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45)
무공 쓰는 외과 의사-445화(445/540)
제87장 한파(1)
한나절 만에 숙영지에 도착했다.
훈련이 펼쳐질 곳은 야산이었는데 먼저 도착한 대대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텐트를 치고 있었다.
“야. 거기 똑바로 안 잡을래? 힘을 안 주니까 자꾸 밀리잖아.”
“아. 씨X. 내 말년에 혹한기라니! 혹한기라니!”
“벌써부터 오지게 춥네. 오늘 밤은 다 뒈졌다.”
병사들이 저마다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땅! 땅! 땅!
불평하는 목소리 위로 망치 소리가 얹어졌다. 텐트를 고정하는 나사못을 치는 소리였다.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숙영지는 활기가 넘쳤다.
행군할 때는 볼 수 없었던 활기였다.
준후는 앰뷸런스에서 내린 의무병들과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의무중대에 임시 막사를 짓는다고 했다.
준후는 야전 상의에 넣어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
옛날 시호 전화번호로 통화를 연결했고 목소리가 걸걸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이시호 씨 휴대폰 맞습니까?”
-그게 누군데요?
남자가 낮게 되물었다.
“제가 아는 지인인데요. 의사입니다.”
-그럼 그쪽은 누구신데요?
“저는…….”
준후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 사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선뜻 정체를 말해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서준후라고 합니다. 신경외과 의사예요.”
-살다 살다 의사 선생님하고 통화도 하네.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시답지 않은 소리만 나눴지만.
준후는 남자가 시호가 아님을 직감했다.
시호라면 굳이 준후에게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되었다며.
복수를 준비 중이라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끝일까.
남자가 시호와 한 패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준후가 언젠가 다시 전화를 걸 줄 알고 시호가 휴대폰 번호를 유지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번호를 넘긴 거라면?
준후는 의심에 의심을 거듭했다.
어쩔 수 없었다.
시호는 원래 사악하고 치밀한 인간이었으니까.
준후가 시호와 근무를 했길래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시호는 아직도 남몰래 사람들을 죽이면서 착하고 능력 있는 서전으로 인정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쪽은…… 이시호 씨 지인이 아닌가요?”
-지인이요? 모르는 사람하고 어떻게 지인이 됩니까? 근데 선생님 진짜 의사 맞아요?
남자가 준후의 간을 보았다.
맹했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또렷해졌다.
-신경외과면 머리 보는 과 맞죠? 몇 년 전부터 편두통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료를 핑계로.
내 위치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진료를 원하는 건가.
준후는 금방 감이 오지 않았다.
시호가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녀석이 가족과 아영에게 보복을 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낀 순간부터.
준후의 멘탈은 평소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전화상으로 해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일단 가까운 신경과에 가보세요.”
-신경외과 말고요?
“네. 신경외과는 수술을 하는 곳입니다. 신경과에서 검사 및 약물치료를 해보고 안 되면 신경외과 진료를 봐야죠.”
-감사합니다. 신경과에 가볼게요.
남자의 목소리가 유쾌해졌다.
대화를 좀 더 섞다 보니 남자의 나이가 40대 초반 정도로 느껴졌다. 나이만 놓고 보면 시호와 비슷했다.
‘역시 시호와 바로 연결되기를 바랐던 건 욕심인가.’
준후가 씁쓸하게 웃으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뜻밖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이 번호의 전 주인이 꽤 대단한 분인가 보네요. 예전에도 몇 번 찾는 전화가 있었는데.
“그게 누군가요?”
준후가 다급하게 물었다.
나 말고 또 시호에게 전화한 인물이 있다고?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 사람 아니라니까 바로 끊어버리던데. 하여간 조언해 줘서 고마워요.
남자가 먼저 통화를 끊었다.
준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중대장님. 저쪽입니다.”
약제계 일병 정민이 저 멀리 평지를 가리켰다. 평지에 의무 지대장들과 의무병들이 모여 있었다.
