 정도는 괜찮아. 컨퍼런스 시작하기 전이거든. 근데 무슨 일이냐?
“급하게 부탁할 게 있어서.”
-급한 부탁? 별일이네. 천하의 서준후가.
전화를 받은 사람은 경수였다.
준후의 신경외과 레지던트 동기.
신원대학교 병원 서울 본원에서 뇌혈관 파트 외래 진료 및 수술을 맡고 있는 조교수.
“딴 게 아니고 시호 선배 연락처 좀 알 수 있어?”
-시호 선배? 그 나쁜 놈은 왜?
“얼마 전에 출소했어.”
-아…….
경수의 침음성에 많은 의미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준후만큼은 아니겠지만 경수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조만간 백 퍼센트 너 찾아가겠네. 복수하겠다고.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는 상관없는데 부모님하고 아영이가 걱정이라서.”
준후가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시호 선배, 아니, 선배라는 이름도 아깝다. 어쨌거나 많이 오래되긴 했지만 비상 연락망에 시호 녀석 연락처 있을까?”
준후가 기대감에 물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휴대폰 번호를 공유하고 있었다.
신경외과 생활이 워낙 힘드니까.
탈주(?)하면 쫓아가서 잡기 위해서였다.
-그거 말 되네. 내 기억에도 비상 연락망을 따로 버린 기억은 없거든.
“…….”
-비상 연락망을 동창회 연락 용도로 쓰는 경우도 있고.
“역시 우리 경수는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부탁 좀 할게.”
-괜찮아,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근데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꼭 있다는 건 아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연락처를 알아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게?
“가능하면 잘 구슬려서 만나봐야지.”
준후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만남이 성사될 확률은 낮았지만 그렇다고 도전을 안 해볼 수는 없었다.
위기에 몰렸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호가 의외로 준후를 보고 싶어 할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그리고 만약 시호를 만난다면…….
솔직히 준후는 시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실 무림이었으면 고민할 거리도 못 됐다.
시호는 준후의 손에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죽어도 싼 놈이 존재한다고 준후는 믿었다.
하지만 준후는 무림이 아닌 현대에 있었다.
현대에서 시호를 어떻게 손봐줘야 할까.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앞으로 죄를 저지를 것 같다고 먼저 손을 쓰는 게 사회적으로 용납 받을 수 있을까.
문득 양 관자놀이가 지끈 쑤셔왔다.
-오케이. 일단 찾는 대로 연락할게.
“고맙다.”
-고마우면 군 복무 끝나고 서울 본원으로 와라. 다들 널 기다린다.
“그건 그때 가봐야지.”
준후는 웃으며 통화를 끊었다.
* * *
부대에 도착했다.
준후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대 막사 쪽으로 이동했다.
막사 앞 연병장에는 이미 수많은 병사가 군장을 짊어진 채 대기 중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다들 무장이 확실했다.
귀를 가리는 귀마개.
손에 낀 장갑.
국방색 목토시.
보물처럼 들고 있는 손난로 등등.
그렇게 추위를 대비했음에도 다들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4박 5일의 혹한기 훈련이 오늘부터였다.
연대장이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지 않도록 보살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뭐, 부탁을 안 받았아도.
준후는 항상 환자에게 진심이었지만.
터벅. 터벅.
준후가 연병장을 가로질렀다.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연병장 서쪽 끄트머리였다.
그곳에 앰뷸런스가 서 있었다.
“단결!”
“단결!”
“그래. 좋은 아침.”
준후가 의무병들의 인사를 받으며 앰뷸런스 후방에 섰다.
앰뷸런스 뒷문이 열려 있었는데 구급함과 들것, 수액제나 주사제가 담긴 박스들이 그득하게 실려 있었다.
얼마 전에 사단 의무대를 턴 보람이 있었다.
휘이이잉.
싸늘한 칼바람이 덮쳐왔다.
치료계 상병 태원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중대장님은 그렇게 입고도 안 추우십니까? 전 이렇게 껴입고도 춥습니다.”
“딱히.”
“부럽습니다. 추위에 강하신 것 같습니다.”
준후는 전투복에 딱 야전 상의만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추위를 몰랐다.
만독불침까지는 아니지만.
한랭불침의 경지에는 도달한 준후였다.
추위 따위는 적수가 못 되었다.
“그건 그렇게 애들이 많이 안 보인다?”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연대 의무중대 소속 의무병은 9명이었다.
