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43)
무공 쓰는 외과 의사-443화(443/540)
제86장 혹한(4)
드디어 혹한기 훈련의 막이 올랐다.
제1막은 행군으로 지옥 길이나 다름없었다.
20킬로미터 군장을 메고 꼬박 한나절을 걸어야 했다. 그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이라도 평탄하면 다행이지만…….
그럴 리 없었다.
초반에야 평지 구간이 많았지만 산자락에 접어들면 언덕을 수없이 오르내려야 했다.
신발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전투화는 발을 보호해 줄지 몰라도 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숨 쉴 구멍이 없어서.
조금만 걷다 보면 발바닥에 땀이 차고 발바닥이 미끄러워졌다.
마찰열이 발생하면서 물집이 생겼다.
물집은 갈수록 커졌으며.
쓰라린 통증을 만들어냈다.
어깨에 멘 군장은 갈수록 무거워지고 다리도 무거워진다.
바보처럼 벌어진 입에서 격한 숨이 토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점은…….
행군을 하다 보면 매서운 추위는 잊을 수 있다는 점이랄까.
저벅. 저벅.
병사들의 발소리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건조한 땅에 흙먼지가 일어났다.
만약 하늘에서 병사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행군 대열은 꼭 개미의 대열과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병사부터 간부들까지.
모두 찡그린 얼굴로 행군을 하는 가운데.
혼자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준후였다.
준후는 빠른 걸음으로 행군 대열의 처음과 끝을 수시로 오고 갔다.
“의무중대장님. 사람 맞아? 벌써 몇 번째 왔다 갔다 하는 거야?”
“한 4번은 왕복한 것 같습니다.”
“그치……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통신중대 상병 세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의 눈길이 저 멀리서 점으로 작아지는 준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취미가 마라톤이라도 되나 봅니다.”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의사면 왠지 피지컬은 밑바닥일 것 같은 이미지인데 영 딴판이네.”
의무중대장은 배우처럼 곱상한 이미지를 가졌다.
실제로 몸도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래서 의무중대장이 처음 행군을 고집했을 때, 세준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참 의사 코스프레를 하는 거라고.
어차피 잠깐 걷다가 말 거라고.
그런데 웬걸.
의무중대장의 활동량은 연대 최고봉이었다.
군장을 메지 않았다고 해서 저 강철 체력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만약 나라면…….
군장을 안 멘 상태라고 해도 저렇게 대열의 앞과 뒤를 반복해서 오갈 수 있었을까?
세준은 자신이 없었다.
“근데 의무중대장님이 왜 저렇게까지 정신없이 오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후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냥 앰뷸런스에 타고만 있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행군을 같이 해서 얻는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게. 왜 그럴까?”
세준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머리로도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따가 의무중대장이 지나가면.
그때 직접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멋있긴 하네. 의무중대장이 행군을 하는 건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데.”
“아마 평행 세계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
“평행 세계씩이나.”
후임의 과장된 표현에 세준이 피식 웃었다.
대부분의 병사들과 간부들도 준후가 구태여 왜 행군을 하는지 몰랐다.
동시에 준후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거의 모든 부대에서 의무중대장의 평판은 밑바닥이었다.
의무중대장은 돌팔이였고, 업무에 게으른 게으름뱅이였다.
놀랍게도 이런 인식은 오해가 아니라 상당수 진실이었다.
대개 의무중대장들은 본인이 군인이 아니라 의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군대는 잠깐 쉬는 곳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의무대를 관리하고 병사들을 치료할 때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가 함께 행군하면서.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깨지기 시작했다.
병사와 간부들은 준후를 같이 고생하는 전우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편하게 이동했다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이미지 개선이었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네.’
행군 대열의 허리쯤에 있던 준후가 씨익 웃었다.
내공으로 청각을 증폭한 결과.
사방에서 자신을 향한 칭찬이 쏟아지고 있었다.
병사고 간부고 구분이 없었다.
준후가 굳이 행군에 참여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미지 개선이었다.
‘군의관 = 돌팔이’의 공식을 준후는 박살 내고 싶었다.
참 의사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첫째가 실력이라면 두 번째는 신뢰였다.
환자들에게 신뢰를 주어야만 환자가 진료를 받으러 오지 않겠는가.
군대의 경우 신뢰는 특히 더 중요했다.
사회생활을 한다면 본인이 병원과 의사를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는 아니었다.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사라고는 자기가 속한 부대 내 군의관밖에 없었다.
그 군의관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면 병사는 진료를 보러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진료를 미루다가 자칫 잘못하면 병이 커질 위험이 존재했고 말이다.
준후는 그런 끔찍한 참사가.
적어도 자신이 근무하는 부대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행군에 직접 참여한 두 번째 이유.
사실 이게 핵심이었다.
준후는 혹시라도 행군 중에 발생할 응급 상황을 사전에 알아채고 번개처럼 처치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대열의 앞뒤를 오가고 있었다.
행군 초반이라서 그럴까.
다행히 지금까지는 신경에 거슬리는 징조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파바바밧!
준후는 걸음에 청풍보를 섞으며.
대열의 머리 부분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등 뒤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들려왔다.
“의무중대장님. 축지법 쓰신다.”
* * *
행군을 시작한 지도 벌써 다섯 시간이 지났다.
점심 식사를 했음에도.