간부들은 잡담 중이었고, 병사들은 분주하게 텐트를 치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중대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총 세 명의 지대장이 허리를 숙여가며 극진하게 준후를 모셨다.
연대는 3개의 대대로 이루어지는데 의무병과도 마찬가지였다.
연대에 의무 중대가 있고, 의무중대에서 1대대와 2대대, 3대대에 각각 의무병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대대의 의무병을 지대병.
대대의 의무 장교는 지대장이라고 불렀다.
준후는 의무중대장으로 3명의 지대장과 3명의 지대병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준후가 미소 띤 채 지대장들을 마주 보고 섰다.
지대장들과 대면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대를 방문할 일이 없어서였다.
의무중대와 의무지대는 일하는 장소와 환경이 독립되어 있었다.
혹한기나 유격훈련이 아니라면.
얼굴을 맞댈 일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수 한 번 청해도 되나요?”
1지대장이 준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 해요?”
“중대장님은 신경외과 레전드시잖아요.”
“레전드씩이나.”
준후가 먼저 손을 내밀자 1지대장이 악수를 나누고 방실방실 웃었다.
“저도 악수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진도 찍어주세요.”
2, 3지대장마저 호들갑을 떨어댔다.
자신이 좋다고 그러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준후는 적당히 지대장들과 장단을 맞춰주었다.
“다들 전공이 어떻게 돼요?”
“저는 피부과 레지던트 2년차입니다.”
“저는 소화기 외과 레지던트 1년차입니다.”
“저는 안과 레지던트 1년차입니다.”
1, 2, 3지대장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앳된 외모를 봤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다들 파릇파릇한 레지던트들이었다.
준후가 듣기로도 지대장은 레지던트가 많다고 들었다.
중대장은 대부분 전문의였고.
‘격세지감이네.’
이렇게 지대장을 보고 있으니 준후는 새삼 자신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레지던트 생활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견 의사가 된 것이다.
나이로만 따져도 지대장들과 거의 띠동갑 차이가 났다.
그래서일까.
지나갈 세월은 까마득하지만.
지나간 세월은 순식간이라는 어떤 경구가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준후는 한참동안 지대장들과 대화를 나눴다.
의무지대 생활에 대해 물었다.
의무지대라고 해서 의무중대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일과 시간에 의무대를 찾아온 병사들을 치료하고.
매주 수, 금요일에 사단 의무대와 한국 도수 병원에 외진 가는 일정도 똑같았다.
“그나저나 산에 들어오니까 날이 훨씬 쌀쌀하네요.”
1지대장이 파르르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텐트는 언제쯤 다 치는 거지?”
1지대장의 말에 모두가 동시에 텐트를 치고 있는 현장을 응시했다.
잡담을 나눈 지도 30분이 지났거늘 의무병들의 작업 속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처음과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준후가 의무병들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니?”
“그게…….”
지대 의무병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땅이 꽝꽝 얼어서 나사못이 잘 안 박힙니다.”
“다른 병사들은 잘 만하던데?”
1지대장이 의무병에게 핀잔을 주었다.
의무병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 쪽 땅이 좀 더 단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텐트 같은 건 잘 안 쳐봐서 말입니다.”
지대 의무병이 변명하듯 말했다.
확실히 의무병이라면 야외 작업에 약할 수밖에 없겠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의무병은 의무대에서 환자만 관리하니까.
“그럼 내가 도와줄 테니까 후딱 끝내자.”
“중대장님이 말씀이십니까?”
놀란 지대 의무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그는 준후가 돕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대장이 뛰어난 의사일지는 몰라도 그 능력이 텐트를 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 않는가.
중대장이 나서면 괜히 일만 복잡해진다.
다른 병사들이 주눅 든다.
이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째 못 믿겠다는 눈치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텐트 치는 건 어디까지나 저희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중대장님. 병사들이 작업하게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대장들까지 준후를 만류했지만 준후는 듣지 않았다.