그런데 앰뷸런스에 대기 중인 의무병은 두 명뿐이었다.
실세 상병과 막내 이등병.
나머지는 다 어디 갔단 말인가.
“연대에 남는 대기 병력이 2명이고 나머지는 각 중대에 파견을 갔습니다.”
“파견?”
“네. 중대에 소속되어서 거기서 환자를 치료합니다.”
태원의 이야기를 듣고 연병장을 훑어보니 통신 중대 쪽에 서 있는 의무병 한 명이 보였다.
다른 병사들이 군장을 멘 반면.
의무병은 아담한 구급함만 매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니?”
“저녁때까지 훈련장으로 행군을 할 겁니다. 행군장에 도착하면 텐트를 치고 숙박합니다. 훈련 일정은 내일부터입니다.”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 준후는 이번 혹한기 훈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환들을 떠올려 보았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날씨가 날씨인 만큼.
대부분 추위에 관련된 질환이었다.
날씨가 쌀쌀하면 혈관이 좁아지는데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질환은 다음과 같았다.
허혈성 심질환, 관상동맥 파열.
허혈성 뇌경색, 뇌동맥 파열.
둘 다 최악의 케이스였지만 실제로 일어난 확률은 매우 낮았다.
군 장병들은 아직 젊고 어렸다.
추위 때문에 심장 혈관이나 뇌혈관에 대미지가 가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준후는 이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원래 세상이란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게 벌어지는 곳이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밖에 조심할 질환이라면 저체온증, 동상, 독감 정도가 있겠다.
“동상 크림은 충분히 있어?”
“2통 있습니다. 의무대에 있는 건 다 챙겼습니다.”
“잘했다.”
잡담은 그쯤에서 끝났다.
어느새 연병장에 나타난 연대장이 짧게 연설을 했다.
혹한기의 시작을 알리는 연설이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연설 후 전방에 힘찬 함성이 발사되었다.
병사들은 꼬리잡기를 하는 것처럼 길게 줄지어 서서 연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앰뷸런스는 행렬 최후방에서 이동해야 했으므로 아직 움직임이 없었다.
“태원아. 앰뷸런스 부탁한다.”
준후가 태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놀란 태원의 눈이 부엉이 눈처럼 휘둥그레졌다.
“자…… 잘못 들었습니다?”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앰뷸런스, 부탁한다고.”
“중대장님은 앰뷸런스 타고 이동 안 하십니까?”
“응. 안 해.”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고 뜻밖의 결정에 태원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엠뷸런스를 안 타면 어떻게 훈련장으로 가겠다는 거지?
하지만 질문에 대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개인 차를 타실 겁니까?”
“아니.”
“그럼 어떻게…….”
“걸어 가려고.”
“헉!”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군의관이 혹한기 행군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태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일 아닐까 싶었다.
병사들처럼 군장을 짊어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행군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행군 거리만 45Km에 달했고.
평탄한 길이 아닌 험악한 산 지형을 통과해야 했다.
딱히 운동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과연 중대장이 과연 행군을 버틸 수 있을까.
이건 무조건 말려야 했다.
“병사들을 위해서 걸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역시 상병 짬밥은 무시 못 하겠네. 맞아. 바로 그 이유다.”
준후의 눈이 초승달을 그렸다.
“후방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가면 병사들의 상태를 볼 수 없잖아. 응급 상황이 닥쳤을 때 이동하는 시간도 걸리고.”
“…….”
“그런 의미에서 행군에 직접 참여하는 게 병사들 관리하기에 가장 좋지.”
“행군하다가 중대장님이 지치시면 오히려 환자들을 치료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지친다고? 내가?”
준후의 입가에 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 설득했지만 준후는 들은 척도 안 했다.
태원에게 선탑(군용 차량 보조석에 앉는 일, 보통 간부가 앉는다.)을 맡기고는 포병 중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걸음이 어찌나 빨랐던지 뒷모습이 금방 자취를 감췄다.
결국 태원은 어쩔 수 없이 선탑 자리에 앉고 말았다.
앰뷸런스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중대장님은 정말 별종인 것 같습니다. 환자 진료에 미치신 것 같기도 하고.”
운전석에 있던 의무중대 소속 운전병이 태원에게 말을 걸었다.
“멋있는 분이긴 한데. 그래도 행군은 오버지.”
“어쩌면 중대장님이 가장 먼저 앰뷸런스에 실려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태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