병사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슬슬 걸음이 느려졌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50분의 행군 후 10분의 휴식시간이 찾아왔을 때.
준후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몸 안 좋은 사람. 손 들어.”
내공을 섞은 덕분일까, 행군하는 사람들 중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준후가 좌우를 살폈다.
대열 후미에 손을 든 병사가 3명 정도 있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안공(眼攻)을 익힌 준후의 눈에는 그들의 손이 똑똑히 보였다.
준후는 보법을 밟아가며 순식간에 현장에 도착했다.
“어디가 불편하니?”
“아까부터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습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턱이 날카로운 병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부터면 정확히 언제부터지?”
“한 1시간 조금 넘었습니다.”
“쯧쯧쯧. 아프면 바로 말해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심해져서…….”
말끝을 흐리는 병사.
“혹시 앓고 있는 지병이 있니?”
“아뇨.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에 별일이야 있겠어요?”
준후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사관이 대화에 껴들었다.
“누구시죠?”
“본부 중대 부소대장입니다.”
“원래 진료라는 건 10명의 경증 환자 중에서 1명의 중증 환자를 찾아내는 겁니다. 마음을 느슨하게 먹었다간 정말 중요한 환자를 놓쳐 버릴 수도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참견을.”
준후의 반박에 부사관이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환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오오하는 감탄사를 내며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는 두통과 오심을 호소하는 병사와 좀 더 문진을 나누었다.
가족의 병력.
어제와 오늘 있었던 특이할 만한 증상이나 사건에 대해 물었다.
환자는 없다고 대답했다.
큰 질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설마’가 ‘역시나’가 되는 경우를.
준후는 수도 없이 경험해 봤다.
“두통이 제일 답답한 거지?”
“네. 중대장님.”
“으음…… 왜 머리가 아플까?”
준후는 딴청 부리면서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환자의 머리로 흘려보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내가기공의 수법을 사용한 덕에 내공이 두피와 두개골을 통과해서 뇌로 퍼져 나갔다.
뇌혈관과 뇌신경을 훑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질환은…….
뇌졸중이나 뇌출혈이었다.
추운 날씨로 혈관이 좁아져서 막히거나 혈관이 터지는 것이었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환자의 머리에 손을 오래 대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했기에 예전부터 ‘내공 뇌혈관 조영술’의 시전 속도를 꾸준히 올려둔 덕분이었다.
준후는 병사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인자한 미소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걱정할 건 없어 보인다. 그런데 혹시 점심에 과식했니?”
“그……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란 환자의 눈썹이 정수기까지 올라갈 태세였다.
“병증이나 병력이 없을 때 발생하는 두통은 보통 체했을 때 많이 생기거든.”
“그것도 모르고…… 저는 제 머리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훈련 중에 쓰러지는 병사들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준후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면서도 건강한 일이었다.
그게 과해서 건강 염려증(Hypochondriasis)이 되면 안 되겠지만.
준후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구급함에서 소화제를 꺼내 환자에게 건넸다.
환자가 소화제를 입에 넣고.
수통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불편하면 또 말해. 주사도 놔줄 수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왜 아픈지 아니까 덜 아픈 것 같습니다.”
병사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녀석, 좋은 말 했네.”
“제 말이 좋은 말이었습니까?”
“그렇고 말고. 때로는 증상 그 자체보다 어디가 왜 아픈지 몰라서 더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거든.”
준후가 가볍게 환자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대단한 치료를 한 건 아니었지만.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준후를 우러러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진찰의 세심함과 전문성.
환자를 대하는 따스한 태도에 감명 받은 것이다.
쉬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준후는 서둘러 다른 환자들을 살폈다.
나머지 환자들도 큰 이상은 없었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 힘이 없고 열이 나는 것 같고 등등.
증상에 일관성이 없었는데.
준후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쉽게 풀자면.
행군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병사들의 생김새가 전부 다른 것처럼 병사들의 체력도 전부 다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유독 행군을 힘들어 하는 병사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힘들어하는 병사들을 열외로 빼내면 다른 병사들의 힘이 쭉 빠지지 않을까.
다른 군의관이라면.
분명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힘든 걸 꾹 참고 행군을 해라.
너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해당 병사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준후가 어디 평범한 군의관이던가.
팡! 팡!
“기운 차려. 벌써 절반이나 왔다. 너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준후가 힘들어하는 병사들의 등을 쳐주며 말했다.
얼핏 다른 군의관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준후의 손길이 평범한 손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등을 치면서.
준후는 병사들에게 내공을 불어 넣어주었다. 내공을 순식간에 심장으로 흘려보냈다.
심장에 도착한 내공이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병사들의 전신으로 퍼졌다.
“어라? 갑자기 기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러지?”
“저도 몸에 힘이 넘칩니다!”
‘내공 수액술’을 받은 병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찌그러져 있었던 미간과 이마의 주름도 펴졌다.
준후가 의도한 대로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행군.
준후는 여전히 분주한 발걸음으로 대열의 머리와 꼬리를 오고갔다.
그런데 그러던 중.
야전 상의에 넣어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이 시간에 누구 전화지?
아영이 전화?
한국 도수 병원 전화?
휴대폰을 꺼내서 번호를 확인하니 레지던트 동기 경수의 전화였다.
설마 사이코패스 시호의 연락처를 찾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