“망치하고 못 줘봐.”
“아. 네.”
못마땅해 하는 지대 의무병에게서 준후는 나사못과 망치를 건네받았다.
“거기 줄 팽팽하게 당기고 있어.”
“네.”
깡!
준후가 땅바닥에 나사못을 대고 그 위를 망치로 때렸다. 청명한 쇳소리와 함께 나사못 위로 노란 불꽃이 튀었다.
준후의 망치질은 무성의해 보였지만 그 결과는 경이로웠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얼어붙어 단단해진 지면을 뚫고 나사못을 박은 것이다.
“다음 고정 포인트로 가자.”
* * *
30분 뒤.
지대장들과 의무병들을 추위에서 구원해 줄 텐트가 완성되었다.
준후와 지대장 3명.
의무병 12명.
거기에 환자들을 수용할 자체 입원 공간이 필요했기에 텐트는 엄청나게 크고 넓었다.
펄럭. 펄럭.
텐트가 완성되자마자 텐트 바깥 천막이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산바람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증거였다.
“중대장님, 폼 미쳤네. 누가 보면 공병인 줄 알겠다.”
“힘도 장사야. 못을 전부 한 번에 박아버렸잖아.”
“중대장님 없었으면 본부 중대에 텐트 쳐달라고 부탁할 뻔했네. 쪽팔리게.”
의무병들은 앰뷸런스에 실고 온 짐들을 의무대 막사로 나르면서 입이 닳도록 준후 이야기를 했다.
준후의 활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준후가 나서기 전과 후의 나선 후의 차이가 뚜렷했던 것이다.
준후의 지휘 아래.
텐트는 고작 10분 만에 본 모습을 드러냈다.
나사못을 땅에 박고.
프레임을 고정하고.
천막 가장자리에 평행을 유지하는 작업들이 전부 준후의 지휘 아래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 준후가 직접 나서겠다고 할 때만 해도.
실눈으로 의심하던 의무병들은 준후의 첫 망치질을 본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느꼈다.
무조건 중대장님을 따라야겠다고.
“중대장님은 확실히 지대장님들하고 다르네. 원래 이렇게 의무병들 챙겨주시냐?”
1지대 상병 찬우가 의무중대 약제계 일병 정민에게 물었다.
“네. 저희한테 엄청 잘해주십니다. 환자한테도 진심이시고요.”
“이래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는 거구나.”
찬우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찬우의 시선이 중대장을 쫓았다.
천막을 치는 걸 도움으로써 이미 본인 역할을 200퍼센트 했음에도 중대장은 쉬지 않았다.
의무병들을 도와 앰뷸런스에 실린 짐을 날랐다.
그것도 무거운 물건 위주로 들었다.
수액이 담긴 박스라든가, 들것이라든가 등등.
중대장이 짐을 나르니 엉덩이가 무거운 지대장들이라도 차마 농땡이를 피울 수 없었다.
중대장을 따라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짐 정리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끝났다.
잠시 후 군의관과 의무병들이 거리를 두고 막사 안에서 휴식을 취했다.
도중에 본부 중대에서 전기선을 연결해 주고 갔다.
딸칵!
히터가 작동되었다.
빨간불이 들어오고 은은한 온기가 사방으로 퍼져갔다.
다들 텐트를 치고 정비를 하느라 바쁜 걸까.
아직까지 의무대를 찾는 병사는 없었다.
“찬우야.”
중대장이 느닷없이 찬우를 불렀다. 찬우는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긴장했다.
“네. 중대장님.”
“거기 수액 박스 좀 더 안쪽으로 들여놓을래?”
“수액 박스 말입니까?”
“그래. 그 자리에 두면 얼어버리겠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수액 박스가 외풍이 드는 자리에 떡하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대장이 지적을 안 했다면 나중에 꽁꽁 언 수액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을 게 분명했다.
대단한 분이네.
이번 혹한기 훈련은 걱정 없겠어.